1996년 4월 28일은 내 기억에 굉장히 무더운 날이었다. 4월임에도 불구하고 한여름처럼 굉장히 무더웠던 것 같다. 일 년 전 대구 상인동 가스폭발 사고 이후 지내온 시간은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황폐해진 땅 같은 하루하루가 계속되었다. 세상을 떠난 두 친구의 부모님은 소리 없이 동네를 떠났다.

사람들과의 대화가 줄었고, 모든 일에 의욕이 생기지 않아 한동안 거식증세가 나타나기도 했다. 그러다 우연찮게 외고 입학이라는 목표를 세우게 되었다. 외국어를 잘 하면 내 생각을, 내 경험들을 훨씬 더 자유롭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입시 준비에 몰두하면서 조금씩 친구들을 잃었던 충격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밤이 되면 친구들이 사고 현장에서 아파했을, 멀어져가는 자신들의 미래를 안타까워했을 그 시간들이 생각나 숨이 막혀오곤 했다.

사고 1주기였던 그 날, 학교에서 돌아와 집에 배달 온 신문을 펼쳤다. 툭, 하고 떨어지는 또 다른 신문. 일주일에 한 번씩 발간되는 타블로이드판 특집이었다. 그런데… 표지를 보는 순간, 나는 숨이 멎고 말았다. 이상한 낌새를 차린 엄마가 옆으로 다가와 신문을 보셨다.

“얘가 이래서 한동안 동네에서 안 보였구나…”

그 녀석은 초등학교 5학년 때 같은 반 친구였다. 장난도 잘 쳤던 아이였는데, 키가 작고 귀엽게 생겨서 여자애들한테 오히려 남동생처럼 이쁨을 받곤 했다. 어머니는 가출하셨고, 아버지는 알콜 중독으로 일찍 돌아가셔서 할아버지와 둘이서 살았지만 항상 밝은 얼굴로 동네를 뛰어다니던 아이였다. 하루는 운동장에서 같이 놀다가 그 녀석이 문득 나에게 말했다. 자신이 공부는 참 못 하는 거 안다고. 근데 유일하게 잘 하는 게 달리기니까 열심히 해서 전국체전에서 -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도 아니고 - 메달 따서 할아버지한테 맛있는 밥 사드리고 싶다고. 자신은 그거면 된다고. 난 어깨를 쳐주며 말했었다. “넌 해 낼 거야. 내가 응원해줄게!”

신문 1면을 가득 메우고 있던 사진은, 두 다리를 사고로 잃고 그나마 한 쪽만 철심으로 박은 다리로 할아버지와 학교를 나서고 있던, 달리기를 참 잘 했던 바로 그 녀석이었다. 소중한 꿈이 있던 착한 내 친구….

툭, 하고 눈물이 떨어졌다.

교복을 입던 시절에 가질 수 있는 제일 큰 무기이자 매력은 한계 없이 꿈꿀 수 있다는 점이었던 것 같다. 비록 내가 학교 다닐 때에 비해 요즘은 입시 경쟁이 더 심해졌지만, 그래도 아이들에게는 저마다 소중한 꿈이 있다. 서촌갤러리에서 열렸던 예슬이의 전시를 봐도 그렇고, 얼마 전 출시된 시연이의 노래 <야, 이 돼지야!>도 우리를 만나고 있다.

   
▲ 단원고등학교 2학년 4반 18번 빈하용 전시회 포스터 (사진=우승민 감독)
 

지난 달, 서촌갤러리 장영승 대표님이 빈하용이라는 친구의 그림으로 뭔가를 해보고 싶다는 말씀하셨고, 우연히 그림 몇 점을 사진으로 보게 되었다. 이런 기발한 상상력과 그림 실력을 가진 아이가 있다니! 너무 신기하고 매력적이라 보고 또 보았다. 거짓말 아니고 홀린 느낌이었다. 곧이어 하용이의 작품들이 전시 준비에 들어갔고 10월 11일에 전시회가 오픈을 하게 되었다. 전시 준비도 궁금하고 해서 효자동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전날 밤 늦게까지 벽면 칠 작업을 했다는 갤러리는 전시 준비로 한참 바빴다.

갤러리 한 켠에는 일러스트레이터가 꿈이었다던 하용이가 그림을 그리는 공간을 재현하는데, 그 준비로 장영승 대표는 부모님과 부지런히 통화 중이었다. 마침 그날인 10월 8일이 하용이 생일이어서 어머님은 아침 일찍부터 하용이를 만나고 돌아오셨다고 한다. 하용이의 물품을 챙기신다고 회사원인 아버님은 조퇴를 하고 집에 오셨다. 갤러리에서 전시를 준비하는 분들은 그림이 최대한 훼손되지 않도록 부착 재료부터 시작해서 세심한 배려를 놓치지 않으셨다.

나는 하늘색 벽면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캐릭터가 선명하고 재치 넘치는 하용이의 그림들이 이곳에서 전시되면 어떤 느낌일까? 서서히 온몸에서 나는 살아있다, 라는 생동감이 퍼져 나갔다. 얘들아, 너희들을 지켜주지 못한 이 어른들이 너무 미안하다. 그리고 고마워.

   
▲ 단원고 희생자를 기억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서촌갤러리 포스트 (사진=우승민 감독)
 

서촌갤러리에는 지난 주말에 끝난 예슬이 전시를 보러 오신 분들도 계셨다. 수줍게 찾아와 전시를 놓친 것을 아쉬워하던 남학생, 멀리 대구와 청도에서 올라왔다며 자신은 비록 전시를 보지 못했어도 이곳에 다녀가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며 돌아가시던 비구니들….

예슬이는 앞으로 안산으로 돌아가 더 많은 분들을 만날 예정이다. 새로 이 공간에 들어올 하용이의 작품들은 또 얼마나 많은 분들에게 감동과 신선함을 안겨줄까?

마치 정지 상태로 세월호처럼 가라앉을 뻔 했던 예슬이의 꿈, 시연이의 꿈, 하용이의 꿈이 현실이 되어 우리를 만나고 있다. 이것은 그 누구도 아니고 우리 모두가 함께 해야 할 몫이기도 하다. 이제는 더 이상 슬퍼하고 분노로 그치면 안 된다. 진실을 밝혀내는 이 싸움이 길어질 것임을 우리는 진작에 알고 있었고, 피부로 느끼고 있다. 그렇다면 좀 더 오래가야 할 이 싸움을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이고 풀어갈 필요가 있다. 아이들의 꿈이 현실화되는 작업은 우리의 일상에 작은 파장을 불러일으킬 것이라 기대된다.

광화문 농성장으로 돌아가는 길에 펫 샵 보이즈 Pet Shop Boys의 'Go West'를 찾아 들었다. 힘찬 함성 "Together!"로 시작하는 이 노래처럼, 날씨가 추워진다 해도 여전히 답 없는 정부와 일부 언론들과 상대해야하지만 우리는 '함께' 희노애락을 나누면서 온기로 버텨나가야 한다.

   
▲ 서촌갤러리 건물 바깥에 매어있는 노란 리본 (사진=우승인 감독)
 

꿈꾸는 하늘은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

하용이의 그림들이 저 하늘에 맞닿게 되는 이번 주 토요일이 기다려진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