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인인 저는 27살입니다. 어떻게 보면 어리다 할 수 있고, 좋게 말하자면 젊다고도, 좀 비틀어서는 그 나이면 이제 좀 알 만하다고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글쎄요, 상대적이겠죠.

저는 결혼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물론 아이도 낳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제가 유가족을 이해한다는 말은 거짓일 것입니다. 아무리 공감한다고 해도 유가족의 슬픔과 비통함에는 단 1%도 못 미칠 겁니다. 남들의 공감을 끌어내는 일인 영화한다는 놈이지만 자식을 잃은 부모의 마음은 도무지 상상이 안 됩니다.

그러나, 아이들의 마음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에게는 고등학교 2학년 때가 가장 중요한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때 제 삶의 방향을 결정했습니다. 영화를 하기로 결심했고 지금 이 순간까지 그 결심을 지켜나가고 있습니다.

단원고 2학년 7반 박예슬 양 전시회를 보며 떠오른 건, 부끄럽게도 제 과거의 기억이었습니다. 예슬 양의 나이가, 나의 삶의 방향을 결정했던 ‘때’라는 것. 그리고...... 그때부터 지금의 나를 되돌아보며 느낀 것은, 삶은 정말 소중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정말 더 열심히 살아야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미안하게도, 슬프게도, 숨고 싶게도 그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아이들은 얼마나 억울하고 기가 막힐까요! 자신들을 수장시킨 어른들에게 얼마나 화가 날까요!

   
▲ 궂은 날씨에도 동조단식을 이어가는 광화문 광장의 영화인 천막 (사진=이숭겸 감독)
 

혹시 세월호 문제를 제대로 풀어야한다는 우리를 향한, 경멸을 넘어선 혐오와 분노와 광기가 느껴지는지요? 누구보다도 위로와 보상을 받아야 할 대상은 아이들이라고 동감하는지요?

죽은 자의 넋을 달래야한다는 옛 말, 어른들의 그 옛말은 결코 헛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진실입니다.

고민 많고, 잔뜩 부풀어 오르는 그 나이. 디자인을 해볼까 그림을 그리고, 가수가 돼 볼까 작곡을 해보며 진로를 결정하는 그때의 아이들. 아이들이 남긴 작품을 보고 들으며 짐작할 수 있는 것은, 그 아이들 하나하나가 다재다능했고 무언가를 이뤄낼 수 있는 가능성을 담고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가능성을 어른이 되어 활짝 피우고 싶어 했고, 그래서 어른이 되는 날을 기다리며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친구들과 웃고, 사진 찍고, 누군가를 향해 욕을 하고, 마음에 안 드는 인간에게 들이댈 수 있는 활기찬 현재를 품은 미래가 작품들 속에 살아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살아있음! 미래를 현재로 만들려면 필요한 바로 그 살아있음! 그만큼, 미래가 미래로만 남은만큼, 못해 본 것이 너무나 많은 아이들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애인을 끌어안고 잠들어 본적은 있을까?, 클럽에서 정신 줄 놓고 춤을 춰 본적은 있을까?, 진정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제 힘으로 시작해 본 적은 있을까? .......’

아이들은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치는 동안 제도가 시키는 대로 살아왔을 것입니다. 저는 그게 더 열 받습니다. 가능성과 자유의지를 실행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겼다는 사실이. 사고였다며 책임을 피해 달아나는 어른들에게 아무런 책임도 묻지 못한다는 것이.

아이들은 너무도 억울합니다! 그걸 결코 잊으면 안 됩니다! 우리 모두가 잘못했으니까요! 내 부모가, 내 조상이, 내 친구가 지금껏 침묵해왔던 결과니까요! 잊는다는 것은, 침묵한다는 것은, 가만히 있는 다는 것은 방관이고, 그것은 결국 공모자임을 자처하는 것입니다!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국가라는 공동체의 일원입니다. 정치 따위 신경 끄고 자유롭게 인생을 즐기며 살고 싶은 마음, 나 살기도 바쁜데 다른 사람의 일에 신경을 쓰다가는 이도저도 못 한다는 마음, 정치를 혐오하는 마음, 나만 잘하면 된다는 마음. 이 모든 것이 제 마음 안에 들어있습니다.

그러다가도 다시 선명히 보이기 시작합니다. ‘내가 땅위를 둥둥 떠다니는 순진한 생각을 하고 있구나......’ 그러면 지금 바로 이 땅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이 또렷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위해 유가족과 함께 행진하는 시민들 (사진=이숭겸 독립영화인)
 

작고한 이 땅의 어떤 대통령은 자신을 잊으라는 말을 자주 했더랬습니다. 그 말에는 뼈 굵은 뜻이 있습니다. 영웅을 바래서는 안 된다는 것, 누군가가 대신 해주기를 바래서는 안 된다는 것. 결국 약자가, 민초가, 정의로운 사람들이 실천함으로써 스스로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집에 곰팡이가 슬면 닦아내야 합니다. 우리는 그 집의 주인이니까요. 태어나보니 힘이 없는 처지라며 그냥 순응하고 살아간다는 것은 주인이 못 되는 존재, 피지배자임을 자인하는 것이고, 시대를 퇴보시키는 뒷걸음일 것입니다. 우리는 깨어나야 합니다. 지금이 그 때입니다.

유가족은 자신들을 위로해 달라, 공감해 달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국민’이라는 단어를 가장 많이 사용합니다. 그리고 도와 달라는, 함께 해달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유가족이 아닌 우리로서는 함께 마음 아파하고 공감하는 마음이 무뎌지게 되어있고, 언젠가는 결국 한계에 부딪혔음을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유가족은 현실을 직시하고 있습니다. 참여야말로 현실을 만들어 갈 수 있는 중요한 진실입니다. 공감을 마음속에 흩어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바깥에 드러내는 것은 참여를 통해서입니다.

우리는 언제부턴가 이 땅에서 대단한 가르침처럼 자리 잡은 ‘튀어나온 못이 정 맞는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다’라는 말에 저항해야 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그런 말을 할지라도 이제는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그동안 너무나 고분고분하고 미련한 국민이었습니다.

가만히 있었던 매순간마다 후안무치한 자들은 더 뻔뻔해지고 당당해져 왔습니다. 손녀 뻘 캐디의 가슴을 만지며 그녀에게 수치심과 자괴감을 주었음에도 불구한 그 ‘원로’는 ‘뻔뻔당당’ 했고, 억 단위의 뇌물을 받은 국회의원을 자신들의 식구라며 체포동의안을 부결시킨 그 ‘동료’들은 치가 떨리게도 노골적이었습니다.

우리는 어쩌다가 저런 돼먹지 못한 모습을 보면서도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게 된 것일까요? 부당함, 불공정, 억압, 압제 같은 것들이 이제는 만성이 되어버린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언제까지 이대로 있어야 하는 것입니까? 그냥 이번에도 ‘또 봐 줌’의 결과는 어떤 참사로 이어질까요?

세월호 전과 후는 닭이 흘린 눈물만큼도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더 노골적이 되었습니다. 그 패악질의 당당함과 뻔뻔함이, 내 나라 대한민국을 침몰시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과연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이제는 공감 자체가 투쟁이 되었습니다. 투쟁을 하고 있다는 자각이 없이는 제자리 걸음일 것이고, 실천 없이는 몽상으로 끝나게 될 것입니다.

간절히 바랍니다.

강물이 바다를 포기하지 않기를, 그 강물 위에 두둥실 떠다니는 우리 노란 종이배들이 결국 바다로 나아가 아이들을 끌어올리기를! 그래서 그 넋들이 육지로 올라와 이 척박한 땅에 뿌리를 내리기를! 꿈꾸었던 미래를 살기 위하여 더 깊이, 더 굵게 뿌리 내리기를! 땅위로 드러난 모습은 보잘 것 없을지라도 그 아래 벋어나간 뿌리는 굴복을 모르기를!

그리고 상상해 봅니다.

우리의 땅 속 깊이, 우리 벗들의 뿌리가 단단히 얽히고설켜, 뽑을래야 뽑을 수 없는, 땅을 통째로 들어내지 않고서는 감히 풀 한포기 하나조차 함부로 뽑을 수 없는 공감이라는 거대한 뿌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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