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아침, 서울 강남구 포스코 사거리에 김정기(46)씨가 들어섰다. 그는 ‘포스코 원하청 노동자 차별 중단, 사내하청 노동자를 정규직으로 전환하라’ ‘덕산 대표이사는 해고자를 복직시켜라’고 적힌 피켓을 들었다. 김씨는 포스코 광양제철소 사내하청 ‘덕산’에서 일하다 7년 전에 해고됐다. 

7년째 하는 ‘상경 투쟁’이지만 요즘은 감회가 남다르다. 현대·기아차 판결 덕분이다. 법원은 지난달 18일 현대차 사내 하청 노동자 903명을 정규직 직원이라고 판결했다. 기아차 사내 하청 노동자 467명도 정규직 지위를 인정받았다. 그동안 현대·기아차는 하청업체와 ‘도급’ 관계라 주장해왔으나 법원은 ‘파견’ 이라고 판단했다. 

도급과 파견의 핵심적인 차이는 원청 업체의 개입이다. 도급일 경우 원청은 하청업체 노동자의 업무를 지시해서도 관리해서도 안 된다. 개입할 경우 불법 파견이 된다. 파견의 경우 한 업체에서 2년 이상 근무하면 직접고용 관계로 전환된다. 김씨가 일했던 하청 업체 역시 포스코와 ‘도급’ 관계였지만 그는 “제철소 공정상 합법 도급은 불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제철소는 고로(용광로)부터 연속주조기를 거쳐 코일(둥글게 말린 쇳덩이)이 나올 때까지 연속적으로 작업이 이뤄지는데 정규직과 다양한 하청업체가 한 분야씩 담당한다. 자동차 공정과 유사하다. 현대·기아차 판결에서 재판부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인접한 공간에서 전후좌우나 동일한 생산라인에 배치되기도 했고, 이들의 업무가 밀접하게 연동돼 이뤄졌다고 판단했다.

   
▲ 포스코 광양제철소 사내하청 해고노동자 김정기씨가 지난 1일 서울 강남구 포스코 사거리에서 피켓을 들고 있다. 사진=이하늬 기자
 
   
▲ 포스코 광양제철소 사내하청 해고노동자 김정기씨(오른쪽)가 지난 1일 서울 강남구 포스코 사거리에서 피켓을 들고 있다. 사진=이하늬 기자
 

그는 크레인 업무를 했다. 천장에 달린 제철소 크레인은 쇠를 집어 옮긴다. 인형 뽑기 기계를 떠올리면 쉽다. 크레인은 보급, 공간이적, 대차작업, 출하 등에 활용된다. 그는 1996년에 포스코 광양제철소 사내 하청업체 ‘태금’에 입사해 크레인 업무를 10년 이상 했다. 지금은 ‘덕산’으로 이름이 바뀌고 사장도 바뀌었다. 하지만 소속된 노동자와 맡은 업무는 바뀌지 않았다. 

‘52호 크레인.’ 포스코 정규직은 그를 이렇게 불렀다. 무전기에서는 수시로 업무 지시가 떨어졌다. 그는 “정규직 지시를 받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정규직, A협력업체, B협력업체 직원이 한데 모여 일할 때도 있었다. 역시 지시는 정규직이 했다. 하지만 당시 그는 그게 불법의 여지가 있다는 걸 몰랐다. 그렇게 11년을 일했다. 

불법파견은 몰랐지만 차별은 알았다. 정규직과 혼재돼 일했지만 대우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김씨에 따르면 정규직 안전화는 8만 원인데 하청은 3만 원이었다. 작업복은 아예 색깔이 달랐다. 최근에야 같아졌지만 재질은 여전히 다르다. 그는 “안전에는 원하청이 없어야 하는건데…”라고 말했다. 정규직은 4조 3교대로 일을 했지만 하청 노동자들은 3조 3교대로 일했다. 1년으로 따지면 700시간 정도 차이가 난다. 

정규직보다 더 오래 일했지만 더 적게 받았다. 그가 하던 일도 원래는 정규직이 하던 일이었다. “비슷하기라도 했으면 이렇게 열 받지는 않아요. 포스코 하청은 원청의 40%정도 대우만 받는 것 같아요. 어디가도 이런 곳이 없어요.” 김씨 옆에 있던 11년차 하청 노동자는 연봉이 3300만원이라고 말했다. 야근수당, 잔업수당 등을 포함한 금액이다. 그의 기본급은 한 달에 138만원이고 거기에 밥값이 추가로 10만원 정도 나온다. 

열악한 근무환경은 노동조합 결성으로 이어졌다. 2003년 2월 김씨는 동료들과 노동조합(금속노조 포스코 사내하청지회)을 만들었다. “노조는 똥파리에요. 똥에 구더기가 생기잖아요. 그것처럼 현장이 너무 더러우니까 노조가 생기는거죠.” ‘잘 나갈 때’는 조합원이 300여명에 달했다. 하지만 ‘을’조차 못 되는 협력업체 노조가 살아남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원청과 협력업체가 계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노조가 있는 업체는 나쁜 평가를 받는다. 지금 남은 조합원은 40여명 수준이다. 

   
▲ 포스코 광양제철소 사내하청 해고노동자 김정기씨. 사진=이하늬 기자
 

김씨도 노조 활동 때문에 해고됐다. 해고 사유는 근태불량. 2007년 당시 포스코 사내하청지회는 회사에 교섭을 요구하고 있었다. 노조 교섭위원이었던 김씨는 교섭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측을 찾아가느라 그 시간 동안은 일을 못 했다. 근태불량이 된 과정이다. 하지만 이후 지방노동위원회, 중앙노동위원회, 대법원은 이를 ‘부당해고’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제 ‘법적으로’ 남은 건 근로자 지위 확인 소송 뿐이다. 현대차 판결이 나던 날 노조 단체 카카오톡 대화방은 난리가 났다. “재판부의 정의라고 해야하나요? 세상이 조금 바뀌었다는 기분이 들더라고요. 어디 하나라도 제대로 된 판결이 나야 우리 하청 노동자들한테도 ‘기회’가 생기는 거잖아요. 비록 1심에서는 졌지만 현대차 판결을 보니 항소심에서는 충분히 승소할 수 있을 거 같아요.”

포스코 정규직 지위를 인정받게 되면 해고 역시 없던 일이 된다. 원청과의 관계에서 승소하면 하청 업체가 한 해고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는 게 지금까지의 판례였다. 원청 소속 노동자이기 때문에 하청 업체는 해고할 권한 자체가 없다는 것이다. 

자기만 빠져나가고자 했다면 기회는 충분히 있었다. “노조 탈퇴하면 돈을 주겠다, 복직 시켜주겠다, 취업자리를 알아봐주겠다 등 제안을 수도 없이 받았어요. 쓰면 없어지는 돈 몇 푼, 받으면 뭐에 쓰겠어요. 근로자 지위 소송에서 이기면 포스코에서 일하는 하청 노동자 8500명에게 기회가 생기는 겁니다. 그거 믿고 가는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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