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에 따르면 9월 28일 ‘서북청년단 재건위원회’라 자처했던 단체의 회원들이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에서 세월호 참사를 추모하는 노란 리본을 강제로 철거하려 했다 한다. 세월호 참사를 폄훼하고 그 유가족을 비난하고 조롱하는 시도가 공공연히 발생하는 요즈음의 사태도 황당하지만, 이 보도를 보고 필자가 정작 놀란 것은 노란리본을 철거하려 했던 사람들이 ‘서북청년회 재건위원회’를 자처했던 점이다.  

많은 국민들, 특히 젊은 사람들은 서북청년단이 어떤 단체인지 잘 모를지도 모른다. 일제로부터 해방된 1945년 직후 좌우 갈등의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반공 청년조직으로 활동했던 단체였기 때문이다. 물론 훗날 제주 4·3사건의 진상규명 과정에서 서북청년단의 악행이 다수 드러났지만, 이후 서북청년단이 새삼 세간의 주목을 받은 적은 거의 없다. 그런데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으로 ‘서북청년단 재건위원회’라 자처하는 단체가 등장하다니, 난감할 따름이다.  
      
서북청년단(또는 서북청년회)은 어떤 단체인가? 서북청년단은 1946년 11월30일 결성되었다. 해방 직후 소련군이 진주한 가운데 좌파세력이 주도하는 통치기구가 만들어지고 있던 당시 북쪽의 많은 사람들이 월남했는데, 주로 반공 우익인사, 친일파, 대지주, 종교인 등이 그들이었다. 북한에서 피해를 당했거나 당할 우려가 많았던 그들은 월남을 통해 남쪽을 선택했던 것이다.  

서북청년단은 이 같은 월남인들을 배경으로 만들어졌는데, 특히 평안도를 중심으로 한 북한의 서북지역 청년들이 그 중심을 이루었다. 북한의 사회주의체제를 피해 월남했던 만큼 그들이 매우 극단적인 반공주의자였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정작 문제가 되었던 것은 좌파세력을 분쇄하기 위해 남한 곳곳에 파견되었던 그들이 자주 백색테러 행위를 감행했다는 점이다.
 
이 같은 서북청년단의 테러 중 가장 커다란 피해를 남긴 곳은 제주도였다. 경찰의 발포로 6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던 1947년 3·1절 기념행사 이후, 그리고 1948년 4·3사건의 발생을 계기로 육지 경찰과 서북청년단 그리고 경비대가 제주도에 대거 투입되었는데, 결국 이는 이후 3만 명의 제주도민이 희생되었던 제주 4·3사건으로 이어졌다.

이와 관련, 당시 제주 주둔 경비대의 9연대장이었던 김익렬은 4·3사건 발생의 원인으로 다음과 같이 서북청년단의 만행을 지적하고 있다. “최초 미군정이나 내가 판단한 폭동의 원인은 제주도에 이주하여 온 서북청년단원들이 도민들에게 자행한 빈번한 불법행위가 도민의 감정을 격분시켰고, 그후 경찰이 서북청년단에 합세함으로서 감정의 대립은 점점 격화되어 급기야 도민폭동으로 전개된 것이었다.”(김익렬 육필수고, ‘4·3의 진실’)  
 
거의 70년이 다 되어가는 과거에 존재했던, 그러나 그 테러의 결과로 한국 현대사에서 지울 수 없는 상흔을 남긴 우익 테러단체를 재건한다는 의미의 ‘서북청년단 재건위원회’가  지금 등장하고 있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나? 하나의 해프닝이라 한다면 그것은 비난거리도 되지 못한다. 차리리 외면해 버리면 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일회성 해프닝이 아니라면? 최근 보수단체의 이름으로 자주 발생하고 있는 비이성적 만행들은 ‘서북청년단 재건위원회’의 등장이 근래에 확대되고 있는 하나의 흐름 속에 위치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즉 테러에 유사한 행동도 마다하지 않는 극우적 흐름이 그것이다.

   
▲ 정해구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사실 친일파 척결이 제대로 되지 않은 우리의 현대사에서 보수와 파시즘을 구분하는 경계선은 분명치 않다. 물론 민주화의 진전에 따라 파시즘적 요소는 자연히 소멸될 것으로 기대해왔다. 그런데 최근 보수의 이름으로 극우 파시즘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도 일견 정부여당의 방관 속에서. 그런 점에서 ‘서북청년단 재건위원회’를 자처하는 단체의 등장은 무언가 우리 사회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의 한 증표가 아닌지  매우 우려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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