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로 시작하는 소월의 시 <진달래꽃>은 굳이 입시교육 때문이 아니더라도 한국인이면 누구나 외우는 시로 첫손 꼽힌다.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려 줄 테니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라니, 얼핏 떠난다는 사람에 대해 참 속없이 애틋도 하다 싶지만, 그렇게 가는 뒤에 대고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라고 맺는 뒤끝은 곱지 않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난다’는 아리랑 노랫말과 마찬가지로 절대 덕담은 아니지 싶은 이 앙심을 ‘한국인 고유의 한’이라고 한다던가?

그런데도 사람들은 대개 애틋한 처음만 기억하고 가슴 저려하곤 한다. 뒤끝이 아무리 매워 봤자 달달한 시작에만 취해 흐지부지 엉망진창 된 나중은 제대로 갈무리하지 못해서 같은 잘못을 하고 또 한들 누구를 탓하랴?

임순례 감독의 <제보자>는 제발 좀 그러지 말라고, 과정도 찬찬히 톺아보고, 마무리까지 책임 좀 가져보라고 눈길 돌아 세운다. 무슨 일에 대해? 황우석 광풍에 대해. 또는 그 비슷한 대중적 열광들에 대해. 그런데 웬 진달래꽃 타령이냐고?

   
▲ 영화 제보자 포스터
 

황우석이 아니었다면, 사뿐히 즈려 밟히는 고운 진달래꽃은 마음 떠난 이 발걸음 편치 않게 만드는 가장 우아한 안녕의 표현으로 기억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제보자>의 실제 상황이었던 2005년 11월, MBC '황우석 신화의 난자 의혹'이 방송된다고 하자 대중들은 진실에 눈을 뜨기는커녕 이 방송이 국가적 인재의 연구를 방해했다면서 엄청난 비난을 퍼부어 댔다.

한 여성단체는 아직 꽃이 피기도 전인 그 한겨울, 진달래꽃을 구해 황우석 출근길에 사무실까지 진짜로 즈려 밟고 가시라고 울며불며 꽃잎을 뿌리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심지어 '여성들은 군대에 가지 않으니 대신 난자채취를 하자'며 자발적으로 난자를 기증하겠다고 나서기까지 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퍼포먼스는 황우석이 이벤트 업체에 의뢰한 자작극이었다.

상징을 끌어들이려거든 좀 맥락이나 살펴서 그 사물과 문화에 담긴 의미라도 살렸어야지, 배신자에게 짓밟히는 꽃 같은 마음 헤아려보라는 시를 아무리 배신 때려도 믿고 따르겠다는 맹신의 표현으로 뒤바꿔 버리다니!

그 사건 이후, 진달래꽃을 보면 봄소식이나 소월의 시보다 광기에 휩싸인 ‘패드립’이 생각나고, 아름답게 봄을 맞기도 전에 짓밟힌 꽃보다 생명을 틔워 보지도 못하고 실험실에서 만신창이가 되어 폐기처분된 난자며, 억지로 난자 채취하느라 만신창이가 되었을 여성들의 난소가 떠오르게 되었다.

<제보자>는 이 희대의 사기극을 돌아보지만, 이장환 박사(이경영)를 마냥 나쁜 놈으로 몰아세우지 않는다. 거짓을 밝히기 위해 연구원 심민호(유연석)는 양심 뿐 아니라 자신의 가족과 과학자로서의 앞날까지 모두 걸어야한다. 진실을 알리려 고군분투하는 윤민철 PD(박해일)는 언론인으로서의 자부심 뿐 아니라 함께 일하는 보도팀의 존립까지 걸어야한다. 그 진실을 세상에 알릴 정보를 손에 넣은  팀은 본분을 다하려면 팀장(박원상) 뿐 아니라 부서의 국장(권해효)까지, 프로그램 하나의 결방 여부가 아니라 여태 쌓아온 자리를 줄줄이 다 걸어야한다.

   
 
 

임순례 감독은 이 지점에서 상황을 이렇게까지 키우게 된 게 원래 이장환 박사가 사기꾼이기 때문이라고 몰아붙이지 않는다. 방송국 사장이 프로그램에 제동을 걸게 만든 게 그저 권력집단의 외압에 영합해서라고 비웃지도 않는다.

진실을 보고 판단하려 하는 대신 자신이 믿고 싶은 대로 믿고 진실을 외면하는 대중, 그런 대중에게 그들이 믿고자 하는 것만 보여주는 언론, 그 믿음을 부추겨 ‘애국’과 ‘국익’이라며 선동하는 국가주의의 허상 앞에서 지식이, 양심이, 신념이 얼마나 위태로운 지를 드러낸다. 국가의 주인인 국민이 국가주의의 노예가 되는 전도된 상황에서 대중은 얼마나 가벼우며, 또 얼마나 무거운지를 서늘하게 비춰 보인다. 그건 대중이 단지 무지해서만은 아니다.

한참 황우석이 국가 경제를 살릴 영웅이요, 병든 국민을 살려낼 기적의 구세주로 떠받들어지던 시절, 한때 언론인이었다가 언론자유를 위한 노조 활동 끝에 언론사를 떠난 이후 어렵사리 행정고시를 통해 공무원이 된 오랜 동료들을 만난 자리에서 대중적 열광에 휩쓸리는 것이 얼마나 맹목적인 지를 겪은 적이 있었다.

교육부에서 학술진흥재단 기금을 담당하는 일을 하던 선배가 그 기금을 황우석 쪽에 갖다 써 달라고 먼저 제안해서 실적을 평가받았다고 자랑하자, 노동부에서 교육사업 쪽을 담당하던 동기도 자기네도 어떻게든 황우석 쪽을 지원하는 사업을 만들고 있다며 맞장구를 쳤다.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하느냐, 경제효과보다 생명윤리에 대한 원칙을 먼저 살펴야하지 않느냐는 염려를 내비쳤다가 결국 한때 뜻을 같이 했던 이들과 의가 상했다.

<제보자> 시사회에서 실제 ‘제보’를 한 연구원 역의 비중이 PD 역할보다 적은 까닭을 묻는 관객의 질문에 임순례 감독은 이렇게 대답했다. 직접 진실을 밝힌 연구원만 제보자가 아니라 그 진실을 보도하기 위해 노력한 언론인들 역시 제보자라고 생각한다고. 모두가 제보자가 되어야만 진실을 밝힐 수 있는 세상이기 때문이라고.

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사회인가? 자신이 속한 조직에서 자신이 가진 지식으로 자신의 일을 바로 잡지 못하기 때문에 바깥에 대고 그 내막을 알리는 것이 ‘제보’다. 그 제보를 배신이라고 비난하고, 양심에 따라 진실을 밝히는 것이 범죄라고 몰아붙이고, 결국 진실이 드러났을 때 여태 드리웠던 허위의 장막을 거둬준 데 대해 감사하기보다 그 진실의 발판을 무너뜨리는 사회.

<제보자>는 그런 사회에서 지식을 사업 아이템으로 가공하는 학계, 그 아이템을 국익이라는 이름으로 활용해 권력의 발판으로 삼는 정치권, 대중에게 그 아이템을 뻥 튀겨 홍보하는 언론이 벌이는 상황극의 배후가 바로 대중이라고 ‘제보’하는 영화다. 상황극의 구경꾼이 아니라 주인공이 되고 싶은 대중의 욕망이 빚어낸 광기에 대한 고발이다.

   
 
 

그 대중은 지금도 일베가 폭식으로 진실을 위해 단식하는 세월호 유가족의 고통을 조롱하게 만들고, 서북청년단이라는 학살집단의 망령을 불러내 희생자들의 넋을 화형시키는 패악을 당당하게 저지르도록 추동하고, 진실을 알리려던 언론인들을 제도 바깥으로 밀어내고 있다.

<제보자>는 묻는다. 대중이라는 이름으로 저지르는 폭력의 공범이 될 것인지, 그 폭력에 대한 제보자가 되어 진실을 밝힐 것인지. 영화 개봉을 앞두고 한참 바쁜 시기에도 영화인 동조단식 천막에서 노란 리본을 만들어 시민들에게 나누어 주던 임순례 감독의 이 서늘한 시선은 그 대중이 광기에서 벗어나 양심과 진실을 보도록 카메라를 겨눈다. 지금 그 길은 진달래꽃 즈려 밟는 꽃길이 아니라 험난한 가시밭길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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