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갑자기 세상을 떠난다고 생각해 보자. 당장 상속이 개시되고 이재용 부회장 등은 엄청난 규모의 상속세를 내야 한다. 이재용 부회장의 미션은 상속세를 합법적으로 다 내고도 아버지의 그룹 지배력을 그대로 물려받는 것이다. 삼성그룹은 오랫동안 3세 승계에 대비해 왔지만 여러 정황을 종합하면 이재용 부회장은 아직 준비를 마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건희 회장이 아직 살아있어야만 하는 이유다.

대기업 전문기자인 곽정수 한겨레 선임기자는 삼성의 후계구도를 왕조 체제에 빗대어 설명한다. 왕조 체제에서는 왕이 죽기 전에는 아들이 왕이 될 수 없다. 왕이 쓰러져 병석에 누워 있어도 마찬가지다. 모든 권력은 왕에게 집중돼 있고 왕세자는 왕의 살아생전에 2인자도 될 수 없다. 왕의 존엄과 권위를 탐하는 것은 설령 왕세자라고 하더라도 왕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고 반역이기 때문이다. 설령 왕이 식물인간이 돼도 왕은 왕이다.

지난 2003년 국민은행 김정태 행장이 쓰러졌던 때가 있었다. 2주일이 넘도록 병명조차 제대로 밝히지 못했고, 인공호흡기를 차고 의식불명 상태에 들어가자 국민은행 안팎에서는 장례치를 준비를 해야 한다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뒤늦게 비정형성 급성폐렴으로 밝혀졌고 인공호흡을 받은 폐렴환자는 사망률이 100%라는 전례를 깨고 38일만에 회복하고 43일만에 복귀했다. 김 전 행장도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왔다”고 말할 정도였다.

김 전 행장은 복귀하자마자 부행장 세 명을 전격 경질했다. 김 행장의 입원 기간 중 회사 경영 방침과 어긋나는 조치를 취했다는 게 이유였다. 버젓이 행장이 살아있는데 포스트 김정태를 노리고 움직였다는 데 분노했다는 후문도 들렸다. 국민은행이 재벌 체제는 아니지만 역시 왕은 죽기 전까지 왕이고, 왕의 권위에 도전했다가는 죽음을 맞게 된다는 진리를 실감하게 하는 사건이었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지난해 5월 김포공항을 통해 입국하는 모습.
©연합뉴스

삼성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1966년 사카린 사건으로 이병철 전 회장이 물러나고 이건희 회장의 형 이맹희씨가 경영 전면에 나섰다. 왕이 버젓이 살아있는데 왕세자가 왕위에 올라 권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셈이다. 이맹희씨의 독단적인 행동은 이병철 전 회장의 심기를 건드렸고 엉뚱하게도 청와대 투서 사건에 엮여 누명을 쓰고 쫓겨난다. 투서를 보낸 건 이창희씨였으나 이병철 전 회장은 이맹희씨를 함께 내친다.

설령 왕위를 물려받을 게 확실하다고 하더라도 왕이 죽기 전까지는 왕이 아니다. 왕세자는 언제라도 축출될 수 있다. 그게 왕조의 운영 원리고, 왕의 권위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이맹희씨는 왕의 눈 밖에 났고 평생을 세상의 바깥으로 떠돌았다. 이재용 부회장이 아버지 살아생전에 아무런 목소리를 낼 수 없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모든 권력은 왕에게 집중돼 있고 왕이 죽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권력 승계가 시작된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연합뉴스.

이건희 회장의 재산은 13조원에 육박한다. 삼성전자 지분이 3.4%, 삼성생명 지분이 20.8%, 제일모직(에버랜드) 지분이 3.7%, 그리고 삼성물산과 삼성종합화학 지분이 각각 1.4%와 1.1%씩 있다. 지난 5월 기준으로 1년 평균 주가로 환산한 결과 이것만 해도 11조7180억원. 여기에 비상장 주식이 4790억원 정도 되고 부동산이 공시가격 기준으로 6780억원 정도 더 있다.

최대 50%의 상속세 세율이 적용되지만 여러 가지 상속세를 줄이는 합법적인 수단이 있다. 때문에 만약 이재용 부회장이 아버지의 재산을 모두 물려 받는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내야 할 상속세는 적게는 3조원에서 많아봐야 5조원 정도가 될 거라는 게 전문가들의 관측이다. 이재용 부회장의 보유 지분은 삼성전자 0.6%, 제일모직 25.1%, 삼성SDS 11.3%, 삼성자산운용 7.7% 등 모두 더해도 3조원이 채 안 된다.

이재용 부회장이 상속세를 다 내고 아버지의 지배력을 유지하는 두 가지 미션을 모두 수행하려면 그룹 지배구조의 핵심인 삼성생명과 삼성전자 지분을 그대로 넘겨받아야 한다. 이 부회장이 보유하고 있는 제일모직과 삼성전자 지분도 내다 팔 수 없다. 결국 팔 수 있는 지분은 삼성SDS 정도 밖에 없는데 삼성SDS를 상장 시킨 뒤 보유 지분을 모두 내다 팔면 최대 3조원까지 현금을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부회장의 믿는 구석은 삼성전자다. 이 부회장이 보유한 0.6%와 아버지에게 물려받을 3.4%를 더하면 4.0%. 이것만 해도 7조원, 주가가 한창 좋았을 때는 9조원에 육박했을 지분이다. 이 부회장은 아버지 지분을 물려받고 난 뒤 삼성전자에서 나오는 배당으로 상속세를 내려할 가능성이 크다. 삼성전자가 최근 몇 년 동안 배당을 적게 주면서 현금을 쌓아두고 있는 것도 이런 계산에서일 거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삼성그룹 계열사 이건희 일가 개인지분 현황 ⓒ하이투자증권 정리. (에버랜드는 제일모직으로 사명 변경.)
 

이트레이드증권에 따르면 삼성전자의 이익잉여금은 올해 연말 177조원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배당 여력이 차고 넘친다는 이야기다. 지난해에는 30조원이 넘는 당기순이익을 기록하고도 배당은 2조원에 그쳤다. 배당 성향은 7% 수준. 지난 5년 평균 배당 성향도 7% 수준에 그쳤다. 이재용 부회장 입장에서는 상속하기 전까지는 최대한 배당을 적게 주고, 주가를 낮게 가져가면서 상속 이후 배당을 최대한 늘리는 게 유리하다.

삼성그룹 안팎에서 떠도는 유력한 시나리오 가운데 하나로 삼성생명을 사업회사와 지주회사로 분할하고 이재용 부회장이 삼성생명 지주회사가 보유한 삼성전자 지분을 매입하는 방안이 있었다. 이재용 부회장이 삼성생명의 최대 주주 자격을 유지하면서 제일모직이 금융지주회사로 전환되지 않도록 할 수 있고 동시에 이재용 부회장의 삼성전자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할 수 있게 된다.

이 시나리오의 치명적인 문제는 삼성생명의 삼성전자 지분을 그대로 가져간다는 가정에서만 가능하다는 데 있다. 지난 5월 국회를 통과한 금융지주회사법 개정안에 따르면 비은행 금융지주회사의 산업자본 소유가 금지된다. 과거에는 은행이 아닌 보험회사나 금융투자회사 같은 지주회사가 일반 자회사를 거느릴 수 있었지만 앞으로는 불가능하게 된다. 삼성생명이 지주회사가 되면 삼성전자 지분을 내다 팔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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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생명의 삼성전자 지분은 삼성그룹 순환출자 구조의 핵심이다. 이건희 회장과 제일모직이 삼성생명을 지배하면서 삼성생명 보험 가입자들의 위탁 자산으로 삼성전자를 우회 지배하고 삼성전자를 통해 다른 계열사들을 지배하는 구조인데 정작 이건희 회장 일가의 삼성전자에 대한 지배력이 크지 않다는 게 약점이다. 삼성생명이 삼성전자 지분을 처분하면 삼성그룹 전체가 공중분해될 수도 있는 구조다.

이밖에도 새누리당 강석훈 의원이 발의한 공정거래법 개정안에는 보험사와 증권사 등이 보유한 일반 계열사 지분의 의결권을 2017년까지 5%로 단계적으로 낮추는 방안이 포함돼 있다. 새정치민주연합 이종걸 의원이 발의한 보험업법 개정안에는 보험회사가 보유할 수 있는 계열사 지분을 취득원가가 아니라 시가 기준으로 계산해 제한하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삼성생명이 보유한 삼성전자 지분 대부분을 처분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중간금융지주회사도 대안으로 거론되고 있지만 도입하자는 논의만 있었을 뿐 아직 허용돼 있지 않은 상태다. 제일모직 밑에 삼성생명을 중간금융지주회사로 두고 삼성생명이 계열사로 편입되는 방안이지만 결국 법이 바뀌지 않는 이상 불가능하다. 지금 상황에서 이재용 부회장은 지주회사 전환을 밀어붙일 수도 없고 그냥 버틸 수도 없는 입장이다. 그리고 어떤 경우든 삼성 특혜라는 논란을 피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결국 이재용 부회장 입장에서는 국회에서 금융산업 분리 문제가 해결되기 이전에는 상속 작업을 시작할 수 없다. 금산분리를 피할 수 없다면 후계 구도를 완전히 새로 짜야 하고, 자칫 상속이 시작된 뒤 금산분리 폭탄이 터질 경우 그룹이 반 토막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치권의 눈치를 보면서 시간을 끄는 게 최선인 상황이다. 이건희 회장이 지금 세상을 떠나서는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만약 보험지주회사나 중간금융지주회사 등이 허용돼 삼성생명의 삼성전자 지분을 그대로 가져갈 수 있게 된다면 이재용 부회장은 제일모직과 삼성생명 지주회사의 지분을 맞교환해 삼성전자의 지분을 최대한 늘리려 할 것으로 보인다. 삼성생명 지분은 이미 충분하기 때문에 삼성생명에 대한 지배력을 조금 줄이더라도 삼성전자에 대한 지배력을 높이는 게 이재용 후계 구도의 관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재용 부회장이 보유한 삼성전자 지분이 6.5%까지 늘어나면 삼성전자가 10조원을 배당으로 뿌릴 경우 이 부회장에게는 6500억원이 떨어진다. 이자와 배당소득세 등을 내고도 4500억원. 상속세는 5년 분할 납부가 가능하기 때문에 삼성SDS 지분을 팔아 현금을 마련하고 삼성전자에서 배당을 받아 납부하면 상속세 5조원은 크게 부담되는 수준은 아닐 것으로 분석된다.

결국 이재용 부회장 입장에서 최상의 시나리오는 삼성SDS의 기업 가치가 충분히 오르는 동시에 삼성전자와 삼성생명 주가는 충분히 떨어져서 상속세를 손쉽게 털어내는 것 뿐만 아니라 국회에서 금산분리 규제가 파격적으로 완화돼 손쉽게 지주회사로 전환할 수 있는 여건이 맞아떨어져야 가능하다. 아직 상속을 받을 준비가 안 돼 있다는 이야기다. 시간은 과연 이재용 부회장의 편일까.

   
▲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과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
 

만약 지주회사 관련 법이 개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건희 회장이 세상을 떠나고 상속이 개시된다면 이재용 부회장은 떠밀리듯 지배구조 개편에 착수해야 한다. 최악의 경우 삼성생명을 계열 분리하고 계열사 상당 부분을 정리해야 할 수도 있다. 이재용 후계 구도와 관련한 수많은 시나리오가 나돌지만 어떤 시나리오도 지배력 축소는 불가피한 상황이다. 준비 안 된 상태에서 상속이 시작되는 게 이재용 부회장 입장에서는 최악의 시나리오라고 할 수 있다.

왕조 체제에서는 아들이 왕이 되는 게 당연하지만 왕이 무능하면 백성들이 고통스럽다. 삼성 같은 재벌 체제에서는 회장이 무능하면 그룹 전체가 위기를 맞거나 아예 망할 수도 있다. 이병철과 이건희 회장은 평가하기에 따라 다르지만 삼성그룹을 세계적인 기업집단으로 키워낸 탁월한 경영자였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재용 부회장이 할아버지와 아버지 정도의 경영 능력을 갖추고 있는지는 검증된 바가 없다.

재벌이 한국 경제의 성장 동력이었다는 관점과 오히려 경제력 집중으로 생태계를 무너뜨리고 있다는 관점이 충돌하지만 분명한 건 3세 경영으로 들어가면서 삼성이 직면한 위험이 한국 경제의 시스템 리스크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흔히 대마불사라고 하지만 과거 경험으로 보면 대마가 무너지면 최종 대부자는 국가가 된다. 국가적인 리스크 관리 차원에서라도 이재용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 문제를 사회적 논의의 영역으로 끌어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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