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붙잡히는 걸 어쩔 수 없었다.

“나 형님 집에 안 가면 안 되는 거겠지?”

내가 쭈뼛거리자 아내는 무슨 말인지 금방 알아차렸다.

“내가 애들 데리고 갔다 올게. 당신 마음 가는대로 해.”

그렇게 해서 추석 하루 전인 9월 7일, 나는 광화문의 영화인 단식 천막에 앉아 있게 되었다.

추석 연휴가 닷새였다. 생때같은 자식들을 잃은 후 처음인 명절을 길바닥에서 맞이할 사람들을 생각하면 기가 막혔다.

그 마음들을 무슨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우리가 가늠이나 할 수 있을까?

그나마 광장을 찾아주던 발걸음들마저 줄어들 것이 분명했다.

그저 나라도 그 빈자리 손톱만큼이나마 채우자는 생각이었다.

 

 

천막에 앉았지만 그러나 마음은 내내 불편했다. 막연한 마음으로 준비한 카메라도 어디에 세워야할 지 알 수 없었다. 도로 건너편에서 악의에 가득 찬 요설들을 쏟아내는 자들이 십자가를 앞세우고 있는 게 섬뜩했고, 전날 있었던 소위 ‘폭식’의 흔적들도 절망스러웠다.

우리 정말 이대로 괜찮은 것일까...... 다른 사람의 고통에 공감하고 손을 내미는 지극히 인간다운 행동을 불온하게 바라보고 물어뜯는 곳에서 우리가 제대로 살아낼 수 있는 것일까......

참사가 일어났을 때, 중학생인 둘째 딸아이는 TV 앞에서 말없이 눈물만 쏟아내고 있었다. 딸아이는 내게 아무 것도 묻지 않았고, 있을 법한 분노도 표현하지 않았다. 나는 그 침묵이, 며칠 내내 이어지던 딸아이의 소리 없는 눈물이, 무서워졌다. 아무 관련도 없었던 내 딸 아이가 이런 내상을 입었다면......

더 이상은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천막에 우두커니 앉아 밥 짓는 연기처럼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분노와 절망감, 낯선 슬픔들을 내버려둔 채 하릴없이 카메라를 들고 일어섰다. 그저 이 공간에서 흘러가는 이 시간만이라도, 오늘 밤과 또 내일 찾아올 추석날의 아침만이라도 기록해 두자는 심정으로 포인트를 찾았다.

그렇게 밤새 천막과 촬영 포인트 사이를 들락거리면서 새벽을 맞았고 아침이 왔다. 아침 햇살 가득한 광장을 찍기 위해 포인트에 섰을 땐 내 마음도 거짓말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그리곤 마치 대기하고 있던 것처럼 새 한 마리가 천막 위로 날아드는 게 파인더로 똑똑하게 보였다. 세 마리의 새들이 또 다른 방향에서 프레임 안으로 날아들었고, 한 무리가 되어 힘차게 활개짓을 하며 서서히 프레임 밖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새였다.

도시의 흔한 풍경이었다.

그러나 그 때의 내게 그건 새가 아니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였고, 쾌활한 수다였고, 활기찬 몸짓들이었다.

그 시간 세종로 사거리엔 작은 카메라와 나 밖에 없었다. 아마 잠시 혼자 울었던 것 같다.

 

편집을 끝낸 후, 음악을 공부한 큰 딸아이와 아내에게 보여주며 내가 물었다.

2분이 넘는데, 음악이 있어야 할까?

“아니.” 두 사람의 대답이 같았다. “그건 아닌 것 같아.”

그렇지...? 그래... 무슨 장식이 더 필요하겠는가.

우리의 요구는 너무나 명료하고, 단순하며, 정의롭다.

진상을 규명하자.

약속대로 세월호 특별법을 만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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