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일 법원은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이 부하 직원들을 조직적으로 동원해 정치에 관여하고 선거에도 영향을 미치려 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공직선거법 위반은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이번 판결에 대해 법조인을 비롯해 많은 국민들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며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검찰은 항소를 망설이고 있는 듯한 눈치입니다. 검찰 지휘부가 청와대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입니다. 

지난 12일 김동진 수원지법 성남지원 부장판사가 법원 인트라넷을 통해 지적한 것처럼 국정원의 선거개입을 밝히려고 했던 검사들은 모두 쫓겨났고, 국정원 선거개입을 덮으려는 공안부 소속 검사들이 국정원 댓글사건 수사를 지휘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정치권과 시민단체가 검찰의 항소를 촉구하고 나섰습니다. 

1심 재판부(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1부·재판장 이범균 부장판사)는 원 전 원장의 선거개입 행위를 계획적이고 능동적인 ‘선거운동’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판결문을 자세히 보면 검찰이 항소해야 하는 이유가 나옵니다.

판결문 중 “피고인들의 행위가 ‘선거 또는 선거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에 해당할 여지가 있음은 별론으로 하고…” 부분이 대표적입니다. 재판부는 “피고인들의 행위가 ‘선거 또는 선거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에 해당할 여지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행위가 ‘선거운동’에 해당함을 인정하기에는 검사의 입증이 부족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지난 11일 오후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 1심 판결 후 서울중앙지법 서관 앞에서 항소 입장을 밝히고 있는 원세훈 전 국정원장. 사진=강성원 기자
 

원칙적으로 재판부는 검사의 공소장 변경이 없으면 공소장에 적힌 내용만 가지고 판단합니다. 공소장에 적혀있지 않은 내용까지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원세훈 1심 재판부가 ‘선거운동’에 해당하는 행위에 대해 엄격한 해석을 내린 것도 검사가 공직선거법 제85조 1항만으로 기소했기 때문입니다.

지난 2월 13일 개정되기 전, 선거법 85조 1항은 ‘공무원은 그 지위를 이용해 선거운동을 할 수 없다’였지만 개정 이후엔 ‘공무원 등 법령에 따라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하는 자는 직무와 관련해 또는 지위를 이용해 선거에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등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할 수 없다’는 조항이 1항으로 추가됐습니다.

검사가 공소를 제기한 시점이 지난해 6월 14일이기 때문에 재판부는 선거법이 개정되기 전인 1항에 해당하는지만 판단했던 것입니다. 공무원이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금지하는 조항이 바로 선거법 제86조인데, 2012년 당시 민주당에서 고발장을 제출할 때는 선거법 85조와 86조가 모두 들어가 있었으나 검찰 기소 단계에서 86조는 어떤 이유에선지 빠져버렸습니다. 

이것이 검사가 선거법 86조까지 포함하는 공소장 변경을 통해 반드시 항소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판사 출신의 박범계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변인은 지난 12일 국민TV 라디오 <조상운의 뉴스바>와 인터뷰에서 “선거법 85조는 선거운동 금지이고 86조는 선거에 영향을 미칠 행위 금지 조항인데 이범균 판사는 원 전 원장의 혐의가 86조에 해당될 것처럼 암시했다”면서 “검찰은 반드시 항소해야 하고 항소해서 공소장을 86조로 변경하면 선거법 위반 부분도 유죄가 나올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고 1심 재판부가 선거법 적용을 의도적으로 피해갔다는 지적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닙니다. 재판부는 “원 전 원장이 특정 선거나 특정 후보자를 염두에 두고 조직적인 선거운동을 지시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고 하면서도 “특정 정당 또는 특정 후보자를 직·간접적으로 언급하면서 지지·비판한 행위는 선거에 영향을 미치려는 목적의지가 인정된다”는 대법원 판례를 원용하기도 했습니다.(판결문엔 유죄 인정 부분 누락)

원 전 원장이 주재한 전부서장회의 녹취록에도 원 전 원장은 “이제 총선도 있고 대선도 있고, 종북좌파들은 북한과 연계해 가지고 어떻게 하든지 다시 정권을 잡으려 그러고…야당이 되지도 않은 소리를 하면 처박아야지. 금년에 잘못 싸우면 우리 국정원은 없어지는 거야”(2012년 2월 17일), “금년에 대선도 있고 해서 통합진보당만도 13명이고 종북좌파들 40여 명이 여의도에 진출했는데 이 사람들은 우리나라의 정체성에 대해 계속 흔들려고 할 거고…그에 대한 대처도 우리 전 직원이 혼연일체가 돼가지고 준비도 같이 해주기 바랍니다”(2012년 4월 20일) 등 특정 정당을 언급하면서 선거개입 발언을 분명히 했습니다.

재판부 역시 “국정원 직원들이 제18대 대통령 선거 시기에도 정부의 정책이나 국정 성과 등을 홍보하는 글과 정부 시책에 반대하는 야당 또는 야권 정치인들을 반대·비방하는 글을 작성·게시했는데, 당시 대선 후보자 또는 후보예정자 등에 대한 반대·비방 취지의 글도 상당수 포함된 사실이 인정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검사의 공소사실 선별 기준이 자의적이었다’며 검찰에 책임을 떠넘겼습니다.

이에 대해 이광철 변호사는 “재판부가 능동적이고 계획적인 의미의 선거운동에 해당하지 않더라도 선거에 영향을 미치려고 하는 국가정보기관의 일련 행위들이 있었다고 판단했다면, 차라리 공소장 변경을 명령하든지 축소사실의 인정 법리(공소장 변경 없이 사실인정)에 따라 선거법 위반의 유죄를 인정할 수 있었다고 본다”며 “무슨 분단이니 증거법이니 온통 끌어다가 면죄부를 줘버렸다”고 비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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