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의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에 대한 무죄만큼 ‘황당’한 판결이 또 있다. 바로 노종면 전 언론노조 YTN지부장을 포함한 조합원 4명이 국가 등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소송 기각판결이다. ( 관련기사 : 노종면 등 YTN노조, ‘불법사찰’ 소송서 패소 )

서울 남대문경찰서는 2009년 3월 22일, 총파업을 하루 앞둔 언론노조 YTN 지부 조합원 4명(노종면, 임장혁, 조승호, 현덕수)을 경찰소환 불응을 이유로 체포했다. 사측이 같은 해 1월 업무방해 혐의 등으로 고소한 YTN지부 조합원 19명 가운데 이들 4명에 대한 추가 조사가 필요하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경찰 담당 수사관과 일정 조율을 통해 3월 26일 출석하기로 예정돼 있었는데도 이들이 긴급체포된 것과 관련, 이후 이 과정에 국무총리실의 압력과 불법적 개입이 있었다는 정황이 드러나 큰 파문이 일었다. 

이들 4명은 2012년 국가와 YTN 사찰 담당자였던 원충연 전 국무총리실 소속 공직윤리지원관실 조사관을 상대로 “경찰의 불법체포로 유무형적 손해를 입었다”며 손배소를 제기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35부(부장판사 이성구)는 지난 5일 국무총리실의 언론사 사찰과 체포 과정서의 개입을 확인했으면서도 “체포가 타당성을 잃은 것이라고 인정하기엔 부족하다”며 외려 국가의 손을 들어줬다.

   
▲ 2009년 3월 22일 경찰에 의해 기습체포됐던 전국언론노동조합 YTN지부 노종면 지부장이 24일 오후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서 구속영장실질심사를 마치고 남대문경찰서로 이송되고 있는 모습. (사진 = 이치열 기자)
 

재판부, 국무총리실 개입 인정했지만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원충연 전 조사관의 언론사 불법사찰 기록 △공직윤리지원관실 관계자들의 방문 및 만남을 인정한 김기용 전 남대문경찰서장의 증언(기사링크) △YTN 기자와 김기용 전 경찰서장의 대화에, 국무총리실 등과 협의를 거쳐 체포영장을 신청했음을 시사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는 점 등을 인정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YTN 사태에 관한 동향파악 및 원고들의 체포여부에 관한 의견제시가 국무총리실 사무와 관련된 것이므로 담당 수사관이 관계 국가기관과 협의 등을 거쳐 체포영장을 신청한 것을 가리켜 그 자체로 위법하다고 볼 수 없다”고 했다. 국무총리실의 불법사찰을 정당화했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원고 측 소송대리인인 최강욱 변호사는 15일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국무총리실 인사들이 경찰서장을 만나서 YTN 얘기를 한 사실이 증언을 통해 확인됐고 재판부도 개입 정황을 인정했다”며 “그럼에도 재판부는 국무총리실 직무범위에 있다며 형식 논리를 들어 궤변을 늘어놓았다”고 비판했다. 

원고인 임장혁 언론노조 YTN지부 공정방송추진위원장도 “한마디로 판결을 요약하면, ‘국무총리실 압력을 받아서 체포한 것은 사실이나 그 정도는 할 수 있다’는 것”이라며 “우리가 소송을 했던 이유는 원충연 전 조사관이 불법 사찰한 내용을 가지고 압력을 넣어 경찰 체포가 이뤄졌으니 그것의 부당함을 가려달라는 것이었다. 재판부는 되레 불법사찰을 정당화했다”고 전했다.

파업 직전 사측, 경찰에 노조 자료 전달

YTN 조합원들은 재판에서 긴급 체포의 목적이 일반 수사에 있지 않고 ‘합법 파업의 저지’에 있다고 주장했다. 수사기관이 다른 목적을 위해 권한을 남용한 ‘불법행위’라는 것이다. 그러나 재판부는 “노종면 등은 파업을 빌미로 계속해서 출석을 미루거나 출석하지 아니할 가능성이 대단히 높아 체포의 필요성이 있다”는 경찰의 주장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손재화 YTN 법무팀장이 2009년 3월 17일, 노조의 임단협 최종 요구안을 협상이 끝나기 전 경찰에 전달했다는 사실이 재판 과정에서 새롭게 드러난 점 △YTN지부가 이미 담당 형사와의 조율을 통해 3월 26일에 경찰 출석하기로 한 점 △수사기관이 “피의자들이 총파업을 예고하고 있다”며 통신사실 확인자료 제공까지 요청한 점 등은 “체포 사유가 수사 목적에 있다”는 경찰의 주장과 이를 수용한 재판부 판결에 의문을 갖게 한다. 

임 위원장은 “체포 이전까지 성실하게 조사를 받았고, 수사를 피할 수 없다는 점은 모두가 인지하고 있었다”며 “그런 상황에서 파업 때문에 조사에 응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서 체포해야 한다는 건 경찰의 ‘예단’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 2009년 3월 22일 언론노조 YTN지부 조합원들이 서울 남대문경찰서 앞에서 긴급기자회견을 열고 조합지도부 긴급체포를 규탄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 = 이치열 기자 truth710@)
 

특히 체포 직전 법무팀장이 노사 협상의 중요 내용을 경찰에 전달한 것은 체포가 파업저지와 결부된 것 아니냐는 의심을 가능케하는 대목이다. 이에 대해 YTN지부 측은 “임단협 협상이 끝나지 않은 시점에서 고소인인 사측이 노조의 협상안을 경찰에 전달했다는 점은 그 자체로 부당할 뿐 아니라 경찰의 체포가 노조 파업 저지 수단으로 쓰였다는 것을 방증하는 사례”라고 지적했다.

재판부도 판결문에서 “체포영장의 신청 이유 중에 원고들이 파업에 가담하는 것을 저지할 목적이 포함돼 있었을 가능성이 있기는 하다”며 애매모호한 표현을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결론은 ‘기각’이었다. 한편, 손 팀장은 15일 해당 사실을 묻는 기자에게 “(기자의) 취재 목적이 불분명할뿐더러 오래된 일이라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사법부, 계속 눈치보기식 판결만 내려”

이들은 현재 항소 여부를 고심 중이다. 지난 11일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 대한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가 무죄로 끝난 것에 대해 우려가 가시지 않아서이다. 임 위원장은 “원세훈 판결과 YTN 불법사찰 손배소 판결은 증거가 명백함에도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데 공통점이 있다”고 지적했다. 

임 위원장은 “현 사법부의 판단이 이렇게 치우쳐 있다면 민주주의에 대한 기대를 가질 수 없다”며 “항소는 당연한 것이나 정권에 경도돼 있는 현 사법부에 비춰봤을 때 이후의 항소가 실효성이 있는지 의문”이라고 덧붙였다. 

최 변호사도 “행정부의 권한 남용이나 범죄 행위가 있을 때 확실하게 처벌해야 하는 곳이 사법부”라며 “이석기, YTN, 원세훈 등 최근 판결을 보면 사법부가 계속 눈치보기식 판결을 내리고 있다. 삼권분립의 원칙이 무너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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