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딸이 백혈병에 걸려 죽었습니다. 2인 1조로 함께 일한 이숙영씨도 똑같이 백혈병으로 사망했습니다. 백혈병이 그 흔한 감기도 아닌데 두 명이 일하다 두 명 다 백혈병으로 죽었는데 이게 산재가 아니면 무엇이 산재입니까. 그런데도 삼성은 산재가 아니라고 하고 약속한 치료비도 주지 않고 근로복지공단은 삼성이 거짓말할 기업이 아니라고 합니다.”(고 황유미씨 아버지 황상기씨)

7년 전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던 말이 법적으로 인정받게 됐다. 근로복지공단이 지난달 21일 선고된 삼성반도체 백혈병 항소심 판결에 대해 상고기간인 지난 11일까지 상고하지 않아 고 황유미씨, 고 이숙영씨가 산재로 확정됐다. 당시 서울고등법원은 이들에 대해 업무와 질병의 인과관계를 인정했다. 앞서 2011년 1심 법원 역시 같은 판단을 내렸을 때 근로복지공단은 항소했으나 이번엔 상고를 포기했다.

근로복지공단은 왜 대법원에 상고하지 않았을까. 끝까지 가더라도 결과를 바꾸기 힘들 것으로 판단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직업병 피해자들과 법적·사회적 싸움을 함께 이어온 반도체노동자의건강과인권지킴이(반올림)는 “2심에서 근로복지공단이 항소를 하지 않은 이유는 법원이 1심에 이어 2심에서도 같은 판결을 한 데다 2심의 경우 1심보다 엄격한 증거에 입각해 결정을 내린 만큼 상고를 한다 해도 결과가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던 것으로 보인다”며 “이미 직업병 문제가 사회적 이슈가 된 상황에서, 이를 대법원까지 가져갈 경우 제기될 사회적 비판도 고려했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로써 소송 당사자인 황상기(고 황유미씨 아버지)씨와 이선원(고 이숙영씨의 남편)씨는 유족급여 등 산재 보상을 받게 된다. 황씨는 12일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돈만 따졌다면, 예전에 삼성 사람들이 찾아와서 10억을 준다는 등 원하는 액수는 다 준다고 이야기 했을 때 받았으면 더 많이 받았을 것”이라며 “화학약품을 미리 알리지도 않고 병에 걸린 노동자들에게 개인 질병이라고 했던 삼성의 나쁜 행태를 바로잡았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 고 황유미씨 아버지 황상기씨. 사진=반올림 제공
 

황씨는 병에 걸려 머리를 빡빡깎고 왜소한 모습의 딸 유미의 모습이 떠올라 만감이 교차한다고 말했다. 그는 “유미가 아플 때 병의 원인을 찾겠다고 약속했는데 힘들었지만 약속을 지킨 건 뿌듯하다”며 “그러나 한편으로는 유미가 아플 때 삼성 사람들이 와서 백지사표 받아가고 유미 업무를 조작하는 등 괘씸한 것도 생각난다”고 씁쓸하게 말했다.

반올림은 12일 논평을 내고 “이 싸움은 ‘아픈 노동자가 병의 원인까지 증명해야 한다’는 산재보험제도의 문제점을 드러냈고, 산재인정 투쟁을 넘어 ‘반도체 전자산업 노동자들의 건강과 노동권’에 대한 전반적인 문제제기로 이어졌다”고 평가했다. 반올림은 유미씨의 죽음을 계기로 만들어진 단체다. 

반올림은 황씨와 마찬가지로 진행 중인 교섭에 대해서도 “삼성이 변했다는 세간의 시선들이 있지만 이제까지 교섭장에서 보여준 삼성의 태도는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며 “이제라도 삼성이 잘못을 인정하고 많은 피해자들에게 제대로 보상하며, 또 다른 피해자들이 나오지 않도록 철저한 재발방지책 마련을 약속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반올림 교섭단이 애초 삼성에 제시한 요구안은 크게 세 가지로 사과·재발방지책·보상이다. 반올림은 “삼성은 사과와 재발방지책에 대해서는 ‘이미 입장을 밝혔다’며 논의가 없기를 바라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며 “교섭에 임하는 삼성의 태도가 앞으로도 변하지 않는다면, ‘교섭단 8명 피해가족들에 대한 보상’ 외에는 그 무엇도 해결될 수 없다”고 비판했다. 

한편 함께 소송을 제기했던 고 황민웅씨의 아내 정애정, 김은경, 송창호씨는 산재로 인정받지 못해 지난 4일 대법원에 상고했다. 고등법원은 지난달 21일 이들에 대해 “일부 유해물질에 노출된 사실 및 가능성은 인정되지만 충분히 노출됐다는 증거가 부족하다”며 산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회사가 영업비밀 등의 이유로 정보를 공개하지 않은 상황에서 피해 노동자 혹은 피해 노동자 가족이 이를 증명하기가 쉽지 않아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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