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정보원 심리전단 직원들의 사이버 활동은 선거 시기에서 주권자인 국민들의 판단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는 매우 위험하고 부적절한 행동임은 분명하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과거 국가기관의 선거개입 등으로 인한 관권선거로 자유민주주의의 본질이 훼손됐던 뼈아픈 경험이 있으므로, 국가기관인 국정원으로서는 이러한 과오를 다시는 밟지 않도록 유의해야 함이 당연하다.”

지난 11일 국정원 직원들에게 정치·선거개입을 지시한 혐의로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게 국정원법 위반 유죄 선고를 내린 1심 재판부(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1부·이범균 부장판사)의 판결문 내용이다.

재판부는 판결문을 통해 원 전 원장을 비롯한 국정원 사이버 심리전단 직원들이 공무원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선거에 직접 개입하는 여론공작 활동을 펼쳤음을 여러 차례 강조한다. 

재판부는 “국가기관이 특정한 여론을 조성할 목적으로 이와 같은 국민들의 자유로운 여론 형성 과정에 직접 개입하는 행위는 어떠한 명분을 들더라도 절대로 허용돼서는 안 된다”면서 “국정원 직원들이 제18대 대통령 선거 시기에도 정부의 정책이나 국정 성과 등을 홍보하는 글과 정부 시책에 반대하는 야당 또는 야권 정치인들을 반대·비방하는 글을 작성·게시했는데, 당시 대선 후보자 또는 후보예정자 등에 대한 반대·비방 취지의 글도 상당수 포함된 사실이 인정된다”고도 했다.

   
▲ 지난 11일 오후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 1심 판결 후 서울중앙지법 서관 앞에서 소감을 밝히고 있는 원세훈 전 국정원장. 사진=강성원 기자
 

하지만 재판부는 공직선거법 적용에선 검사가 제출한 증거만으로는 원 전 원장이 정치관여를 넘어 선거운동을 지시했거나 국정원 직원들이 특정 후보를 당선·낙선 목적으로 계획적이고 능동적인 선거운동을 했다고 볼 근거가 부족하다며 무죄라고 판단했다.

재판부가 원 전 원장의 지시로 국정원이 조직적으로 선거에 개입하는 활동을 펼쳤음을 인정하고도 ‘선거운동’의 뜻을 지나치게 ‘주관적’으로 해석해 선거법 적용을 의도적으로 피하게 했다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현행 공직선거법 제85조(공무원 등의 선거관여 등 금지) 제1항에는 “공무원 등 법령에 따라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하는 자는 직무와 관련하여 또는 지위를 이용하여 선거에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등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또한 같은 법 제86조(공무원 등의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금지)에서도 ‘소속 직원에게 특정 정당이나 후보자(후보자가 되고자 하는 자를 포함)의 업적을 홍보하는 행위와 공무원의 지위를 이용해 선거운동의 기획에 참여하거나 그 기획의 실시에 관여하는 행위’를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다. 

과거 대법원(2011.4.28. 선고, 2010도17828 판결) 판례에서도 차기 지방선거에 입후보 예정인 현직 시장이 읍면동장 등 공무원 조직을 이용해 선거구민에게 자신의 업적을 홍보했다는 혐의로 공직선거법 위반 유죄를 인정한 사례가 있다. 

당시 재판부는 공무원 등 공적 지위에 있는 자가 소속 직원에게 특정 정당이나 후보자의 업적을 홍보하는 행위를 하게 하면 공무원 등 공적 지위를 불문하고 누구든지 공직선거법에 따라 처벌된다고 판결했다.

원 전 원장 등에 대한 사건을 심리한 재판부가 트위터 기초계정으로 인정한 국정원 심리전단 이아무개(@shore0987) 직원의 경우만 해도 지난 대선을 앞두고 새누리당 대선 캠프와 새누리당을 도와 불법 선거운동을 한 ‘십자군알바단(십알단)’이 트위터에 올린 글을 대량으로 퍼날랐다.

이 계정은 새누리당 트위터 계정이 올린 “행복캠프 국정운영의 패러다임을 국가에서 국민으로 바꿔서 국민 한 분 한 분의 꿈이 이루어지는 행복한 나라, 반드시 만들겠습니다” 등 당시 다수의 박근혜 후보 홍보 글을 리트윗했다.

   
지난 11일 오후 서울 중구 파이낸스빌딩 앞에서 ‘불법대선개입 원세훈 국정원장 선거법 무죄 판결 규탄 촛불집회’가 열렸다.
ⓒ연합뉴스
 

아울러 원 전 원장이 지난 2012년 2월 17일 주재한 전부서장회의 녹취록에 따르면 원 전 원장은 “이제 총선도 있고 대선도 있고, 종북좌파들은 북한과 연계해 가지고 어떻게 해든지 다시 정권을 잡으려 그러고…야당이 되지도 않은 소리를 하면 처박아야지. 금년에 잘못 싸우면 우리 국정원은 없어지는 거야”라며 누가 들어도 여당과 여당 후보 당선을 위한 활동까지도 국정원의 임무라고 지시했다. 

이 때문에 “범행의 시기인 2012년 1월경은 대선일까지 약 11개월가량의 상당한 기간이 남아있던 때로 그 대선 후보자가 누구인지조차 전혀 확정되지 않은 상태였다”거나 “대선 이후 원 전 원장이 계속해 국정원장의 직위를 유지할지조차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다수의 직원에게 선거운동의 지시를 하였다는 것 역시 경험칙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재판부의 판단은 범행의 본질에 대해 재판부 스스로 외면하기 위한 논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평가가 나온다.

재판부는 또 지난 2010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학교 무상급식 정책을 지지하는 활동을 한 시민단체에 대해 공직선거법 위반이 아니라고 한 대법원 판례를 인용했다. 하지만 당시 재판부가 공소사실 중 무상급식 정책에 찬성·반대하는 특정 정당 등을 직·간접적으로 언급하면서 이를 지지·비판한 행위를 유죄로 판단한 것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이와 관련해 이호중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당시 대법원이 시민단체 활동을 선거법 위반이 아니라고 한 것은 시민사회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차원이었는데 재판부는 마치 시민사회 활동을 국가기관의 선거개입 행위와 같은 선상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원용했다”면서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했는데 의도가 없었다’는 주장은 박근혜 대통령에게 타격을 안 주는 선에서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고 비판했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