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한국 사회에는 한 차례 광풍이 불었다. 바로 ‘황우석 파문’이었다. 세계최초로 인간배아 줄기세포 배양에 성공한 황우석 박사는 국민적 영웅이었다. 하지만 불법 매매된 난자를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애초 줄기세포가 조작됐다는 충격적인 내용이 언론보도를 통해 드러났다.    

이 ‘신화’에 처음으로 의문을 제기한 이들이 한학수 PD를 비롯한 당시 MBC 팀이었다. 별 기대 없었던 제보자와의 만남이 시작이었다. 은 그해 11월 22일 난자 매매 의혹을, 12월 15일 줄기세포 논문 조작 의혹을 제기했다.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결론적으로 그들의 이 외로운 싸움은 승리했다. 그러나 신화의 힘은 생각보다 막강했다. 방송 후 이들에 대한 언론과 여론의 전방위적 공격은 예상을 뛰어넘었다. 그로부터 9년 뒤인 올해 10월, 이 사태를 다룬 영화 <제보자>가 개봉한다. <제보자>의 주인공 윤민철 PD(박해일)의 모델인 한학수(45) PD를 지난 1일 MBC 사옥에서 만났다. 

   
▲ 10월 개봉 예정인 영화 <제보자> 포스터. 주인공 윤민철 PD의 모델은 2005년 당시 황우석 의혹을 폭로했던 한학수 MBC PD다.
 

취재 당시 연차가 얼마나 됐나.
“10년차로 중견PD로 진입하는 시기였다. 알만큼 알고 수완도 늘었지만 20대의 열정과 강건함은 여전한, 예민하게 날이 서 있는 때였다. 마침 제 역할을 맡는 박해일씨 나이가 38살로 당시 제 나이와 같다. ‘황우석 취재’는 내 17년 경력 중 가장 커다란 취재였고, 가장 커다란 시련을 안겨줬다.”

이 사건의 취재 과정이 궁금하다. 
“황우석 박사의 두 번째 논문이 발표된 뒤 생명윤리 문제를 논쟁적으로 다뤄보자고 생각했다. 그러던 찰나 당시 최승호 부장이 ‘이런 제보가 왔다’며 제보자를 만나보라고 했다. 제보자가 첫 만남에서 ‘진실이 먼저냐, 국익이 먼저냐’고 묻더라. 그때는 몰랐지만 사안 전체를 깊숙이 꿰뚫는 근원적인 질문이었다. 하지만 제보자가 줄기세포가 가짜일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니 ‘제정신인가’란 생각도 들었다.(웃음)”   
   

   
▲ 황우석 박사
 

제보자가 믿을만한 증거를 가지고 왔던가. 
“아니었다. 다만 자신의 경험에 비춰볼 때 이렇게 한꺼번에 줄기세포를 만들어내는 건 어렵다고 말했다. 그것만으로는 증거도 안 되고 취재하기 어렵다고 하자, 난자 매매 장부를 꺼내들더라. 숨길 수 없는 팩트였다. 믿어볼만한 제보라고 생각한 또 다른 이유는 황 박사를 스타덤에 올린 복제소 영롱이에 대한 논문이 없다는 말을 듣고서였다. 마지막으로 ‘촉’이었다. 제보자의 절박한 눈빛과 말에서 진실함이 느껴졌다. 그 사람이 제보로 얻을 이익도 없다고 판단했다. 제보자는 이미 국무총리 표창까지 받은 의사였다.”

   
▲ 2005년 12월 기자회견을 열어 황우석 의혹에 대한 입장을 밝혔던 PD수첩의 최승호 당시 부장과 한학수 PD.
 

제보내용에 대한 MBC 내부 반응은 어땠나. 
“취재가 알려지면 황 박사 측의 로비나 압박이 들어올 수 있기 때문에 보안사항이었다. 보고라인을 최소화했다. 미국 피츠버그대학을 찾아가 황 박사의 논문이 조작됐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서야 시사교양국장이 본부장과 사장에게 보고했다. 최승호 부장이 ‘사실만 취재하라’며 외풍을 다 막아줘 개인적으로 외압을 느낀 적은 없었다. 그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취재였다.”

취재윤리 논란이 불거지면서 두 번째 방송이 연기되기도 했다. 
“줄기세포 진위 논란보다 난자 매매 문제를 먼저 제기하면 국민들이 좀 더 객관적으로 사안을 바라볼 것이라고 봤다. 하지만 의도와 전혀 다르게 사태가 진행됐다. 광고가 끊겼다. 실제로 은 단 하나의 광고도 없이 방송됐다. 2005년 12월 3일 YTN에서 취재윤리 위반을 보도하면서 인사위에 회부됐고, MBC는 대국민 사과를 했다. 프로그램도 사실상 폐지 수순으로 돌입했다.” (이후 취재윤리 논란보도와 관련한 허위 과장보도와 관련해 YTN은 사과했다. 도리어 YTN의 보도는 검증 대상인 황우석 측과 함께 동행해 기획한 보도로 판명나면서 '청부취재'라는 비판을 받았다.)  

   
▲ 지난 1일 MBC 사옥에서 만난 한학수 MBC PD ⓒ조수경 기자
 

황우석 박사의 스피커 역할을 했던 언론의 공격도 만만찮았다. 
“우선 과학담당 기자들이 격하게 반발했다. 1999년부터 2005년까지 황 박사에 대해 써온 기사가 오보로 판명 나는 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몇몇 독립언론을 제외한 대부분 언론이 나에 대해 적대적이었다. 진실을 규명하기보다는 여론을 등에 업고 따라가려고 했다. 그런 동종업계 분위기에 심한 상처를 받았다.”

가장 힘들었던 점은 뭐였나.
“국민들로부터 외면 받았다는 사실이었다. 의 성역 없는 보도에 대해 다수 국민들은 늘 지지를 보냈다. 하지만 황우석 보도는 ‘진실을 말하지 말라’는 상황이었다. 엄청난 고립감과 불안, 두려움에 시달렸다. 언론사에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 황우석 박사의 줄기세포 의혹이 밝혀진 1년 후에도 황우석 지지자들은 MBC 앞에서 항의 집회를 열었다.
 

제보자도 조선일보에 의해 신상이 공개되는 등 고생이 많았다. 
“가장 중요한 제보자 ‘닥터K’와 부인 B씨는 신상공개 이후 1~2년 길거리를 전전했다. 그러다가 ‘닥터K’는 기초 의학에 매진해 현재 강원대 교수로 가 있다. 작년에 생물학연구정보센터(BRIC)에 실명을 공개한 류영준 교수다. 한국사회에서 제보자가 갖은 핍박을 받으며 사는 것과 달리 이 강인한 인물은 자신의 삶을 지켜냈다. 개인적으로 어깨의 큰 짐을 덜었다. 제보자의 삶이 망가졌다면 취재했던 우린 얼마나 괴로웠겠나.”

현재 언론과 황우석 사태를 다뤘던 당시 언론을 비교해보면. 
“일단 과학자가 연구 성과를 발표해도 논문이 있는지 검증이 안 되면 기사를 쓰지 않는 문화는 정착됐다. 한편으로는 당시 정부-언론-학계의 삼각동맹이 하나의 축으로 움직이며 황우석 신화를 만들었는데 지금도 관피아의 문제와 경제권력과 언론의 유착과 같이 모양을 달리할 뿐 구조적인 문제는 여전하다.”

   
▲ 책 <진실, 그것을 믿었다>
 

황우석 취재기를 다뤘던 책 개정판이 나왔다. 
“초판은 지엽적인 문제까지 방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기에 쓰인 책이라 개정판에서 불필요한 요소는 버렸다. 그리고 황우석 박사 재판 결과와 제보자의 실체, 한국사회의 변화 등을 추가했다. 제목도 <여러분! 이 뉴스를 어떻게 전해드려야 할까요?>에서 <진실, 그것을 믿었다>로 바꿨다.”

관객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이 영화는 왜 그토록 황우석 박사에게 환호했고 보도 후 충격에 휩싸였는지, 줄기세포가 거짓으로 판명됐을 때 허탈해하며 불신했는지 등 한국사회의 심리를 다룬 첫 번째 문화적 해석이다. 어떤 부분이 개선되고 또 변하지 않았는지 복기해볼 수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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