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널리즘에서 ‘단정적인 표현은 안된다’ ‘범죄혐의자의 신원을 함부로 공개해서는 안된다’는 것은 기본원칙이자 법적요구이다. 이것은 언론이 단정적으로 보도하거나 신원을 공개하게 되면 법적 판단과 처벌을 받기 전에 먼저 여론재판으로 단죄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무분별한 여론재판은 법치사회를 부정하는 부작용이 만만치 않다.

미디어 수가 많아지고 경쟁이 과열되면서 타언론사와 차별화 내지 상업적 목적으로 이런 최소한의 기본원칙이 지켜지지 않아 피해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최근 이병헌을 협박하여 50억원을 요구했다는 뉴스가 보도되면서 누가 이런 공갈, 협박을 했는가에 초점이 맞춰졌다.

경향신문, 조선일보 등 주요 언론사들은 “이병헌을 협박한 20대 여성 중 한 명이 걸그룹 글램(GLAM) 멤버로 확인됐다”며 당사자의 실명을 공개해 보도했다. 그러나 연합뉴스 등 다른 언론은 신원을 밝히지 않고 “영화배우 이병헌(44)씨와 음담패설을 나누는 동영상을 공개하겠다며 거액을 요구한 20대 여성들에 대해 구속영장이 신청됐다”고 보도했다. 연합뉴스는 강남경찰서의 말을 인용하여 “공갈미수 혐의로 A(21·여)씨와 B(25·여)씨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고 전해 공갈미수 혐의자의 신원을 공개하지 않았다.

어느쪽이 저널리즘의 원칙을 지키며 합법적 보도를 한 것일까?

신원공개 여부의 첫 번째 기준은 피보도자의 신분이 공인(고위공직자 포함)인가 아닌가 여부에 있다. 공인의 경우, 신원공개가 불가피하다고 판단해서 법적으로도 문제시하지 않는 경향이 농후하다. 그러나 이병헌 사건의 경우, 그 공갈혐의자가 갓 데뷔한 가수라고 했다. 그것도 그룹 멤버의 한 명이라고 했다. 이 한 명 때문에 걸그룹 글램의 이미지는 산산조각이 났다. 그룹 해체의 위기를 맞게 될 것이다. 공갈미수 혐의를 받고 있는 결그룹 멤버는 아직 그렇게 유명하지도 않아 유명인(셀리브러티)도 아니며 더더욱 공인은 아니다. 따라서 당사자의 신원을 공개해서는 안된다는 결론이 간단하게 나온다.

   
 
 

두 번째 기준은 사건의 성격이다. 사건의 성격이 한국 사회에 큰 영향을 주는 인륜을 유린하는 패륜극이나 중대한 반국가적 범죄의 성격을 갖추고 있는가 여부이다. 이 사건은 자기들끼리 사사롭게 만나 술자리에서 음담패설을 하고, 그것을 가지고 공갈을 한 ‘잡스런 사건’이다. 법적 판단은 법원이 알아서 해주도록 여지를 남겨야 한다. 언론에서 먼저 이들의 신원을 모두 공개해버리면 법적 판단 이전에 대중으로부터 매도당하게 된다.

언론에서 이런 내용을 모르고 신원을 공개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실제 보도현장에서 기자나 데스크가 더 잘 알고 있으면서도 신원을 공개하는 데는 다른 이유가 있다.

명분은 ‘독자의 알권리’로 포장하고 실제로는 클릭 수를 올려 많이 보게 만든다는 것이다. 클릭수를 올린다는 것은 광고수익과 직결되는 문제다. 또한 다른 언론사도 그렇게 보도하기 때문에 우리도 ‘저널리즘 원칙 준수’ 운운할 수 없다는 심리도 발동한다. 하지만 이런 이유가 저널리즘의 원칙을 준수하지 않는 언론에 면죄부를 줄 수는 없다.

각종 윤리강령과 보도가이드 라인에 ‘개인 사생활 보호’ 등을 강조하면서도 정작 지켜야 할 때 지켜지지 않는 기자들의 보도준칙. 단순히 윤리강령만 위반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 법까지 위반하는 무리한 과잉보도를 일삼고 있다. 법치사회를 부정하는 기자들의 준법의식이 위험수준이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언론의 위법보도에 대해 아무도 문제삼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생활 침해로 모든 것을 잃어버린 대중스타는 절망에 빠지고 목숨을 끊을지언정 보도의 잘못은 알지 못하고 자책하거나 실의에 빠져버린다. 또한 설혹 이를 문제삼아 법원에 가더라도 대부분 언론에 대해 솜방망이 처벌에 그친다. 이건 공식이 됐다. 견제장치가 없는 언론은 스스로 타락하고 있음을 깨닫지도 못한다. 강자에 대해서는 공개해야 할 신원조차 감춰주고 약자에 대해서는 보호해야 할 신원조차 공개하는 이런 아이러니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대안은 있다. 피해자나 그 관련자들은 해당 언론사에 대해 법적 책임을 하나씩 물어야 한다. 그 처벌이 비록 솜방망이에 그치더라도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는 인식을 심어줘야 한다. 피해자들이 적극적으로 시정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럴 때 언론사도 법과 원칙안에서 취재, 보도하는 것이 스스로 언론자유를 존중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정확히 깨달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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