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통신위원회가 지난 1일 이인호 서울대 명예교수(78)를 KBS의 새 이사로 추천하자 언론계에서 일제히 비난을 쏟아내고 있다. 경향신문과 한겨레 등 진보 언론과 전국언론노조, KBS 양대노조는 말할 것도 없고 시민단체인 민주언론시민연합(민언련)까지 이인호 교수의 이사 선임을 비판했다. 이들은 “KBS의 독립과 공영성을 훼손할 극우 뉴라이트 인사의 이사장 선임을 즉각 철회하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흥미로운 것은 조중동의 보도 태도이다. 이들은 민감한 정치문제가 제기될 때면 경향신문과 한겨레와 대조되는 주장을 펼쳐왔다. 하지만 조중동은 이인호 KBS 이사 선임과 관련해 방통위의 이사 추천 결정이 나온지 하루가 지난 2일까지도 특별한 입장을 보이지 않고 있다. 경향신문이 지난 1일자 사설에서 지적한 것처럼  문창극 전 국무총리 후보 사퇴 파동이 남긴 교훈의 하나가 “일제 식민지배를 미화하는 따위의 왜곡된 역사인식을 가진 인물은 책임 있는 자리를 맡아서는 안 된다는 사회적 합의를 확인”한 것이었다.

조중동이 사실상 침묵하고 있는 것도 이 사회적 공감대를 건드리는 주장을 했다가 예측 못할 여론의 공격을 받게 될까 두려웠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KBS의 새 이사장으로 내정된 뉴라이트 원로의 이사 선임을 적극 옹호하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방통위는 조중동도 옹호할 생각을 못하는 인사를 KBS 이사로 추천하는 대담한 결정을 내렸다는 말이 된다. 일각에서 청와대 개입론을 제기하는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다. 혹자는 박근혜가 또 하나의 “인사 참극”을  연출하기 시작했다고도 말한다. 정말 그렇다면 박근혜의 '오기' 인사는 개전(改悛)불능인가?

이인호 교수의 KBS 이사 추천이 논란이 되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그 중에서 이 교수의 조부가 저명한 친일파였으며 이 교수가 그동안 뉴라이트의 친일 역사관을 적극 옹호해온 전력도 빼놓을 수 없다.

방통위의 갑작스런 이인호 KBS 이사 추천이 결정된 지난 1일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 소속 새정치연합 의원들은 “박근혜 정부는 일제 강점기 대표적인 친일파 이명세의 손녀인 이인호 서울대 명예교수를 KBS이사장에 내정한 것을 취소하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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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호 교수는 조부의 친일 행각 외에도 <한국사> 친일 교과서를 발행하는 교학사 교과서 집필진의 고문으로 활약해온 뉴라이트 원로다. 그는 이명박 정권 초기 광복절을 건국일로 제정하기 위해 만든 ‘건국60주년기념사업 준비위원회’ 공동준비위원장을 역임했다. 백범 김구를 “대한민국 체제에 반대한 사람”이라고 비난하며 백범의 초상을 화폐에 새기는 데 반대했다. 지난 3월 13일 국가 원로급 인사로 초대된 청와대 오찬 자리에서는 민족연구소가 제작한 다큐멘터리 <백년전쟁>에 대해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 때 일을 많이 왜곡해서 다루고 있다”면서 “이런 역사 왜곡도 국가안보 차원에서 주의 깊게 봐야 할 것 같다”고 박 대통령에게 조언했다. 이 때 박 대통령은 그의 발언을 수첩에 적었다고 한다.

문창극 전 총리 후보의 교회 발언이 지탄을 받을 때는 종편 TV조선에 출연해 “비기독교인이 보면 오해할 소지가 약간 있다. 하지만 강연 전체를 놓고 봤을 때 문 후보자를 반민족주의자라고 하는 사람들은 제정신이 아닌 사람들”이라고 강력히 비난했다.  

이 교수는 일주인 전 뚜렷한 이유 없이 사임한 이길영 전 KBS이사장의 빈 자리를 메울 새 이사 후보로 추천됐다. 이때부터 그의 이사장 내정설이 KBS 안팎에서 흘러나왔다. 그런데 지난달 28일 최성준 방통위원장은  갑자기 이 사실을 위원들에게 통보하고 사흘 뒤인 지난 1일 회의를 소집, 새 이사 선임을 결정하게 했다. KBS 이사장이 중요한 자리임에도 주말에 통보하고 관련 인사 자료와 검토할 시간도 주지 않은 채 사흘 만에 결정하게 한 것이다.  

야당 추천 김재홍, 고삼석 위원이 자료 검증을 위해 최소한 1주일의 시간은 필요하다고 주장했으나 3명의 여당 추천 이사들은 야당 추천 이사들이 불참한 가운데 이 교수의 KBS이사 추천을 강행했다. 3대2라는 수적 우세로 이인호 교수의 KBS이사 추천을 밀어붙인 것이다.

왜 이인호 교수를 KBS 이사에 추천했을까. 그것은 박근혜 대통령이 아버지 박정희를 높이 평가하고 친일 역사관을 가진 이인호 교수를 수첩에 적어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일각에서는 박 정권 비호에 미온적인 현 조대현 사장 체제를 견제하기 위한 시나리오로 해석하기도 한다. 방송을 장악하기 위한 그림이라는 것이다. 정국이 불안할수록 언론을 강하게 통제하는 것은 독재정권의 상투적인 수법이다. 사실상 청와대 하수인 역할을 했던 길환영 전 사장이 물러난 후 “기레기” 탈을 벗고 신뢰회복을 위해  애쓰고 있는 KBS 구성원들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위험에 처하게 됐다.

   
▲ 장행훈 언론광장 공동대표
 

박근혜 대통령은 국정원과 함께 텔레비전을 정권 유지의 양대 무기로 사용하고 있다. 철저히 언론을 독재의 도구로 이용한 유신철학의 실천자인 셈이다. 이인호 교수가 만약 KBS이사장에 취임한다면 문창극 보도로 기자협회 상을 받은 KBS 기자들과 이 보도를 강하게 비난한 새 이사장과의 충돌이 불가피해질 것이다. KBS의 앞날에 짙은 전운이 감돌 것 같다. 국민이 언론자유 투쟁에 투신해야할 때가 다가오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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