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음악평론이 해야 할 역할은 어떤 것일까? 작품으로서의 텍스트와 현상으로서의 텍스트에 담겨진 의미를 분석하고 가치를 부여하는 일 아닐까? 그리고 그 가운데 옹호해야 하는 가치와 비판해야 할 가치를 섬세하고 명확하게 나누는 일 아닐까? 대중음악평론이 옹호해야 할 가치는 무엇보다 아름다움일 것이다. 직관적이든 주관적이든 훈련된 감수성과 안목으로 발견한 작품 속 아름다움의 배후와 세부와 전체를 총체적으로 조망하고 재구성해서 해설하는 일, 그리고 그 아름다움이 작품의 주제의식과 어떻게 맞닿아 있는지를 밝혀내고 통일체로서의 작품이 현실 속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 밝혀내는 것이 평론의 기본적인 요건일 것이다.

같은 틀거리로 단편선과 선원들의 첫 번째 작품집 <동물>을 들여다본다. 단편선과 선원들은 솔로로 활동하던 회기동 단편선이 결성한 밴드이다. 현재 바이올린 권지영, 베이스 최우영, 퍼커션 장도혁과 단편선으로 구성되어 있는 단편선과 선원들은 사이키델릭 포크 록을 지향하고 있다. 이번 첫 음반에 수록된 9곡의 노래 가운데 ‘백년’, ‘노란방’, ‘공’, ‘동행’, ‘소독차’, ‘언덕’ 등의 상당수 곡은 기발표된 단편선의 정규 음반 2장을 통해 이미 발표되었던 곡이다. 또한 ‘황무지’의 경우는 그가 군 입대 전에 사적으로 발표한 비정규음반 <스무 살 도시의 밤>에 포함된 곡이기도 하다. 단편선은 이미 발표한 두 장의 정규음반을 통해 사이키델릭 포크 록에 한정되지 않는 다양한 장르를 혼종시키며 호평을 받은 바 있다. 노이즈, 사이키델릭, 슈게이징, 익스페리멘탈, 포스트록 등을 아우르는 그의 전작들은 밴드 편성의 록킹한 비어쿠스틱 음악이었다. 일렉트릭 기타와 일렉트로닉 사운드 메이킹의 효과가 도드라지는 음악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 음반에서 단편선은 바이올린, 베이스, 퍼커션만을 동반하고 흔히 포크 음악이라고 통칭되는 어쿠스틱 사운드에 천착하고 있다. 전작의 일렉트릭 기타와 일렉트로닉 사운드 메이킹은 더 이상 없다. 그래서 자칫하면 강렬함도 없고 전작의 아방가르드한 측면도 사라진 음악이 되어버릴지도 몰랐을 음악을 단편선은 어쿠스틱 악기 편성만으로 사이키델릭하고 프로그레시브하게 만들어냈다.

   
▲ 밴드 ‘단편선과 선원들’
 

발음이 부정확하지만 괴기스럽고 주술적인 자신의 보컬에 공간감을 충분히 주는 방식으로 만들어낸 보컬의 질감부터가 사이키델릭한 질감을 선도한다. 여느 어쿠스틱 음악의 보컬처럼 간명하거나 낭만적이지 않은 단편선의 보컬은 굵고 걸걸하고 흐릿한 톤으로 노래 속의 모호하고 환상적인 질감을 가장 먼저 뽑아내는 악기로서 기능한다. 심지어 단편선의 보컬은 ‘동행’ 같은 담백한 곡에서마저 예의 보컬 톤을 유지함으로써 대개의 포크 곡에서 깃들 수 없는 독특한 아우라를 뽑아내고 있다. 이 지점에서 듣는 이의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심하게 갈릴 것임은 분명하지만 자신만의 개성이 명확하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여기에 사이키델릭한 결을 더욱 미묘하게 확장하는 것이 바로 권지영의 바이올린이다. 단편선과 선원들에서 일렉트릭 기타를 대체하는 듯한 권지영의 바이올린은 바이올린 활로 긁어서 내는 섬약하고 유려하며 때로 신경질적인 사운드를 통해 음악의 예민한 정서를 가장 민감하게 만들어나간다.

가령 ‘노란방’에서 수시로 뒤바뀌는 바이올린의 연주는 일렉트릭 기타만큼 강력한 사운드를 만들어내지는 못하지만 그보다 더 화려하고 예리한 연주들을 수시로 접합시킴으로써 음악의 사이키델릭한 결을 신경이 거슬릴 정도까지 밀어붙이고 있다. 권지영의 바이올린 연주가 돋보이는 지점은 앨범에서 숱하게 발견된다. ‘언덕’에서도 단편선의 보컬이 주선율을 고집스럽고 절박하게 밀어붙일 때 권지영의 바이올린은 그의 숨소리 같은 소리의 파장을 숨가쁘게 더함으로써 음악의 결을 화려하고 변화무쌍하게 만들어내고 있다.

그럼으로써 단편선이 왜 자신의 전작과 다른 어쿠스틱 편성의 밴드를 결성했는지를 해명하고 있다. 단편선은 자기 음악의 사이키델릭한 미학을 어쿠스틱 사운드로 새롭게 직조해보고 싶었던 것은 아닐는지. 기존의 일렉트릭 기타와 사운드 메이킹으로 만들어내는 사이키델릭과는 다른 결을 만들고 싶었던 의도는 권지영과 장도혁, 최우영이라는 멤버의 밴드로 확장되면서 차별적인 사이키델릭 음악이라는 성과에 이르고 있다.

그런 의도를 성공으로 이끄는 것은 권지영의 바이올린만이 아니다. 장도혁이 맡은 퍼커션과 최우영이 맡은 베이스 역시 기존의 드럼과 베이스로 대체할 수 없는 원시적인 비트의 울림을 더함으로써 단편선과 선원들의 음악이 국적을 알 수 없는 민속음악처럼 들리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노란방’과 ‘공’의 인트로를 이끄는 퍼커션의 연주 같은 것이 대표적이다. 덕분에 단편선과 선원들의 음악은 종종 한국의 시나위라든가 아프리카, 남미 등의 민속 음악을 연상시키는 혼곤한 원시적 정서에 이르고 있다.

   
▲ 밴드 ‘단편선과 선원들’
 

또한 드라마틱하게 구성한 곡의 편곡 역시 음악의 사운드 스케이프와 서사를 확장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노란방’과 ‘공’, ‘순’, ‘언덕’, ‘황무지’ 등에서 보여주는 사운드의 극적인 서사는 명확하지 않고 모호한 노랫말의 서사를 사운드로 재구성해서 해명하는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가사 속의 모호함과 다양한 메시지를 청각적으로 최대한 확장해내고 있다. 그럼으로써 문자 언어의 청각적 재현이라는 음악의 매력과 특성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렇다고 단편선과 선원들의 음악이 온통 사이키델릭한 것만은 아니다. 전작에서도 그랬지만 단편선은 ‘동행’과 ‘소독차’ 등에서는 매우 수줍고 조심스러우며 처연한 정서를 보여주고 있으며 재수록한 ‘황무지’는 매우 서정적이며 풋풋한 정서에까지 이르고 있다. ‘우리는’의 경우는 보편적인 정서와도 크게 다르지 않음을 발견할 수 있다.

좋은 음악은 하나의 정서와 주제의식에 분명하게 이르면서도 그 과정에서 좋은 세부의 연주와 사운드를 통해 부분으로 전체를 만들어가고 부분으로 전체를 증명하는 음악이다. 한 점의 조각, 순간의 사운드에 이미 전체가 다 들어있다. 그리하여 순간만으로도 전체는 충분히 감지된다. 이 음반의 아름다운 순간과 전체에 대해서는 이미 충분히 설명했다고 믿는다. 또한 좋은 음악은 자신의 음악적 스펙트럼이 결코 단일하지 않으며 독창성과 보편성을 아우른다는 것을 보여주는 음악이다. 이 역시 마찬가지이다. 앨범의 제목은 <동물>이지만 우리가 흔히 동물에게 연상하는 비이성적이고 본능적인 에너지를 마구 내던진 음악이기보다는 자유로우면서도 노랫말과 주제의식의 틀 안에서 최대한의 에너지를 뽑아내는 음반은 의외로 단정하다. 이것이 벌써 세 번째 정규 음반에 이르는 단편선의 노련함이 아니라고는, 밴드의 성원들이 함께 만들어낸 충돌과 조화의 은근한 결과물이 아니라고는 말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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