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명량>이 사상 최다 흥행 기록을 경신하며 ‘1700만 관객’(8월29일까지 1666만 명)을 눈앞에 두고 있다. 이 같은 인기몰이 덕분에 상영 한 달 만에 10년 전 대하드라마 KBS <불멸의 이순신>까지 ‘앙코르’ 방송하는 등 <명량>과 이순신은 여세를 몰아가고 있다.

그러나 영화의 인기몰이만큼 영화 속 사실관계가 역사적 사실과 얼마나 부합하는지에 대해서도 논란이 되고 있다. 단 12척(13척)의 함대로 어떻게 330여 척(133척-난중일기)의 왜군 함대를 격퇴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상세한 기록은 그다지 많지 않기 때문이다. 당시 결정적인 승인이었던 울돌목(명량)이라는 지형을 어떻게 활용했는지를 두고 영화 <명량>과 KBS 대하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은 치명적인 차이를 보이고 있기도 하다. KBS는 1일부터 매주 월~목까지 밤 11시40분부터 <앙코르 불멸의 이순신>을 33부작으로 압축해 방송한다고 밝혔다.

1. ‘구선(龜船·귀선·거북선)’은 명량해전 출항 전 불탔는가

영화 <명량>의 역사적 허구 또는 의문을 낳는 주요 장면은 10곳 가까이 된다. 영화 초반에 등장하는 ‘구선(龜船·귀선·거북선)’이 건조됐으나 명량해전 출정을 앞두고 불타는 장면은 대표적인 허구에 해당한다. 귀선은 왜군이 재침한 정유년(1597년) 7월(음력) 원균이 이끄는 수군이 칠천량에서 전멸할 때 모두 불타 없어졌다. 경상우수사 배설이 ‘도주’(또는 후퇴)하면서 보존해놓은 12척의 전선도 모두 판옥선이었다. 명량해전에서 귀선이 활약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영화 <명량>의 스틸컷. 사진=<명량> 홈페이지
 

2. 배설이 이순신을 암살하려다 안위의 화살에 맞고 죽었나

영화 <명량>에는 귀선을 불타게 한 장본인이 배설이었으며 이순신을 암살하려다 실패해 배를 타고 도주하던 중 거제현령 안위가 쏜 화살에 맞고 절명한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이 같은 내용은 역사적 허구를 넘어 역사적 왜곡에 가깝다는 목소리도 있다. 배설은 1597년이 아닌 전란이 끝난 이듬해인 1599년에 사망했다. 명량해전 출정 직전에 도주한 배설은 2년 뒤 도원수 권율에 잡혀 참형을 당했다.

역사의 기록에는 배설이 겁이 많고 틈만 나면 도망하려는 성품으로 나타나 있으나 실제 칠천량에서 왜군의 기습을 당하기 직전 12척의 배를 빼돌려 숨겨두지 않았다면 명량해협의 형세를 이용하기는커녕 전투 자체를 치를 수 없었다. 배설을 이렇게 묘사한 것은 이순신의 통제영 내부에서 전투직전의 긴장도를 높이기 위한 감독 나름의 목적이 있었을지 모르나, 없는 사실까지 꾸며낸 것은 ‘역사물’의 무게감을 스스로 떨어뜨린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3. 구루시마 미치후사(마타시·馬多時)의 호위무사는 존재했는가

<명량>에서 이순신 배역을 맡은 최민식과 함께 ‘카리스마’를 보이는 이가 구루시마 미치후사(류승용)이다. 특히 구루시마의 옆에 호위무사로 따라다니던 이가 영화의 긴장감을 높이는 소재로 활용됐다. 하지만 이 인물 역시 역사의 기록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영화적 상상력일 뿐이다.

4. 미치후사의 호위무사가 화살에 눈을 맞고 죽었나

더구나 구루시마 미치후사의 호위무사는 대장선의 깃발 위에 올라 저격을 하던 중 날아온 화살에 눈을 맞고 쓰러지는 장면이 나온다. 이 역시 허구일 가능성이 높다.

5. 대장선 혼자 수십척을 격침시켰나

영화 <명량>의 주요 전투신(scene) 을 보면 전투 초반에 이순신의 대장선이 홀로 고군분투하면서 최소 10여 척의 왜선을 분멸한 것으로 묘사돼 있다. 제작진이 이렇게 구체적으로 당시 상황을 재현한 것은 이순신이 전투를 마치고 쓴 <난중일기>에 나와 있는 대목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 같다. 이순신은 <난중일기>(丁酉日記) 1597년 9월 16일(음력)의 기록에서 당시 전투 형세를 이렇게 묘사했다.

“…여러 배에 명령하여 닻을 올리고 바다로 나가니, 적선 백서른세 척이 우리의 여러 배를 에워쌌다. 대장선이 홀로 적진 속으로 들어가 포탄과 화살을 비바람같이 쏘아대건만 여러 배들은 관망만 하고 진군하지 않아 사태가 장차 헤아릴 수 없게 되었다. 여러 장수들이 적은 군사로써 많은 적을 맞아 싸우는 형세임을 알고 돌아서 피할 궁리만 했다. (전라)우수사 김억추가 탄 배는 물러나 아득히 먼 곳에 있었다. 나는 노를 바삐 저어 앞으로 돌진하여 지자총통·현자총통 등 각종 총통을 어지러이 쏘아대니, 마치 나가는 게 바람같기도 하고 우레같기도 하였다. 군관들이 배 위에 빽빽히 서서 빗발치듯이 쏘아대니, 적의 무리가 감히 대들지 못하고 나왔다 물러갔다 하곤 했다. 그러나 적에게 몇 겹으로 둘러 싸여 앞으로 어찌 될지 한 가진들 알 수가 없었다…여러 장수들을 돌아보니, 물러나 먼 바다에 있었다…호각을 불어서 중군에게 명령하는 깃발을 내리고 또 초요기(招搖旗: 대장이 부하 장수를 황급히 부를 때 올리던 깃발)를 돛대에 올리니, 중군장미조항첨사 김응함의 배가 차차로 내 배에 가까이 오고, 거제현령 안위의 배가 먼저 왔다.”

   
영화 <명량>의 스틸컷. 사진=<명량> 홈페이지
 

이순신이 기록한 당시 전투의 초기 상황의 요지는 ‘대장선이 화포공격을 감행해 적이 감히 대들지 못하다 결국 적선에 겹겹이 둘러싸여 위기에 빠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초요기로 아군을 부르니 거제현령 안위와 중군장 겸 미조항첨사 김응함의 배가 가까이 오게 됐다는 것이지 이순신 대장선 혼자 수십척을 무찔렀다는 것은 아니다. 

6. 백병전이 치열했는가

또한 <명량>에선 이순신의 대장선이 오랫동안 선상에서 백병전을 치른 것으로 상세히 묘사했다. 영화 속에서 가장 치열했던 전투 장면이며, 이순신과 휘하 장수 및 병졸의 심리까지 그려낸 장면이지기도 하다. 하지만 기록에 근거하고 있진 않다. 김한민 감독은 여러 언론과 인터뷰에서 이 장면을 넣은 것에 대해 “주제의식을 표현하는 데 꼭 필요했다”며 “이순신 장군이 처절하게 싸우는 모습, 자기헌신을 하면서 극적으로 위기탈출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필요했기 때문에 넣은 장면”이라고 밝혔다. 영화 속 이순신 배위의 백병전은 KBS <불멸의 이순신> 명량대첩 편에서도 나온다.

실제로 이순신의 <난중일기>에서 명량해전 중 백병전으로 추정할 수 있는 전투는 거제현령 안위의 배에서 벌어졌다. 

“적장이 그 휘하의 배 두 척을 지휘하여 한꺼번에 개미 붙듯이 안위의 배로 매달려 서로 먼저 올라가려고 다투었다. 안위와 그 배에 탔던 사람들이 죽을힘을 다하여 몽둥이로 치기도 하고, 긴 창으로 찌르기도 하고, 무수히 어지러이 싸우니 배위의 사람들은 기진맥진한 데다 안위의 격군 일곱여덟 명이 물에 뛰어들어 헤엄치는 것을 거의 구하지 못할 것 같았다. 나는 배를 돌려 곧장 쳐들어가 빗발치듯 어지러이 쏘아, 적선 세 척이 얼추 엎어지고 자빠지는데 녹도만호 송여종·평산포대장 정응두의 배가 줄이어 와서 합력하여 적을 쏘아 한 놈도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7. 이순신이 구루시마의 목을 베었나

대장선 위의 백병전은 명백히 기록에는 나타나 있지 않다. 하지만 안위 배위의 전투 기록을 감안할 때 ‘선두에 있던 대장선에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개연성을 토대로 한 영화적 상상력의 산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명량>에서 이순신의 배 위에 올라탄 적장 구루시마의 목을 이순신이 베는 장면은 완벽한 거짓이다. 이 같은 장면 역시 영화 <명량> 뿐 아니라 KBS <불멸의 이순신>에도 등장한다. 대장과 적장의 대결은 소설의 단골 ‘메뉴’이다.

이순신은 <정유일기>에서 “항복해온 왜놈 준사란 놈이 내 배위에서 내려다 보며, ‘저 무늬 있는 붉은 비단옷을 입은 놈이 적장 마다시(馬多時)다’라 했다. 나는 김돌손으로 하여금 갈고리를 던져 끌어 올렸다…곧 명령하여 토막으로 자르게 하니, 적의 기운이 크게 꺾여 버렸다”고 썼다.

전투 중 이미 전사해 바다 위에 떠다니는 적장을 이순신이 끌어올려 토막내도록 지시했다는 것이니 영화 <명량>에서 이순신이 적장 구루시마의 목을 베는 장면은 허구인 것이다.

8~9. 이순신의 배가 적선과 충돌할 뻔했나, 이순신 배가 침몰할 뻔했나

이밖에도 <명량>에는 △전투 중 적선이 창 끝에 폭발물을 달고 이순신의 대장선을 향해 돌진하는 장면 △이를 산 위에서 지켜보던 임준영의 처가 치마를 벗어 경고하는 장면 △이 순간 갑자기 솟아오른 물줄기로 위기를 넘기는 장면 △이순신의 대장선 우현이 파손돼 침몰해가는 상황을 연출한 장면 △민간인 피란선들이 쓰러져가는 대장선을 갈고리로 걸어 구조한 장면 등은 모두 아무런 역사적 기록의 근거를 두고 있지 않다. 한마디로 감독의 ‘섬세한’ 상상력이다.

   
영화 <명량>의 스틸컷. 사진=<명량> 홈페이지
 

10. 철쇄는 왜 등장하지 않았는가

영화 <명량>은 명량해전의 빛나는 승첩의 숨겨진 또 다른 결정적 요인 한두가지를 뺐다. 철쇄(鐵鎖)를 해안과 마주보는 섬에 걸어 대부분의 왜선을 꼼짝못하게 했다는 이른바 ‘철쇄설’이다. 명량의 해협 가운데 가장 좁은 물목은 현재 진도대교가 설치된 곳으로 그 폭이 280~300미터 밖에 되지 않는다. 이 곳에 이순신이 철쇄를 걸어두고 물살이 바뀔 때까지 기다렸다가 철쇄를 풀어 일거에 100여 척 가량을 수장시켰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KBS <불멸의 이순신>에서도 명량해전 승첩의 결정적 요인으로 ‘철쇄’가 등장한다. 그 근거는 전라우수사 김억추가 작성했다는 ‘현무공실기’에 나타난 구절이다. 1999년 11월 방송된 당시 KBS <역사스페셜>에 따르면, 김억추의 후손들이 1914년 펴낸 ‘현무공실기’에 김억추 본인이 생전에 작성했다는 ‘철쇄’ 관련 기록이 있다. “철쇄, 즉 쇠사슬과 철구로 적선을 깨뜨렸다(鐵鎖鐵鉤破披 賊船)”. 

이와 관련해 당시 명량대첩유적사업회의 홍순덕씨는 “진도하고 해남하고 쇠사슬 쇠줄로 바다밑으로 해서 왜선이 오면 당기는 것을 격파했다는 말을 어려서부터 들었다”고 증언했고, 당시 정금식 우수영 명량대첩기념관 소장은 “쇠고리가 연육교 설치했을 당시부터 있었으니까 한 1984년전까지 있었다”고 KBS <역사스페셜> 제작진과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1999년 11월 방송된 KBS <역사스페셜> '명량대첩의 비밀 - 13척이 어떻게 333척을 이겼나' 편. 방송화면 캡처
 
   
1999년 11월 방송된 KBS <역사스페셜> '명량대첩의 비밀 - 13척이 어떻게 333척을 이겼나' 편. 방송화면 캡처
 

또한 조선후기 실학자 이중환(1690~1752)이 1751년에 저술한 ‘택리지(擇里志)’에도 이 같은 대목이 나온다. 

하지만 영화 <명량>에서 이런 내용을 일절 포함시키지 않은 것은 최근 역사학계에서 ‘철쇄설’을 가설 수준으로 보고 있는 것과 무관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순신 연구가인 박종평 등에 따르면, 기록의 신뢰성으로 볼 때 김억추가 당대에 직접 쓴 기록이 아니라 후손이 작성한 것이며, 택리지를 쓴 이중환은 전라도를 가본 적이 없다고 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순신이 작성한 <난중일기>와 이순신의 정치적 우군이었던 유성룡의 ‘징비록’, 조선왕조실록에도 철쇄를 걸어뒀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물리적으로도 당시 선조로부터 ‘삼도수군통제사’에 다시 임명된 이순신이 전남 보성에 내려간 때가 1597년 8월이었으며, 명량에서 전투가 벌어진 날이 9월 16일이니 고작 두 달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패잔병과 신병들을 데리고 철쇄 작업을 어떻게 했겠느냐는 의문도 제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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