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쾅! 우르르......”

열다섯 살의 봄날. 등교를 위해 교복을 갈아입고 있던 나는 뭔지 알 수 없는 큰 소리에 너무 놀라 자리에 주저앉았다. 소리가 울린 지 한참이 지나도 잔음을 내며 떨리고 있던 유리문. 태어나서 처음 들어 본 소리라며 불안해하는 엄마. 심상치 않은 예감이 들었다.

황급히 뛰어간 학교에서도 문제의 그 소리로 인해 시끄러웠다. 어떤 친구 집은 유리창이 깨졌다고도 했다. 그리고 전교를 울리는 교내방송, TV를 켜서 보라고 했다. 눈에 익은 어떤 곳의 바닥이 주저앉아 있었고, 버스와 자동차들이 뒤엉켜 있었다. 그리고 믿을 수 없었던 뉴스의 자막, 대구 상인동 가스폭발 사고.

그렇다. 1995년 4월 28일 오전 7시 52분. 그 사고가 바로 우리 옆 동네였다. 사망자 101명, 부상자 202명의 대형 사고였다. 당시 사고가 났던 교차로 주변에는 무려 7개 중·고등학교가 바로 위치해 있었고, 내가 다니던 여중을 제외하고는 우리 동네 학생들은 모두 그 교차로를 지나야 했기 때문에 특히 학생들의 피해가 엄청났던 사고였다. 나는 그 사고 때문에 두 명의 초등학교 친구를 잃었다. 언제든지 전화하면 같이 놀 수 있었던 친구들을 다시 만날 수 없다는 걸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저 악몽이었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다음날, 친구들과 함께 사망자들의 합동 분향소였던 대구시민회관 소강당을 찾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계단을 오르지 못해 친구들이 양쪽에서 부축해주었고, 국화 한 송이도 이를 악물고 겨우 손에 쥘 정도 힘 밖에 없었다. 참 신기했던 건, 그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두 친구의 영정사진을 한 눈에 찾아냈다는 사실이었다. 5대 독자를 허무하게 잃은 어머님은 하염없이 울다 기절하셨고, 엄마 없이 홀로 외아들을 키우던 아버님은 안주 없이 소주만 계속 들이키고 계셨다. 시간이 흐르고, 그들은 소리 없이 우리 동네에서 떠났다. 무너졌던 건물들은 사라지고 다시 새 건물이 올라와 지금 그 곳은 번화한 신도시가 되었다.

기억한다. 그 때, 나는 어른들이 참 미웠다. 우리한테 요구하는 건 많으면서 정작 이럴 때 우리를 보호해주지 못하는 어른들이 미웠다. 왜. 그 친구들이 뭘 잘못했는데? 하고 싶은 것도 많고 마냥 착하기만 했던 친구들이 왜 이렇게 떠나야 했는데? 너무 원망스러워서 한동안 나는 무기력증과 의욕상실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시간이 흘러 지금도 매년 4월이 되면 다시 열다섯 살, 그 때의 나로 돌아간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살아있는 것 자체가 죄 같은 나날들이 또 돌아오는 것이다.

영화 상영이 코앞이라 촬영과 후반작업을 동시에 작업하고 있던 지난 4월, 뉴스로 세월호 사고를 접했다. 처음에는 오히려 담담하게 받아들이려 했던 것 같다. 나 역시 오래 전 비슷한 일을 겪었고, 호들갑 떠는 것보다는 정말 할 수 있는 일을 묵묵히 도와주는 게 유가족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상황은 점점 악화되었다. 진상을 규명해야 할 사람들은 책임을 서로 미루고 있고, 특히 일부 언론들은 쓸데없는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두 아이의 아버지인 편집 기사님은 편집을 하다가도 업데이트 되는 뉴스들을 보며 화를 참지 못했다. 나 역시 정말 어이가 없고 너무 화가 났다. 억울하게 떠나간 내 친구들을 위해서라도 책임감 있는 어른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떻게 도움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찰나에 마침 영화인들의 동조 단식이 시작되었다. 공교롭게도 내가 참여했던 11일차는 임시국회 마지막 날이어서 농성장 분위기가 들떠 있는 듯하면서도 긴장감이 가득했다. 하지만 저녁에 들려 온 합의 불발. 사회자도, 대책위 분들도 눈물을 참지 못했고, 다른 날에 비해 문화제는 짧게 끝났다. 문화제가 끝나고도 많은 분들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그 날 이후 나는 거의 매일 문화제에 참석하고 있다.

   
 
 

어느 날 밤, 문화제를 마치고 집에 가다가 멀리서 농성장을 바라보았다. 왼쪽에는 동아일보, 오른쪽에는 조선일보 건물이 있고 그 사이로 나지막이 농성장이 있었다. 지금의 현실 같아 보여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이 싸움은 결코 짧지 않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햇빛에 눈물이 마르니까 아이처럼 어제 운 건 비밀로 해줘

짐을 꾸리듯 마음을 안고 걸어야 해 어딘가로 모든 건 변해가

겁내지 말고 달려가 보는 거야

 - 이상은 노래 가사 중에서.

 

어제(29일) 광화문 농성장에서 열린 문화제에서 유가족 중 한 어머님이 말씀하셨다.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도와 준 고마운 분들을 생각하며 다른 곳에 가서 도움이 되어드리고 싶다고.

그렇다. 지금 대한민국은 아프다. 그 동안 곪아있던 것들이 소통하지 않는 정부로 인해 여기저기서 문제점들이 터지고 있다. 세월호 특별법 제정과 함께 진상규명이 되어 유가족들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지금도 아파하고 있는 곳들 - 강정, 밀양, 용산, 부조리한 노동현장 등으로 관심을 함께 나누어야 한다.

그 날이 언제 올 수 있을지 막막하지만 우리는 달려가야 한다.

우리 각자 잘 할 수 있는 방식으로. 그리고 겁내지 말고.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