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16일, TV에서 세월호를 봤던 날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늘 그렇듯 아침을 먹고…별스럽지 않은 날이었다. 그렇게 일상을 보내던 중 TV에서 속보로 세월호 모습을 보여줬고, 바로 뒤이어 전원구조라고 나왔다.

‘암, 그렇지,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하고 안심했었다.

하지만 오후에 들은 소식은 충격이었다. 300명이 넘는 탑승자들의 실종, 총력을 다해 구조하고 있다는 말, 그리고 TV 채널들은 승객들을 구조하는 영상을 반복적으로 보여줬던 것 같다. 그 당시엔 그걸 그대로 믿었다. 그것이 당연한 ‘상식’이니까.

전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방송이, 경찰이, 정부가 그렇다고 하니까.

하지만 넉 달이 지난 지금, 상식은 무너졌다. 언론이 전달했던 것과는 너무나 달랐던 구조현장. 철저히 규명하겠다고 특별히 기자회견을 해서 눈물까지 흘려 놓고 아무 말도 없는 대통령.

그 믿음이 나만의 상식이었나 싶을 정도로 비상식적인 일이 계속되었다.

그날 이후, ‘가만히 있지 않겠다’, ‘잊지 않겠다’고 핸드폰 뒤에 스티커도 붙이고 다녔지만, 실제로 일상에서 내가 했던 일은 고작 SNS에서 ‘좋아요’를 누르는 것뿐이었다. 아직 나는 어리고, 사회에 책임질 만큼 큰일을 한 사람은 아니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무거워지는 마음은 ‘일상이 바쁘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것이 최선이니까’라는 자기 합리화 뒤에 감추고 있었다.

그렇게 무심한 척 지내다가 모처럼 아는 선생님을 뵐 겸 무심코 갔던 광화문에서 단원고 학생들이 휴대폰에 담았던 마지막 영상을 보는 순간, 내 굼떴던 마음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눈물을 보인다는 것이 민망해 뒤돌아섰다. 그렇다고 도망가고 싶지는 않았다.

막상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는 상황이었기에 노란 리본을 만드는 자리에 끼어들었다. 서명하는 사람들, 관심 갖고 돌아보는 사람들에게 달아 줄 리본을 접고 붙이는 단순한 작업은 그런 목적이었으리라. 같이 슬퍼하고, 슬픔이 민망한 사람들끼리 감출 빌미도 주고.......

그날 이후, 소극적이었던 나 자신에게 용서를 구하듯 자연스럽게 날마다 광화문으로 발걸음이 향했다. 지금 고등학생인 동생이 생각나기도 하고, 유민 아버님의 점점 가늘어지는 팔의 무게가 절실하게 다가오기도 했다.

하루하루 유민 아버님의 앙상해지는 팔의 무게가 절실하게 느껴졌다. 나만 절실한 게 아니었다. 보는 사람이 없으면 아무도 관심 없겠지, 하던 자리가 점점 더 많은 사람들로 채워지고, 비가 오건, 해가 따갑건, 묵묵하게 날마다 서로를 격려하며 농성장을 지키는 영화인들을 보면서 많이 느낀 것 같다.

그러면서 나도 배우로 무대에 섰던 적도 있으니 영화인과 같은 자리에 있는 거라고 생각하며 영화인 단식농성장에 도우미를 하겠다고 나섰다. 그렇게 채우고 또 채우는, 말 없는 실천들이 이어지기는 했지만, 중간 중간 아무런 결과도 없는 것 같은 상황에 사실 지치기도 했다.

유민 아빠 김영오 님과 같이 굶고, 굶는 동안 노란 리본 만들고, 만들다 지치면 광화문 네거리에서 피켓 들고 알리고, 알리는 내용에 공감하는 분들로부터 서명 받고. 그런 모든 과정을 겪으면서 지금까지 리본 하나 더 만드는 마음으로 묵묵하게 지켜 나갈 수 있었던 것은, 사람이 사람을 부르는 그 동력이지 않았을까......

어느덧 20일차를 맞았다. 앞으로도 갈 길은 멀다.

8.15, 스물넷이 되던 날, 그만큼 어른이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어른이 된 책임이 얼만큼 늘어났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날 함께 리본을 만들고, 함께 피켓을 들고, 함께 광장에 섰고, 함께 거리를 행진했던 영화인들과 앞으로도 계속 함께 하고 싶다. 그 영화인들이 만드는 영화를 보고 싶다. 그들이 만들 영화에서 내 몫을 하고 싶다. 나는 젊고, 나는 배우이며, 나는 혼자가 아니라 함께 사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그리고, 영화는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 함께 하는 작업이다. 그 여럿 가운데 믿을 수 있는 영화인들을 지금, 스물 넷, 제대로 어른이 되어 가는 나는 광화문 광장에서 만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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