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유가족도 양보해야 하며 이들의 아픔을 이용해선 안된다’는 염수정 추기경의 발언에 대해 세월호 참사 진실규명을 촉구하며 단식기도 중인 천주교 사제들이 반발하고 나섰다. 이들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주문을 뒤엎는 폭력적인 요구”라며 염 추기경의 발언을 비판했다.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은 지난 25일부터 광화문광장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 노숙하며 사흘째 무기한 단식기도를 벌이고 있다.

27일 천주교 서울대교구 홍보국 관계자에 따르면, 염수정 추기경은 지난 26일 오후 열린 종교담당기자들과의 간담회에서 ‘세월호 문제의 해법’과 관련해 “아픔을 해결할 때 누가 그 아픔을 이용해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염 추기경은 “자신이 누구의 정의를 이뤄주기 위해 일한다는 생각에 빠지기 쉽다”며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한다면서도 자기가 그걸 이용할 수 있다, 정의를 이루는 건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염 추기경의 이 같은 ‘정의론’은 현재 노숙 단식기도 중인 정의구현사제단을 빗댄 말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용하는 이가 누구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염 추기경은 “그런 사람들이 있다 없다 그런 말이 아니라 그런 데 빠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이라며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것”이라고 답했다고 서울대교구 관계자는 전했다. 

염 추기경은 이와 함께 성직자의 역할과 관련해 “예수님도 난처한 질문을 많이 받았지만 정치적 얘기는 안 하시고 ‘하느님 것은 하느님에게,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라고 말씀하셨을 뿐”이라며 “(나는) 정치적 논리에는 빠져들지 않고 싶다”고 말했다고 서울대교구 관계자는 전했다. 

   
염수정 추기경(서울대교구장). 사진=천주교 서울대교구
 

무엇보다 염 추기경은 진실규명이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는 세월호 문제를 두고 “이 문제와 관련해 자꾸만 우리의 힘과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이런 때일수록 신뢰관계가 중요하다. 그리고 유가족들도 어느 정도 선에서는 양보해야 뜻이 합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서울대교구 관계자는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이 같은 내용을 확인해줬다. 이 관계자는 언론이 다소 자극적으로 보도하긴 했지만 염 추기경이 이 같은 말씀을 한 것은 사실이라고 밝혔다.

이를 두고 노숙 단식기도를 벌이고 있는 사제들은 교황이 다녀간 지가 얼마나 됐다고 교황의 뜻을 정면으로 뒤엎는 주장을 세월호 유가족에게 할 수 있느냐고 성토했다.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마산교구 대표인 하춘수 신부(진주 옥봉성당)는 27일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추기경이 유가족의 아픔에 동참하는 사람을 ‘유가족을 이용하는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인지 의문”이라며 “진상규명에 대해 두려워하고 은폐하려는 듯한 정부 여당이야말로 유가족의 처참한 아픔을 이용하는 사람들”이라고 반박했다. 하 신부는 “추기경 말은 위험한 발언일 수 있다. 누구보다도 정치적인 발언”이라고 비판했다.

노숙 단식기도회에 참여하고 있는 한 신부도 이날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아픔을 이용하는 세력이 누군지 구체적으로 지목하고 따끔하게 그런 말을 하는 것이 떳떳하다”면서 “그렇지 않으면, 세월호 유족들의 생각과 가치를 무시하고 또다른 갈등을 일으킬 소지가 많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예수님이 정치적 얘기를 안하고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라고 했다는 염 추기경의 주장에 대해 하춘수 신부는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이라는 것이 정치적 죽음이 아니었느냐”며 “로마제국에 의해 정치적 죽음을 당한 것인데, 성경구절의 깊은 뜻을 읽지 않은채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스르에게’라 한 것은 너무나 피상적인 해석”이라고 반박했다. 하 신부는 “인간과 신앙인 모두 하느님 창조물이듯이 카이사르 역시 하느님의 것”이라며 “그렇다면 ‘정치적 동물’인 인간에게서 어떻게 정치를 떼어놓고 얘기할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지난 25일 광화문광장에서 첫 단식기도회 미시를 집전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사제들. 사진=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하 신부는 “정치를 특정부류의 전유물인양 얘기하는 것도 옳지 않다”며 “‘정교분리의 원칙’이라 함은 ‘교회가 정치에 대해 발언해선 안된다’는 것이 아니라, ‘정치가 교회를 이용하지 말라’는 의미”라고 지적했다. 수많은 예언자들이 그런 목소리를 내왔고 예수 역시 그렇게 살아왔다는 것이다.

단식기도회에 참석하고 있는 한 신부도 “교회의 가르침은 가난한 이들을 위해 우선적으로 선택하고 배려하라는 것이며, 이를 제대로 못하고 바른 소리를 못한다면 교회의 역할을 제대로 못하는 것”이라며 “이런 교회의 가르침을 언급하면 될 것을 왜 이를 ‘정치적 논리’에 빗대느냐. 이런 주장이야말로 정치적”이라고 비판했다.

‘세월호 문제에 에너지 낭비를 하지 말고, 유가족도 양보해야 한다’는 염 추기경의 주장에 대해서도 질타가 쏟아졌다.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총무신부를 지낸 김인국 신부(충북 옥천성당)는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추기경을 비롯해 우리 모두 유가족의 마음을 100분의 1도 모른다”며 “유가족에게 양보하라고 말하기 전에 그 아픔을 너무 모르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하춘수 신부도 “추기경은 ‘유가족이 욕심을 부리거나 과도한 몫을 요구하고 있다’고 보는 것 같다”며 “과연 그러한가. 이들이 요구하는 것은 진실을 밝혀달라, 명예를 회복시켜 달라는 것으로, 이는 정의와 진실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하 신부는 “(염 추기경의 주장은) 이들에게 ‘진실을 양보하라’, ‘생명잃은 사람에게 더 양보하라’는 것과 같다”며 “어떻게 진실을 양보하고 거짓되게 살라느냐, 명예를 포기하고 살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단식기도에 참여하고 있는 신부도 “유족들에게 어떤 것도 치유되지 않았는데, 뭘 양보해야 한다는 것이냐”며 “이는 유족들을 너무나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신부는 “유족들이 지금 할 수 있는 것이 없는데도 이렇게 일방적으로 양보하라는 것이야말로 폭력이자 또다른 상처를 내는 일”이라고 비판했다.

염 추기경의 주장은 지난 4박5일간 방한한 교황의 메시지와도 부합하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하춘수 신부는 “교황 말씀과 염 추기경의 말은 정면으로 부딪힌다”며 “교황은 ‘인간의 고통 앞에 중립을 지킬 수 없다’며 세월호 유가족을 지지하고 격려했으나 유가족에 양보하라는 염 추기경의 말은 인간의 고통 앞에 ‘중립을 지키라’는 요구와 다름이 없다. 정치적 중립을 지키기 위해 인간적 고통을 외면하라는 의미이기도 하다”고 평가했다.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세월호 진상규명 무기한 단식기도회 첫날인 지난 25일 밤 광화문광장에서 노숙했던 사제들. 사진=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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