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흐 <마태수난곡> 중 ‘불쌍히 여기소서’ (Erbarme Dich) http://youtu.be/aPAiH9XhTHc

요한 세바스찬 바흐(1685~1750)는 무엇보다 ‘음악가의 아버지’다. 그는 두 번 결혼해서 20명의 자식을 낳았는데, 장남 빌헬름 프리데만과 차남 칼 필립 엠마누엘, 그리고 막내 요한 크리스찬은 뛰어난 음악가로 이름을 남겼다. 거대한 음악가문의 일원인 것을 자랑스레 여겨 집안의 음악족보를 만든 바흐는 자신이 ‘음악가의 아버지’라는 건 흔쾌히 인정했을 것이다. 그러나 ‘음악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얻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동갑내기 작곡가 헨델(1685~1759)이 유럽 음악계를 석권한 최고의 스타였던 반면, 바흐는 독일 이외의 지역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독일에서는 진보적인 작곡가 텔레만(1681~1767)의 활약과 명성이 훨씬 두드러졌다. 바흐는 궁정과 교회를 위한 음악을 만들며 조용히 살았다. 그는 북스테후데의 오르간 음악을 배웠고, 비발디의 협주곡 악보를 구해서 공부했다. 누군가 자기를 ‘음악의 아버지’라 부른다면 바흐는 이렇게 대답하지 않았을까? “에구, 별 말씀을… 제가 음악의 ‘아버지’면, 비발디는 음악의 ‘할아버지’게요?”

   
▲ 바흐가 ‘음악의 아버지’가 된 결과 상대적으로 소외된 동년배 작곡가들이 있다. 이들의 음악을 기억하고 즐겨야 ‘음악의 편식’을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왼쪽부터 바흐(1685~1750), 텔레만(1681~1767), 스카를라티(1685~1767), 헨델(1685~1759)
 

바흐는 세상을 떠난 뒤 음악애호가들의 기억에서 점차 사라졌다. 오히려 아들인 칼 필립 엠마누엘이나 요한 크리스찬이 18세기 고전음악에 더 큰 영향을 미친 걸로 평가됐다. 물론 모차르트, 베토벤, 쇼팽 등 몇몇 위대한 작곡가들이 바흐 음악의 가치를 알아보긴 했다.

모차르트는 빈 도서관장 반 슈비텐 남작에게서 바흐의 악보를 빌려서 공부했고, 바흐의 푸가를 현악사중주로 편곡했다. 베토벤의 책상 위에는 늘 바흐의 악보가 있었다. ‘바흐’(Bach)는 독일말로 ‘시냇물’이란 뜻인데, 베토벤은 “바흐는 시냇물이 아니라 거대한 바다”라고 말했다. 쇼팽은 늘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을 연습했고 제자들을 가르칠 때 교재로 사용했다. 그러나 바흐의 종교음악은 19세기 초에는 거의 잊혀진 상태였다.

바흐가 ‘음악의 아버지’로 추앙된 것은 펠릭스 멘델스존이 <마태수난곡>을 발굴해서 무대에 올린 뒤였다. 이 연주회는 음악사의 전설적인 사건이 됐다. 15살 생일 때 외할머니 벨라 잘로몬으로부터 <마태수난곡> 악보를 선물 받은 멘델스존은 20세 되던 1829년 3월 11일 드디어 이 곡을 부활시켰다. 이 대곡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연주회였다. 입장권은 순식간에 매진됐고, 연주회장 앞에서 발길 돌린 사람이 천명을 넘었다고 한다. 멘델스존은 지휘봉을 들고 침착하게 음악을 이끌었다.

알토 파트를 맡아 노래한 누나 파니 멘델스존의 증언이다. “음악은 연주회장보다 교회에 어울릴 법한 침묵 속에서 울려 퍼졌다.” 평론가 루드비히 렐슈타프의 말이다. “영원히 위대하고 무한히 기적적인, 강력하고 고귀한 작품이다. 이토록 완벽한 공연은 거의 들은 적이 없다. 멘델스존은 헌신과 특출한 재능으로 비범한 일을 해냈다.” 이 연주회를 계기로 바흐는 독일 뿐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 부활했고, 어느새 ‘음악의 아버지’ 자리로 올라가게 된 것이다. 이 칭호는 누구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정설이 됐다.  

   
▲ 멘델스존이 바흐 <마태수난곡>을 되살린 것은 음악사의 기념비적 사건으로 꼽힌다. 그러나 바흐를 ‘음악의 아버지’로 떠받든 것은 신흥 개신교 세력의 음모라는 시각도 있다.
 

음악평론가 강헌은 최근 강연에서 “바흐를 ‘음악의 아버지’로 부른 것은 유럽 개신교 세력의 엄청난 음모였다”고 질타했다. 산업혁명 이후 부를 거머쥔 신흥 부르주아 세력이 자신의 문화를 대변할 아이콘을 찾다가 독실한 개신교도 바흐를 발견하고 떠받들게 됐다는 것이다. 하긴, 연주 시간 3시간에 이르는 <마태 수난곡>을 처음부터 끝까지 듣는 건 기독교도가 아니라면 무척 인내를 필요로 하는 일일 것이다.

멘델스존은 유태인 명문가 출신이었다. 멘델스존은 7살 때인 1816년 기독교로 개종한 뒤 평생 루터교 신앙 속에서 살았다. 하이네의 말에 따르면 유태인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은 “유럽 문화로 들어가는 입장권”이었다. 멘델스존이 바흐 <마태 수난곡>을 발굴, 지휘한 것은 유럽 상류사회로 들어가기 위한 통과의례의 성격이 짙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바흐의 종교음악을 부활시켜서 음악사의 큰 공백을 메운 멘델스존의 노력을 깎아내릴 필요는 없다. 바흐가 ‘음악의 아버지’가 된 게 특정 세력의 ‘조직적인 음모’라는 주장은 조금 지나친 것 같긴 하다.

그러나, 바흐가 음악의 ‘아버지’가 된 결과 남자인 헨델이 음악의 ‘어머니’란 별명을 갖게 된 것은 이상한 일이다. 가발 쓴 헨델의 초상을 보고 그가 여자인 줄 알았다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동갑내기 작곡가인 도메니코 스카를라티(1685~1767)가 상대적으로 평가절하 되는 현실도 아쉽다. 지금 들으면 스카를라티가 바흐보다 더 ‘근대적인 음악’으로 들린다. 바흐에 열중하다 보니, 동시대의 거장 텔레만의 음악에 투자할 시간이 줄어든 것도 안타깝다.

바로크 음악의 모든 시냇물이 바흐에게 흘러들어가 거대한 바다가 된 것은 사실이다. “만약 큰 재앙이 일어나 서양음악이 일시에 소멸된다 해도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만 남는다면 재건할 수 있다”는 어느 음악학자의 말은 과장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바흐를 ‘음악의 아버지’로 떠받들다 보니, 음악사 전체를 균형 있게 보기 어려워졌고 음악을 편식하는 부작용이 생겨난 게 아닌지 돌아볼 필요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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