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보수의 장자방’이라고 불리던 정치소비자협동조합 ‘울림’ 윤여준 이사장이 2011년도에 출간한 ‘대통령의 자격’이란 책을 최근에야 보았다. 구청에서 운영하는 한 작은 도서관의 열람실에서 이 책을 우연히 발견했을 때 책 보기를 돌 같이 하는 평소의 습속과는 달리 독서의 욕구가 마구 솟구쳤다. 책의 제목이 강렬하게 다가왔다. 지금 ‘대통령의 자격’을 정말 묻고 싶은 대통령의 모습을 보고 있기 때문일 터이다.

저자인 윤 이사장은 ‘대통령의 자격’을 ‘스테이트크레프트’란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영어사전에서 ‘스테이트크레프트’는 ‘국정·외교의 기술, 정치적 경륜, 정치적 수완’ 정도로 번역되지만, 윤여준은 '국가법인체의 행위자로 요구되는 각종 능력'으로 정리하면서 우리나라의 경우, 최고 정치지도자인 대통령의 자질과 능력이라고 부연 설명한다.

역사 발전이란 구조적 필연성보다는 인물의 선택이라는 역사의 우연성에 더 비중을 두는 보수주의적 관점이 깃든 개념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각 집단과 개인의 이해 관계와 기대 수준이 복잡해지고 다양해지는 현대 국가에서 최고 통치자의 리더십은 어느 시기보다 중요한 국가 흥망성쇠의 조건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 또한 들었다.

   
▲ 서울 동부병원에 입원 중인 유민아빠 김영오(47)씨. 사진=박준수
 

목숨을 건 단식을 진행하고 있는 세월호 유가족 ‘유민아빠’ 김영오 씨의 면담요구를 거부한 박근혜 대통령이 최근 세월호 사고 대응의 콘트롤타워는 청와대가 아니라는 발언으로 퇴진했던 김장수 전 청와대 안보실장과 세월호의 과적문제 등 국민안전에 필요한 정보수집활동엔 무능했던 남재준 전 국정원장 등 세월호 참사 정국으로 물러난 인사들을 청와대로 불러 위로했다고 한다. 박 대통령의 ‘스테이트크레프트’의 수준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소식들이라는 생각이다.

300명이 넘는 사망자를 낸 세월호 참사는 단순한 해상 사고가 아니라, 국민의 안전을 보장하는 국가의 기능과 역량 그리고 집행자인 공직자에 대해 광범위하고도 깊은 불신을 우리 사회에 각인한 일대 전환기적 역사적 사건이다. 사고가 난지 채 반년도 지나지 되지 않았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국가적인 평가와  과제수립은 제대로 시작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박대통령에게 세월호 참사는 벌써 마무리 단계로 접어들은 듯 하다.

박 대통령은 21일 대변인을 통해 김영오 씨가 요구하는 세월호 진상조사위원회에 수사권과 기소권을 부여하는 문제는 국회에서 결정할 일이라며 면담요청을 거부했다. 다음날인 22일 김영오씨는 병원으로 실려갔다. 김 씨는 자신의 아이를 잃은 부모다. 그 아이를 대통령이 대표로 있는 국가는 구해내지 못했다. 면담 요청한 날은 38일째 목숨을 건 단식농성 중이었다. 이런 그의 면담을 대통령이 국회로 공을 떠넘기며 거부한 것이다. 이역만리서 온 교황도 만났던 그다. 이 땅의 대통령이 만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국민들 눈에 대통령은 벼랑 끝에 놓인 국민을 벼랑 바깥으로 밀어내는 행위로 비친다. 아이는 울고 있는 데 씨끄럽다고 입을 틀어 막으려는 못된 계모·계부의 모습으로 비친다.

이런 마당에 박 대통령이 세월호 사건의 일처리를 잘못해 물러난 김장수 전 안보실장을 불러 위로했다는 소식이 들린 것이다. 세월호 사고 당일 7시간 동안 대통령의 행적에 대해 누구와 어디에 있었는지 명확하게 밝히지 못해 국민들 사이에서는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대통령에 관한 풍문을 담은 일본 극우언론의 보도가 사실처럼 굳어져 가는 와 중에 말이다.

박 대통령이 지금 보여주는 ‘스테이트크레프트’는 국민의 상처를 살피고 찢어진 마음을 모아내는 민주공화국 ‘대통령’의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하만 챙기고, 자신의 사생활의 비밀만 지키려는 고대 왕국 ‘여왕’의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21세기 현대 민주국가에서 어울리지 않는 박물관급 ‘스테이트크레프트’다.

이런 종류의 ‘스테이트크레프트’를 보여준 고대 왕국의 여왕이 진짜 있었다. 한반도에서 존재했던 왕국의 마지막 여왕이었던 신라 진성여왕이 그 주인공이다. 삼국통일의 기틀을 닦았던 선덕·진덕 등 전임 여왕들과 달리 진성여왕은 자신과 염문을 뿌린 각간 위홍이 죽자 그에게 대왕의 호칭을 내리는 등 자기사람 챙기기와 사생활 문제로 구설에 올랐다. 그런 여왕으로 인해 신라는 절단이 났다. 서쪽에서는 견훤이, 북쪽에서는 궁예가 반란을 일으켰다. 신라를 망하게 한 ‘스테이트크레프트’를 보여준 여왕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21일 오후 서울 관악구 수도방위사령부 내에 위치한 합동작전본부를 방문해 한미연합훈련인 을지프리덤가디언(UFG) 연습 현장을 순시하고 있다. 사진 = 청와대
 

한반도의 역사를 보자면, 그 진성여왕 다음으로 여성으로서 통치자 반열에 오른 첫 인물이 바로 박근혜 대통령이다. 그래서 박 대통령은  반드시 역사적 인물로 남을 것이 것이다. 선덕·진덕여왕들처럼 비교적 훌륭한 여성 지도자로 역사에 남길 바랄 것이다. ‘진성여왕’ 같은 평가를 받고 싶지 않을 것이다. ‘생살’같은 자식들 수많은 세월호 유족들이 지금 울부짖고 있다. 세월호 특별법 정국은 그들의 마음을 얻지 못하는 한 한치 앞을 나가지 못한다. 유족동의 없는 합의로 여야의 ‘스테이트크레프트’가 망가졌다. 박 대통령이 대통령의 자격을 회복해 ‘스테이트크레프트’를 발휘할 때다. 무조건 유민아빠 김영오 씨를 만나라. 대통령이 병원에 가라. 그 다음은 역사가 첫 여성대통령을 평가할 것이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