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은 성역이다. 진실은 타협의 영역이 아니라는 뜻이다.

타협은 진실의 은폐와 왜곡, 기만을 낳는다. 그래서 정의는 타협을 하는 법이 없다.

세월호 참사의 유가족들은 전체회의에서 여당과 야당의 세월호 특별법 합의안을 거부하기로 결정했다. 세월호의 진상규명을 위한 진상조사위원회의 수사권과 기소권을 요구한다는 입장도 재확인했다. 세월호의 진실과 정의를 위해 결코 타협하지 않겠다는 유가족들의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다.

여야가 재협의 끝에 마련한 세월호 특별법 합의안을 유가족들이 왜 거부했겠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을 기대하기 어렵고 세월호의 진실이 묻혀버릴 것 같다는 판단 때문 아니겠는가.

유가족들이 야당의 설득을 뿌리치고 오죽하면 특별법 재합의안마저 거부했을까. 정치권은 진실을 삼켜버리는 ‘싱크홀’인가.

세월호 특별법 재합의안의 핵심은 둘로 요약된다. 하나는 여당이 추천하는 특검추천위원회 두 명은 야당과 유가족들의 동의를 얻는다, 다른 하나는 특검추천위원회가 추천한 두 명의 후보 중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최종 선택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문제는 야당과 유가족들의 동의를 받은 위원들이라도 어떤 결정을 내릴 때 자기들을 추천해 준 여당 쪽 편을 들게 된다는 점이다. 설혹 야당과 유가족들이 지지하는 특검 후보가 살아남더라고 박 대통령의 최종 선택을 받을 수 있겠는가.

수백명의 아이들이 세월호에서 구조를 애타게 기다리다 죽어간 ‘의문의 7시간’ 동안의 박 대통령의 행적이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진상규명의 핵심 당사자가 박 대통령이라는 얘기다.

결국 여당 쪽 편에 선 특검이 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진상규명이 제대로 될 리가 없는 특별법 합의안을 유가족들이 어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진상규명을 외면한 정치권을 비판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여당인 새누리당은 민간기구인 진상조사위원회에 독자적인 수사권과 기소권을 부여하는 게 전례가 없는 일로 형사 사법체계의 근간을 흔드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여당의 주장은 옳지 않다.

   
▲ 세월호참사가족대책협의회가 12일 국회 본청 앞에서 양당의 7일 세월호특별법 합의안을 파기하라고 외치고 있다. 가자회견 중인 가족들 사이로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는 입간판이 보인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진상조사위원회는 특별법에 따라 구성되는 공적인 기구로 민간기구가 아니다. 또한 민간 인사로서 수사권과 기소권을 갖는 특별 검사 제도가 이미 있지 않은가. 진상조사위원회에 이런 특별 검사를 두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유가족들이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된 진상규명을 위해 진상조사위의 수사권과 기소권을 굳이 요구하게 된 데는 박근혜 정부와 여당이 책임을 져야한다. 현 정권의 검찰과 경찰, 군 사법기관 등 사법 시스템이 국가정보원과 군 사이버사령부의 ‘대선개입’에서 최근 군의 사건 사고 수사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공정하고 독립된 모습을 보였는가. 온갖 의혹과 문제점들을 남겨 국민들의 불신을 스스로 불러일으키지 않았는가.

국군 사이버사령부의 ‘대선개입’ 수사 결과 발표만 봐도 그렇다. 군은 조직적인 군의 대선개입이 없었고 대선개입 사실이 김관진 당시 국방부장관에게 보고되지 않았다고 주장하지만 말이 되는가.

상명하복과 보고를 생명처럼 여기는 군대의 조직체계에서 5만여 건에 이르는 정치관련 게시글들이 고작 3급 군무원의 개인적 일탈로 이루어졌다는 걸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김관진 장관이 일일 사이버동향과 심리전 대응작전 결과를 보고받은 사실이 드러났는데도 불구하고 장관에 대한 보고가 없었다는 수사 결과 발표를 국방부가 버젓이 내놓다니, 참으로 어이가 없다.

세월호 특별법을 둘러싼 정국 마비를 푸는 관건은 박 대통령과 여당 쪽의 결단이다. 집권세력이 힘이 없는 야당을 양보하도록 몰아붙여 세월호의 진상규명을 유야무야하려고 한 것 자체가 문제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야당이 양보하는 것 봤냐. 원래 양보는 집권당이 하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고 한다. 여당 일각에서도 “야당에 특검 추천권을 양보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나온다.

그럼에도 여당이 특검 추천권과 관련해 완강하게 경직된 태도를 보이는 것은 진상규명의 칼날을 피하려는 청와대의 기류와 관련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김무성 대표가 “특검 추천권을 야당에 주겠다”는 의지를 보이다가 “협상 전권은 원내 대표에게 있다”며 뒷전으로 물러난 것도 청와대를 의식한 때문 아니겠는가.

박 대통령은 5월 19일 담화에서 “필요하다면 특검을 해서 모든 진상을 낱낱이 밝혀내자”며 “여야와 민간이 참여하는 진상조사위원회를 포함한 특별법을 만들 것도 제안한다”고 밝힌 터다. 박 대통령이 공언한대로 수사·기소권이든 특검 추천권이든 권력의 간섭을 받지 않고 성역 없는 진상규명이 보장되는 세월호 특별법이 제정되도록 하면 될 일이다.

박 대통령과 여당은 왜 집권세력답게 당당하게 유가족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가. 유가족들의 여한이 없게 하겠다던 박 대통령의 약속은 빈말이었는가.

새정치민주연합은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은폐하거나 왜곡하려는 정부와 여당에 맞선 진실의 보루라는 막중한 역할을 수행했어야 한다. 소수당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타협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세월호 참사의 진실과 진상의 엄정한 규명의 마지노선을 결코 양보하지 말았어야 한다는 뜻이다.

유가족들이 오죽하면 새누리당과의 직접 대화를 요구하고 나서겠는가. 여당과의 담판에서 돌파구를 만들어내기는커녕 무기력하게 물러난 새정치민주연합에 대한 실망이 그만큼 크기 때문 아니겠는가.

새정치민주연합이 지난 번 협상에 이어 이 번 재협상에서도 유가족들의 동의도 받지 않고 여당의 요구에 합의해준 처사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더구나 새정치민주연합이 사전 협의는 생략한 채 유가족들에게 진실의 마지노선을 양보하라고 뒤늦게 설득하고 나서다니 새누리당의 파트너인가. 새정치연합의 정체성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세월호 참사는 물질만능주의와 물신을 우상으로 숭배하는 종교와 관피아 등 부패세력의 구조 속에서 소중한 인간의 생명들이 물건처럼 취급받아 죽음에 이르게 된 한국 사회의 단면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우리 사회가 세월호의 진상규명을 통해 인간 중심의 사회로 거듭나는 계기를 마련하지 못한다면, 우리 사회의 미래는 ‘죽음의 사회’밖에 더 있겠는가.

고교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위기 때 국가가 나를 지켜줄 거라 믿는다”는 응답자가 7.7%에 불과했다. 학생들은 언론과 정치권, 대통령 등 기존 제도와 기성 세대에 강한 불신을 나타냈다.

신뢰의 위기는 공동체의 위기다. 우리 사회가 붕괴의 단계에 이르렀는가.

세월호의 진상을 제대로 규명할 특별법 제정은 유가족들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결코 물러설 수 없는 마지노선이다. 세월호처럼 우리 사회와 국가의 ‘침몰’을 더 이상 방관해서야 되겠는가.

세월호 참사에서 죽음을 방관한 선원들과 가혹행위에 의한 죽음을 지켜보기만 한 병사들의 모습은 곧 우리 사회의 자화상일지 모른다. 이제 우리 모두 분노의 방관에서 저항의 행동으로 세월호의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에 떨쳐나서야 하지 않겠는가.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위한 유가족 김영오씨의 단식에 동조하여 함께 단식을 하는 인사들이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을 비롯해 영화, 연극인 등 문화계 인사들로 확산되고 있다.

인간의 가치를 외면하고 오로지 돈과 권력밖에 모르는 ‘악’의 세력에 맞서 포기할 수 없는 인간의 가치를 소리 높여 외쳐야 할 상황이 돼 버렸다. 세월호 참사의 슬픔에서 우리 모두 하나가 됐던 것처럼 세월호의 진실을 위한 외침에서 다시 하나가 되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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