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들의 말초적 호기심이나 이념적 진영의식을 자극하는 ‘풍선껌’ 같은 기사를 찾아다니는 데 신물 난 기자라면, 정말 ‘나도 이런 종류의 글을 쓰고 싶다’는 욕심이 들 것이다.

기자 자신의 존재와 그 존재에 기반한 이해관계와 무관한, 그러면서도 그 누구도 쉽게 문제의식을 갖지 못했던, 구조적이면서도 격렬한 현실의 문제를 담은 전 지구적 이슈에 대한 심도 깊으며 현장성 있는 탐사 또는 기획 보도 말이다.

최근 한국어로 번역 발간된 ‘새로운 식민주의 현장을 여행하다’란 부제가 붙은 땅뺏기(Land Grabbing)가 바로 그런 책이다. 제3세계 국가들의 권력층과 결탁한 초국적 기업 및 투기/금융자본이 어떻게 토지를 수탈해 이윤창출에 사용하고 있는지를 고발한 이 책의 저자는 이탈리아 일간지 ‘일마니페스토’의 국제부 기자인 스테파노 리베르티. 그는 이 책을 위해 3년의 시간을 들여 4개 대륙을 발품 팔아 돌아다니며 인터뷰하고 현장을 확인했다. 저자는 또한 취재 동선이나 인터뷰 과정에서 보이는 고급 취재원들의 미묘한 변화나 발언의 뉘앙스에 대해서도 적절히 묘사해, 메시지가 메마르게 전달되지 않도록 현장의 생동감을 잘 불어넣고 있다.

   
 
 

‘땅뺏기’의 내용 중에는 한국 독자들의 눈에 확 띄는 내용이 들어있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을 많다”며 호언장담하다 도산한 벌금체납 1위 재벌 회장님의 얼굴이 떠오르는 한국기업이 관련된 사건이다. 2008년 대우는 마다가스카르 정부와 비밀협약을 맺는다. 마다가스카르 정부는 자국 전체 농경지의 절반인 130만 헥타아르를 대우에게 무상으로 임대해준다. 대우는 그 땅에서 옥수수와 팜유를 생산키로 했다. 대신 대우는 무상 임대의 대가로 고용을 창출하고 사회기반시설을 건설해 준다. 이것이 계약의 주요 내용이다. 경제규모 세계 10위권에 들었다고 자랑하는 한국의 관점에서 적극 권장할 글로벌 한국 국적 기업의 ‘외화벌이’ 계약이지만 전체인구의 90%인 2000만명이 빈곤선 이하의 삶을 살고 있고 있는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의 국민에겐 생존 자체가 걸린 악마의 계약이었던 것이다. 마다가스카르는 만성적인 영양실조 비율이 49%에 달하고 세계식량계획(WFP)의 식량지원을 받는 국민만 해도 85만 명이 넘는 나라다.

이렇게 식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나라에서 농경지의 절반을 외국기업에 임대해, 자국 식량생산용이 아닌, 수출용 옥수수와 팜오일을 생산한다는 계약이 체결됐으니 사단이 난 것이다. 정부와 대우 사이의 이 엄청난 거래가 비밀로 유지됐으면 대우와 부패한 마다가스카르의 권력자들은 ‘돈방석’에 올랐겠지만 그들은 남들처럼 운(?)이 좋지 못했다. 서방의 언론에 의해 이 사실이 폭로됐고 분노한 시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반정부 시위로 170여명이 사망하는 비극이 초래됐으며 결국 당시 마다가스카르의 대통령이었던 라발로 마나나는 대통령직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게 됐다.

저자는 대우-마다가스카르 정부간 성사됐던 유형의 땅거래는 현재 아프리카, 남미 등지에서 광범위하게 벌어지고 있는 전형적인 ‘땅뺏기’현상의 하나라고 설명한다. 심지어 마다가스카르의 새 정권도 이 문제로 퇴진당한 전임 정권과 유사한 거래를 초국적 자본과 여전히 진행하고 있다.

이런 제 3세계 정부와 초국적 자본 간의 거래는 사모펀드에게 다리, 터널, 지하철 등 SOC 기반 시설을 건설해 주는 대신 해당 시설 운영에 대한 엄청난 영업 이익을 국민의 혈세로 보장해 줬던 한국 정부 관료들의 행태와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면 더 쉽게 이해될 것 같긴 하다.

아무튼, 비정부기구인 그래인의 추정에 따르면, 전세계적으로 2007년 이래 공공소유의 농경지 1000만헥타아르가 민간자본의 손에 넘어가고 있다. 이는 여의도 면적의 3만4500배에 달하는 규모이다.

저자는 이 같은 ‘땅뺏기’가 2007년~08년 전 세계적인 식량위기를 계기로 급격하게 확대됐다고 한다. 여기에다 유럽 미국 등 선진국의 탄소배출 감축계획에 따른 바이오연료 수요상승 등 에너지위기 도 주요 요인이 되고 있다고 진단한다. 이런 위기를 이용해, 초국적 기업과 투기·금융자본이 돈 벌기에 나섰고, 제3세계 정권들은 정권의 안보와 지배층의 이익을 위해 자기나라 땅을 헐값에 내놓고, 제 나라 국민들을 굶긴다는 것이다.

<땅 뺏기>는 분명 재미있는 책도 그래서 잘 팔릴만한 책도 아니지만, 씹었다가 버리는 ‘풍선껌’ 같은 기사보다 ‘인류’의 미래를 위해 메시지를 던지고 싶은 담대한 ‘기록자’가 되고싶은 언론인들에게 영감을 줄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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