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들과 실주름 움직임, 말 사이사이 숨소리까지 전해질만큼 작은 극장, 아무 장식도 없는 무대에 올라 스탠딩 코미디를 하는 나이든 만담가가 공연을 한다. 별 대수롭지 않은 무대에서 잘 모르겠는 늙수구레한 만담가가 자기처럼 TV에 나가지 못하는 사람은 유명해져서 돈을 많이 버는 대신,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다며 만담을 시작하자 영화 속 무대 바로 앞에 앉은 관객들, 그리고 영화 바깥 스크린을 보는 관객들까지 웃음을 터뜨린다.

가령, “TV에 나가면 이런 말을 할 수가 없지요.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났는데 아무도 책임이 어디에 있다고 하지를 않아요.” 사람들이 귀를 기울인다. “도쿄전력이 책임이 있다든가.”누구나 아는 얘기 아닌가, 생각하며 김이 샌다. “아니면 책임이 있는 건 도쿄전력이라든가.” 객석에서 ‘풉!’ 웃음이 나온다. 그 웃음이 잦아들기도 전에 만담이 이어진다. “사실은 진짜 책임져야할 건 도쿄전력이라든가.” 스크린 속 극장, 스크린 바깥 극장에서 동시에 관객들이 푸하하하 웃음을 터뜨린다. 재밌네, 생각하며.

이 공연이 펼쳐지는 곳은 일본 도쿄 도에 있는 특별구의 하나인 스미다 구, 영화가 시작하면서 도쿄 번화가를 지나 안내하는 이가 “원래 ‘중심’이라는 뜻이었는데 이제는 ‘변두리’라 되었어요.”라며 이끄는 곳으로 따라가면 닿는 곳이다. 일본에 관광이나 출장으로 가서는 별스럽게 가볼 일이 없는 동네 스미다 구 이야기를 조근조근 펼쳐 보이는 영화 <워커즈>.

   
▲ 영화 <워커즈> 포스터
 

일본에서 협동조합 기본법이 시행된 지 1년 6개월이 흐른 시점인 2012년, 국제협동조합의 해를 기념해 모리 야스유키 감독이 노동자 협동조합 ‘워커즈 코프’의 활동과 그 안에서 협동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아낸 다큐멘터리가 <워커즈>에서 카메라가 초점을 맞추는 스미다 구는 고층 빌딩 들이 세계 최고의 높이를 다투는 첨단 도시 도쿄에 있지만 지붕도, 담도 낮은 곳이다. 낮은 만큼 가난과 실업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곳이다. 그러니 첨단 일본을 보여주는 휘황찬란한 쇼핑센터, 놀이동산, 비즈니스 센터같은 스펙터클 대신 아주 평범한 사람들 모습을 보여준다.

<워커즈>는 이어지는 내내 하고 싶은 말, 보여주고 싶은 모습으로 가득하다. 특별한 영화적 기교, 현란한 컴퓨터 그래픽, 유명한 출연자 하나 없이 스미다 구 사람들의 일상과 대화로 상황을 비추고, 사이사이 한 사람 한 사람 인터뷰를 통해 속내를 들여다보다가, 각각의 에피소드가 다음으로 이어질 때면 내레이션으로 넘어간다. 흔한 TV 현장 탐방 취재 리포트 같다. 그런데 지루하지 않고, 재미와 놀라움을 던진다.

여유가 넘쳐나는 부자들이 사는 곳도 아닌데 젊은 유치원 교사들이 아이들 행사에서 옛 전통에서처럼 떡메치기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른들 찾아다니며 물으면 어른들은 기억을 되살려 유치원 행사를 마을 전체 행사로 만들어 함께 떡을 나누어 먹는 동네, 노인들이 시름시름 앓거나 뒷방 신세 한탄하며 풀 죽어있는 대신 함께 운동하고, 미용실 찾아가 머리 다듬고, 오래 앓는 환자 병수발 부담 없이 받을 수 있는 동네, 참 이상한 동네다.

<워커즈>의 주인공인 스미다 구 주민들은 서로 힘을 모아 새로운 복지 사회를 만들어가려는 노동자이자 경영자인 조합원들이다. 이 사람들은 스스로 경영자이자 출자자이자 노동자로 살고 있다. 자본이 노동을 고용하는 것이 상식인 세상에서 노동이 자본을 고용하는 이상한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다.

   
▲ 영화 <워커즈> 스틸컷
 

나이 많은 장애인 여성이 수발을 받아야만 하는 더 나이 들고 병든 어머니를 홀로 모시고 살아갈 수 있는 건 이들이 사는 이상한 방식 덕분이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데, 마침 착한 이웃이 있어 그저 이웃한 정으로 가끔 들여다보고, 필요한 걸 챙겨주는 것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 다리 불편한 나이 많은 여성이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노모를 두고 멀리 장보러 간다거나, 자꾸자꾸 쌓여가는 집안 살림을 깔끔히 해치운다거나, 환자의 건강을 지켜주기 위해 몸을 자주자주 몸을 씻겨주나 하는 일을 엄두나 낼 수 있을까?

그런데 ‘워커즈 코프’는 그걸 가능하게 한다. 살림 도우미, 방문 목욕, 장보기 같이 소소하지만 하지 않으면 삶이 엉망진창이 될 일들을 집으로 찾아와 맡아서 해준다. 이런 서비스가 그저 봉사가 아니라 협동조합 사업이 된다.

도시가 번성할 수 있는 건, 일자리를 두고 벌어지는 치열한 경쟁 덕분이다. 영화 내내 사이사이 등장하는 만담가가 말했듯이 일본이 현재의 모습을 지켜온 힘은 고용되지 않는 노동을 희생으로 삼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실 고용노동만 알고 있다. 고용되기 위해서 공부도 하고 대학도 가고 스펙도 쌓는다. 거기에서 청년들의 고용불안과 실업률, 비정규직 문제가 만성화된다. 고용이 만료된 노년의 삶은 외롭고, 불안하고, 자신 없다.

   
▲ 영화 <워커즈> 스틸컷
 

그런데 ‘워커즈 코프’는 그 틀을 깨고 육아, 교육, 노인 복지 등 사람살이에 꼭 필요한 일을 사업으로 삼아 지역 공동체에 서비스를 제공하고 노동자가 스스로 일자리를 만드는 것이 목표인 회사다. 고용/피고용 관계도 정규직/비정규직이라는 관계도 없고, 모두가 노동자이면서 경영자인 노동자협동조합, 이 상생의 모습이 실현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워커즈>는 마을 만들기, 생협, 노후 ,복지 등 여러 분야에서 협동조합을 고민하는 우리 사회에 좋은 본보기가 될 것이다.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사이사이 등장하는 만담가가 “'과로사'라는 말이 유일한 나라,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기 위해서 일하는 나라, 돈의 노예가 되어 살아야만 하는 나라”가 일본이라고 하지만 틀렸다. 우리도 그런 나라에서 살고 있다. 그러니 <워커즈>에서 보여주는 대안적 생활 방식이 비추는 웃음과 희망이 우리에게도 대안이 될 것이고, 영화가 관객들에게 던지는 숙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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