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youtu.be/6KUDs8KJc_c
(번스타인 지휘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과 합창단 연주)

주류 언론이 짠맛을 잃은 요즘, 제 정신 있는 기자가 존재한다는 걸 확인할 수 있어서 반가웠다. SBS의 윤창현 기자는 SNS에 올린 글에서 “온갖 휘장과 총, 칼을 찬 군인들이 절도 있는 동작으로 사열을 하며 최고의 예우를 갖춰 교황 방한을 환영했다”고 묘사한 뒤, “일체의 격식과 권위를 배격하고 낮은 곳을 찾았던 분 앞에 펼쳐진 형형색색의 휘장과 총, 그리고 칼을 찬 군인들을 동원한 예의가 얼마나 반가웠을지 의문”이라고 느낌을 밝혔다.

   
▲ 지난 14일 오전 프란치스코 교황이 경기도 성남 서울공항을 통해 입국한 뒤 박근혜 대통령과 함께 의장대를 사열하고 있다. 사진=사진공동취재단
 
상식 있는 눈으로 보면 지극히 당연한 지적이다. “의전이란 게 양측이 합의해서 이뤄지는 거”라는 비판도 있었다. 규칙과 관행에 눈이 멀어서 단순한 진리를 볼 수 없는 사람은 언제나 있는 법이다. 의장대의 젊은 병사들마저 축복해야겠다는 생각이 교황의 머리에 떠오르지 않은 것은 윤 기자의 지적대로 그의 심기가 “몹시 불편했기 때문” 아니었을까? 교황 방한을 결산하는 리포트 중 돋보이는 게 있어서 기자 이름을 보니, 역시 윤창현이었다.

그는 “교황에게서 사람들은 우리 사회 안에서 만나기 어려웠던 리더십, 힘들 때 기댈 수 있고 아플 때 위로받을 수 있는 지도자의 모습을 발견했다”고 했다. “4박 5일간 교황의 미소를 바라보며 취한 듯 위안을 받았던 사람들의 가슴엔, 다시 휑한 구멍이 뚫릴지 모른다”고 지적한 뒤, “그 구멍을 메워줄 리더십과 신뢰를 우리 사회 지도층이 갖출 수 있을지, 교황은 무거운 숙제를 남기고 한국을 떠났다”고 결론지었다. 교황이 떠난 지금, 한번쯤 음미해 볼만한 리포트라고 생각한다.

   
 
 

http://w3.sbs.co.kr/news/newsEndPage.do?news_id=N1002541763
힘들 때 기댈 ‘참 리더’… 교황이 남긴 숙제

이 리포트의 배경에 흐른 음악은 모차르트의 <아베 베룸 코르푸스>였다.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으로 가득한 합창곡이다. 생애 마지막 해인 1791년, 모차르트는 아내 콘스탄체와 떨어져 있는 기간이 길었다. 몸이 허약한 아내가 요양을 위해 빈 근교의 바덴에 머물렀기 때문이었다. 그는 눈물을 글썽이며 편지를 쓸 정도로 그녀를 그리워했다. 그해 6월, 모차르트는 콘스탄체를 만나러 바덴을 찾았고, 그 곳 합창단의 지휘자 안톤 슈톨(Anton Stoll)의 부탁으로 이 모테트를 작곡했다.

“성처녀 마리아에게서 나신 몸
수난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네.
옆구리에서 귀한 피 흘리셨네.
우리 죽을 때 그 수난을
기억하게 하소서.”

바덴에서 막내 아들 프란츠 자버가 태어났다. 먼저 태어난 다섯 아이 중 네 명이 이미 세상을 떠났다. 이 아기는 어른이 될 때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까. 모차르트는 연민에 가득한 아버지의 눈으로 갓난아기를 바라보았으리라. 옆구리에 피 흘리며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눈빛도 그러했을까. <아베 베룸 코르푸스>는 고통 가득한 이 세상에 갓 태어난 아들을 위한 축복의 노래다. 이 곡을 작곡할 때 모차르트는 자신이 바로 그해 세상을 떠나게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베 베룸 코르푸스>는 대가 없는 사랑을 말없는 슬픔으로 노래한다. 브뤼셀에 사는 인기 작가 에릭 엠마누엘 슈미트는 눈 내리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선물을 잔뜩 사 들고 백화점을 나선다. 그는 선물 받은 이가 기뻐하며 칭찬할 것을 상상하며 혼자 흐뭇해한다. 거리에서 노인 합창단이 <아베 베룸 코르푸스>을 부르고 있다. 순간 그는 몹시 부끄러워졌다. 그는 예수가 수난을 겪고 십자가에 매달렸을 때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이 노래의 거울에 비쳐 본 자신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값진 선물을 준비하며 오직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만을 기대하고 있지 않았던가. 에릭은 문득 자기 마음에 켜켜히 쌓인 이기심을 발견하고 부끄러움에 몸을 떤다. 하지만 그가 마음을 바꾼 순간, 선물들은 다시 축복으로 돌아온다. 더욱 가벼운 마음으로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 (에릭 엠마누엘 슈미트 <모차르트와 함께 한 내 인생>에서)

생명은 하나하나 소중하다. 세상의 빛을 향해 눈을 뜨는 모든 아기는 경이롭다. 그런데 왜 세상은 이렇게 고통으로 가득 차 있는 걸까.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도 하루아침에 운명이 달라질 수 있다. 이명원 교수는 자신의 삶과 유민 아빠 김영오씨의 삶이 4월 16일을 기점으로 갈라졌다고 말한다. (이명원 <인간의 권리, 인간에 대한 예의>, 한겨레, 2014. 8. 18) 304명이 허망하게 사라져 간 그날 이후, 생명의 상실은 회복될 수 없었다. 죽은 이를 살려내라는 통절한 절규를 속으로 삼키며 오직 ‘진상규명’을 요구할 뿐이었다.

이명원 교수의 글을 뒤집어 보면, 4월 16일을 기점으로 내가 김영오씨가 될 수도 있었다는 얘기다. 공감 능력이 있는 인간이라면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는 게 자연스럽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많이 있다는 사실이 기가 막힌다. 유족들의 아픔을 방관하고 심지어 조롱하는 그들은 누구일까? 목숨을 건 단식이 계속되고 있지만 책임져야 할 사람들은 여전히 침묵이다. 그들과 소통하는 것은 왜 이토록 어려운 일일까? 박대통령이 유족과 함께 진심으로 울었다면 세월호 법안 처리가 이렇게 꼬이지 않았을 것이다. 법안 처리도 ‘골든 타임’을 놓쳤다.

교황이 달고 있던 세월호 추모 리본을 보고 어떤 이는 “중립을 지켜야 하니 떼는 게 좋지 않겠냐”고 물었다고 한다. 이 말에 교황은 “인간적 고통 앞에서 중립을 지킬 수는 없다”고 대답했다. 중립이 뭔가? 객관성의 외피를 뒤집어 쓴 냉담이고, 결국 얄팍한 타산 아닌가? 상처 입은 이들과 함께 아파하는 마음은 중립 따위와는 차원을 달리한다.

교황이 떠난 뒤 달라진 게 있을까? 세상은 여전히 슬픔으로 가득하다. 눈물과 하소연은 공허하게 메아리치고, 상처 입은 유족들의 옆구리는 여전히 피 흘리고 있다. 교황이 떠난 자리에 여운처럼 울리는 음악, <아베 베룸 코르푸스>는 말없이 세상의 고통을 바라보며 눈물짓고 있다.

   
 
 

http://youtu.be/TKX_cCkHO9I
모차르트 <아베 베룸 코르푸스> (빈 소년합창단 노래)

(이 칼럼은 필자의 요청으로 인해 8월 21일 오전 10시 15분 일부 수정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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