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동적인 제목 때문이었을까? 감독의 전작 <범죄와의 전쟁 : 나쁜 놈들 전성시대>(2011년)가 장르 영화 안에 ‘시대’의 어두움을 짚어낸 서늘함을 새겨놓은 기억 때문이었을까?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디트가 오르는 순간, 극장 안을 가득 메운 관객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헐… 이게 끝이야?”

“뭐야? 어떻게 해석하라는 거야?”

“민란 장면이 대박인 줄 알았더니 월하의 공동묘지 코스프레가 대박이었다니!”

“하정우 보러 왔는데 강동원만 보여.”

살기 팍팍하고, 민심 어수선한 시절, 압제에 항거하는 민초들의 액션 사극에서 기대하던 바가 어그러진 당혹감이 여기저기에서 터져 나왔다. 조선 후기, 양반과 탐관오리의 수탈이 극에 달했던 시절을 배경으로 했다는 것도 이미 알려져 있었고, 제목 <군도 : 민란의 시대>에서 ‘여럿이 한꺼번에 몰려다니며 남의 재물을 억지로 빼앗거나 훔치는 사람들’ 이라는 뜻의 군도 群盜라는 어려운 한자말보다는 ‘정치적 또는 사회적 문제로 민중들이 집단적으로 일으킨 폭동이나 소요’인 민란 民亂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시대’를 통해 감독이 전하려는 메시지가 있으리라 생각했던 관객들로서는 당황스럽기도 했을 것이다.

   
사진출처=영화 군도 페이스북 페이지
 

<범죄와의 전쟁 : 나쁜 놈들 전성시대>가 그랬듯이 <군도 : 민란의 시대> 역시 제목 뒤에 부제가 있고, 그 안에서 관객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있고, 그래서 윤종빈 감독이라면 거친 액션과 칼부림의 스펙터클 뒤에 시대에 대한 성찰과 비판의 묵직함이 있으리라는 건 당연한 기대일 수도 있다.

개봉 전부터 잘 알려졌듯이 가장 밑바닥 인생인 백정 청소년 ‘돌무치’가 착취가 극에 달했던 시절을 겪으며 힘없는 백성의 편이 되어 세상을 바로 잡고자 하는 의적떼인 군도를 이끄는 ‘도치’로 거듭난다는 것이 영화의 중심 서사요, 그렇다면 영화의 중심인물인 돌무치/도치(하정우)가 프로타고니스로서 ‘뭉치면 백성, 흩어지면 도적’이 되는 군중을 도적떼가 아니라 민란의 주역으로 떨쳐일어나도록 하는 성장 영화가 되어야 했을 것이고, 그 성장을 이끌어내는 백성의 적 조윤(강동원)이 안타고니스트로서 돌무치/도치의 맞수로 나선다는 것은 흥미진진한 설정이었다.

<추격자>, <황해>, <베를린>, <더 테러 라이브> 등 출연하는 작품마다 굵직한 존재감을 드러내온 하정우가 덜떨어진 열여덟 풋내기에서 믿음직한 민란의 지도자가 되는 모습을 어떻게 연기할 것인가에 대한 기대가 무엇을 어떤 상황에서 먹든 다 맛있게 보이도록 한다는 ‘먹방 연기’에 대한 기대만 못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늑대의 유혹>부터 <형사 : Dualist>, <초능력자>, <전우치전>에 이르기까지 출연하는 영화의 작품성과 상관없이 관객을 홀리는 강동원의 액션에 대한 기대는 남성들 우글대는 영화 안에 굳이 어여쁜 여배우가 미모로 로맨스를 이끌어가는 서브플롯 없이도 스크린을 보며 두근거릴 수 있다는 기대에 딱 맞는 캐스팅이었다.

그런데도 관객들은 영화를 보고 나서 당혹해한다. 왜?

조선 후기가 배경이라면서 생뚱맞게 스파게티 웨스턴 스타일의 배경음악을 버무려서나 아무리봐도 앳된 기색 없는 하정우가 열여덟 막둥이로 등장해 그저 힘만 센 천하장사가 아니라 불 속에서도 타죽지 않는 생명력으로 쌍칼을 휘둘러 대는 액션이 억지스럽기는 해도 오락 영화로서 웃고 보자고 하자면 그러려니 할 수 있다.

문제는 이 영화가 돌무치/도치의 성장 드라마가 아니라 알고보니 조윤의 성장 드라마였다는 것이다. 지리산 의적떼 추설을 이끄는 두목 노사장(이성민), 정신적 지도자 땡추(이경영)을 비롯해 전위대에 포진한 마동석, 윤지혜, 조진웅 등등 각각의 사연과 재주가 있는 군도 조직원 하나하나는 말할 것도 없고, 나중에 죽창이며 쇠스랑 들고 몰려나오는 무리를 대표하는 김성균에 이르기까지 아무도 자신들을 억압하는 시대의 실체를 제대로 꿰뚫어 보고, 그에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미래를 꿈꾸는 데까지 이르지 못한다. 그저 들고 일어나 서로 뭉쳐 싸울 뿐.

그런데 조윤은 다르다. 서자로서 신분의 장벽을 깨닫고, 개인의 노력과 능력으로는 넘어설 수 없는 적장자 상속 가부장제의 냉혹함에 분노하고, 마침내 그 장벽과 냉혹함의 숨통을 끊어낸다. 심지어 그 과정에서 절대악의 화신이었던 조윤은 깨달음을 얻은 인간으로 거듭난다.

조윤이 돌무치를 불러 살인을 명할 때, 소 돼지를 죽이는데 망설이게 되지 않느냐고 묻는다. 목숨을 빼앗고자 하는 상대를 보고 마음이 약해지는 것, 그것이 인간의 기본이기에. 소 돼지를 잡을 때는 거리낌 없다던 돌무치가 막상 사람을 앞에 두고 마음이 약해진 것을 탓하고 벌하려던 조윤이 정작 자신이 없애려던 아기를 본 순간 바뀌게 되는 것은 그저 핏줄이 당겨서라든가 아기가 예뻐서라든가 라는 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불가해한 깨달음이다.

무사로서 절체절명의 순간에 한 팔을 봉하고라도 지켜내려는 그 아기는 조자룡이 등에 업고 헌 칼 휘둘러 지켜내야 할 주군의 후계자도 아니었다. 아비를 죽여서라도 지켜야하는 아기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지키는 마음, 아기를 통해 조윤은 인간으로 거듭난 것이다. 그런데 군도 무리는 조윤이 깨닫고 성장하는 동안 그만한 깨달음과 성장을 얻지 못한다.

윤종빈 감독이 ‘뭉치면 백성, 흩어지면 도적’인 그 군도들에 대해 회의적이기 때문인 것일까? 되풀이되는 착취와 압제의 역사 속에서 떼로 떨쳐 일어났다가 뿔뿔이 흩어져 여전히 착취와 압제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에 대해 비관적인 것일까? 권력의 실체,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바꾸지 못한 채 싸우기만 하는 무리에 대해 아기 하나를 남겨두고 속편을 만들 요량인 것일까?

어쨌든 여름 블록버스터 시즌에 <군도 : 민란의 시대>가 불러일으킨 흥행 돌풍은 <초능력자>에서 이미 입증된 강동원의 티켓파워가 역대급 ‘초능력’이라는 확인일 것이다. 민란의 결과는 어찌 될지 알 길 없는 스토리라지만 역사 속에 무너진 시대인 건 분명하고, 주제의식과 무관하게 도드라지게 아름다운 강동원의 매혹만 남기는 영화가 어디 이 영화 하나 뿐이던가.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