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괜찮아 사랑이야>에서 장재열(조인성)은 새로운 작품을 쓰기 위해 쉐어하우스에 들어간다. 3년간 사귄 애인 풀잎(윤진이)이 그의 소설을 모두 표절한 상황에서 책을 전부 회수했으니 불명예를 떨쳐버릴 회심의 역작이 필요한 장재열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주거 목적을 띠고 쉐어하우스에 입주하는 것과 다른 목적을 지닌 장재열, 그는 사람들은 모두 외로움을 넘어 가족적인 공동체를 통해 정적인 인간관계의 긍정적인 점을 향유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무엇보다 그는 새로운 소설을 위해서는 지해수(공효진)를 유혹해야 했다. 물론 지해수는 장재열의 접근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려 한다. 스스로 불안 장애에 대인 관계 장애가 있음을 밝히고 있는 지해수에게 그는 부담스럽다. 개인의 사생활을 여지없이 무너뜨리려하기 때문이다. 장재열이 지닌 특유의 연애술사 기질은 갈수록 강도를 더하기만 한다. 개인의 사생활을 무너뜨리려는 자와 지키려는 자의 밀당은 쉐어하우스의 화두이기도 하다.

쉐어하우스가 아무리 공간과 생활을 공유한다지만, 개인의 사생활과 감정을 침해하거나 강요할 수는 없는 법이다. 드라마 <괜찮아, 사랑이야>가 방영된다고 할 때, 긴장하던 방송 프로그램이 <룸메이트>였다고 한다. 왜냐하면, 예능 <룸메이트>와 드라마 <괜찮아 사랑이야>가 쉐어하우스를 소재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긴장해야 할 <룸메이트>인 셈이다. 만약 <룸메이트>가 만약 쉐어하우스의 일상을 잘 다루었다면 이런 긴장감은 일지 않았을 것이다.

일상에서 벗어나 있는 <룸메이트>가 보여주는 집은 항상 이벤트가 넘쳐나는 공간이다. 잠시라도 가만히 조용할 틈이 없다. 그들에게 집은 쉬는 공간이 아니라 재밌는 상황이 언제나 일어나야 하는 곳이다. 물론 개인들의 사생활은 존재할 수 없고, 언제나 가감 없이 노출이 되어야 한다. 방을 같이 쓰는 것은 하나의 명분일 뿐 집들 놀이의 공간으로 삼아 시청자의 관음증을 채워줘야 하기 때문이다. 언제 어디서든 노출을 전제로 촬영이 이루어지므로 진실성은 오히려 위축되고 만다. 카메라의 시선에 대한 의식만이 언행을 좌우하며 사람들 간의 관계와 그로 인한 현상과 사건을 만든다.

집은 휴식과 치유의 공간이다. 그리고 그러한 집을 공유하는 이들은 쉐어하우스 그 이상의 가치를 갖고 있게 된다. 하지만 <룸메이트>의 사람들은 노동을 끝내고 쉬는 공간이 아니라 놀이를 위해 노동을 해야 하는 공간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룸메이트'에 등장하는 집과 방은 노동의 공간처럼 시끌벅적하고 오픈되어 있다. 그러니 각자의 문화적 기호와 취향을 투영할 수 없다.

<룸메이트>에 나오는 쉐어하우스의 구성원들은 자신들에게 맞는 집이나 방의 디자인에 대한 기호와 선택을 반영시킬 수 없다. 애초에 방송 콘셉트에서 그런 것은 관심의 대상이 되지도 않는다. 룸메이트는 사실상 그냥 이름에 불과하다. 그들은 방을 공유해야 할 절실한 실제적 이유가 없다. 프로그램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 집에 몰려 나와 있을 뿐이다. 그렇다. 그들은 실내에 몰려 있지만 밖에 나와 있는 셈이다. 이로써 그들은 집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밖에 나와 있음-소외됨을 보여준다. 방과 집을 무엇을 위해 어떻게 공유하여 삶의 가치를 높일 것인지, 그에 대한 의도도 관심도 없다.

<도시의 법칙>에는 이보다 한층 나은 면이 있다. <도시의 법칙>에서는 적어도 낮에는 노동을 하고 밤에는 집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나오기 때문이다. 즉, 낯선 도시에서 일을 하고 휴식을 취하는 집을 함께 공유 한다는 점에서 쉐어하우스의 특징을 보여준다. 적어도 낮에는 노동하는 각자의 생활이 보장된다. 다만 그들은 노동을 통해 집세를 마련할 필요가 없으며, 공간 소유에 대한 책임이 덜하다. 노동과 이를 위한 집단 거주는 설정이며, 단지 미션이지 현실적인 절실한 생존과 관계가 없다. 또한 여전히 그들의 쉐어하우스 생활에는 개인의 사생활이란 없으며 시시때때로 카메라가 그들의 사소한 행동이나 말들을 모두 잡아내어 공개한다. 그들이 머무는 공간은 여전히 비일상적인 이벤트가 열리는 곳이다. 개인들이 각자 휴식을 취하고 문화적 취향을 실현 시킬 수 있는 여지가 없다. 우리 각자는 어떤 집과 방을 갖고 그 안을 어떻게 꾸미고 배치하며 활용하면서 살아야 할지 꿈꾸기 마련인데 말이다.

사회적으로 쉐어하우스가 젊은 층에게서 주목을 받고 있다. 유럽과 일본에서는 사회 일반화되어 있고 우리나라에도 여러 곳에서 실제 운영 중이다. 이 때문에 방송프로그램에서 다투어 다루고 있다. 쉐어하우스 현상은 화려한 싱글 라이프의 장밋빛 담론이 가진 모순을 드러내 주고 있다. 인간이라는 존재와 삶에 대한 근본적인 사유를 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혼자 집을 사용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같이 공유하는 쉐어하우스는 갈수록 심각해지는 주거문제를 대안적으로 성찰하게 한다. 때문에 방송 프로그램은 주거 현실을 적극 반영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맥락에서 <룸메이트>와 <도시의 법칙>은 이런 쉐어하우스의 특징을 갖고 있다. 그러나 서민 청년들의 쉐어하우스 문화는 없다. 집이란 무엇인지 주거 문화는 무엇인지 고민하고 이를 예능차원에서 재밌게 전달할 수도 있겠지만, 이벤트를 재밌는 상황만을 끊임없이 설정하거나 특정 상황에서 인물들의 자극적인 언행에만 초점을 맞춘다. 우리 시대에 공유의 주거 문화를 그리고 사람이 살기 좋고 편안하게 쉬고 재충전할 수 있는 주거 공유 디자인을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사생활과 공동생활을 적절하게 조율하고 융화시키는 노력의 새로운 전범(典範)이 필요하다. 한국 사회는 지나친 집단주의 주거 문화 때문에 상대적으로 극단적인 개인 파편화의 주거 문화를 지향하기도 했다. 그렇기에 둘을 적절히 조화시킬 만한 훈련과 경험의 축적이 부족했다. 이 점이 여전히 매우 중요한 화두가 될 것이다.

드라마 <괜찮아, 사랑이야>에는 개인의 사생활과 집단의 공동생활의 적절한 조율과 융화가 조금은 등장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는 사회적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듯싶다. 하지만 그들은 일반 시민들의 생활과는 다른 직업과 라이프 스타일을 가졌으며, 그들이 사용하는 공간도 럭셔리해 보이기만 한다. 무엇보다 공유하는 집이 사랑과 로맨스의 공간적 배경이 되기 때문에 개인과 집단의 충돌이 이루어지는 쉐어 하우스의 다양한 면모들을 어디까지 반영할 수 있을 지 우려가 되기도 한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MBC 시트콤 '남자 셋 여자 셋‘이 보여주었던 쉐어 하우스의 비현실성은 2014년에도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지적은 더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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