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youtu.be/WumZcW953W0
(1악장 빠르고 장엄하게, 피아노 미츠코 우치다)

22살 모차르트가 도착한 파리는 희망의 땅이 아니었다. 멋 옛날, 7살 신동 모차르트를 환대하고 상냥하게 대해 주었던 파리는 원숙한 음악가 모차르트에게 아무 관심이 없었다. 그는 꼬마 천재가 누렸던 상품 가치를 더 이상 갖고 있지 않았다.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에서 화려한 도약을 꿈꾸던 그는 당혹스러웠다. 샤보 부인의 집에 초대받았을 때의 풍경이다.

“저는 도착해서 30분 동안 크고 온기라고는 없는 방에서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샤보 백작 부인이 들어오더니 대뜸 연주를 해보라는 겁니다. 어쩔 수 없이 꽁꽁 언 손으로 가련하고도 비참한 마음으로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가장 기가 막힌 일은, 그 부인과 신사 양반들이 음악은 듣지 않은 채 스케치에 열중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저는 의자와 탁자를 향해 연주하는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들에게 들을 수 있는 귀가 있고 느낄 수 있는 가슴이 있다면 주변에서 일어나는 씁쓸한 일들을 그저 웃어넘길 수 있을 텐데요….”                                                     - 아버지에게, 1778년 5월 1일 파리에서

모차르트는 생계를 꾸리기 위해 피아노 레슨을 하고, 극장용 발레의 음악을 만들어야 했다. 파리의 인간과 분위기에 실망한 모차르트는 이 도시를 가리켜 “음악에 관한 한 짐승들만 득실거리는 곳”이라며 진저리를 쳤다.

불운했던 파리 시절, 모차르트의 생애에서 가장 가슴 아픈 순간이 찾아왔다. 남편 레오폴트 대신 아들과 동행해서 파리에 온 어머니 안나 마리아가 죽음을 맞은 것이다. 엄격하고 치밀했던 아버지에 비해 따뜻하고 유머를 즐겼던 어머니의 죽음은 그때까지 모차르트가 겪은 시련 중 가장 아픈 것이었다. 어머니는 잘츠부르크에 있는 남편에게 편지를 썼다. “창문이 어두운 거리를 향하고 있는 작은방에 앉아 있어요. 불빛도 거의 없고 먹을 것도 없어요.”

아들은 일이 잘 안 풀려서 헤매느라 차분히 어머니 곁에 있어주지 않았다. 어머니는 말이 안 통하는 프랑스 의사의 진료를 거부했다. 독일말을 잘 하는 의사를 찾는 건 불가능했다. 의식불명에 빠진 어머니는 끝내 남편에게 작별인사도 전하지 못한 채 숨을 거두었다. 그날 임종을 마친 볼프강은 잘츠부르크로 보낼 두 통의 편지를 쓴다. 아버지에게 쓴 첫 편지는 충격적인 소식을 감춘 채 어머니의 병이 위중하다는 선의의 거짓말을 담아 보냈다. 아버지가 마음의 준비를 하도록 시간을 주려는 것이었다.

   
▲ 모차르트의 어머니 안나 마리아(1720~1778)
 
“매우 슬프고도 우울한 소식을 전해 드립니다. 사랑하는 어머님께서 많이 편찮으십니다. 희망과 두려움이 교차하는 며칠 낮밤을 보내면서 저는 오직 신의 의지에만 매달렸습니다. 하느님이 정하신 일은 우리 눈에 아무리 낯설더라도 언제나 가장 옳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중략) 이제 희망을 가집시다. 너무 많이는 말고요.”                                            - 아버지에게, 1778년 7월 3일 파리에서

두 번째 편지는 가족의 오랜 친구였던 아베 불링어에게 보낸 것으로, 이 고통스러운 소식을 아버지에게 조심스레 잘 전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크나큰 슬픔 속에서도 침착하게 사람들을 배려하는 모차르트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직후에 쓴 작품인 피아노 소나타 A단조 K.310은 모차르트의 수많은 작품 중 전기적인 배경을 통해 설명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곡에 해당한다.

1악장 알레그로 마에스토소(빠르고 장엄하게)는 눈물로 범벅이 된 채 피아노를 연주하는 모차르트를 떠올리게 한다. 2악장 안단테 칸타빌레 콘 에스프레시오네(느리게 노래하듯, 표정을 담아)는 사랑하는 이의 죽음과 살아남은 자의 슬픔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다.

   
 
 

http://youtu.be/BLbunvM4s0k

이 느린 악장에 대한 피아니스트 미츠코 우치다의 느낌을 들어 보자.

“어떻게 죽을 수가 있어?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난 거지? 모차르트는 가슴에 손을 얹은 채 간절히 용서를 구하고 있는 거죠.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몇 달간 그들은 같이 있지도 못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충분하게 어머니를 돌보지 못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레오폴트는 아내의 뜻밖의 죽음에 크게 상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뭐라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비스런 슬픔을 느낀다”고 말했고, 급기야 볼프강이 어머니를 방치했기 때문에 일어난 비극이라고 원망하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심한 자책감을 느끼고 있던 모차르트는 생전 처음 ‘깊은 우울증’을 느꼈다고 쓰고 있다.

   
▲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잘츠부르크에서 그린 모차르트 가족 초상화.
 
아버지는 아들에게 잘츠부르크로 당장 돌아오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아들은 전제군주 콜로레도의 밑으로 돌아가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다. 그는 사랑하는 알로이지아가 있는 뮌헨으로 향한다. 아버지는 아들이 ‘방탕한 꿈’을 꾼다고 나무랬다. 모차르트는 애정이 담뿍 담긴 편지로 아버지를 위로해 드린 다음 완곡하게 이렇게 항의한다.

“저는 계속해서 꿈을 꿀 겁니다. 이 땅위에 꿈을 꾸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으니까요. 그렇지만 하필 방탕한 꿈이라니요! 평화로운, 달콤한, 상쾌한 꿈이라고 하셔야지요! 평화롭거나 달콤하지 않은 것들은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많은 슬픔과 약간의 즐거움, 그리고 몇몇 참을 수 없는 일들로 이루어져 제 인생을 만들어 낸 현실 말입니다!”                 - 아버지에게, 1778년 12월 31일 뮌헨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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