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 채무자들은 어떤 통계에도 잡히지 않는다. ‘카드 돌려막기’를 하다 하다 한계에 다다르면 결국 숨어버리기 때문이다. 노숙자 중에 이런 사람이 많다. 이들은 오직 자살률 통계에만 나온다.”

2003년 ‘카드 돌려막기’로 진 빚을 11년 동안 갚지 못하다가, 올해 법원에서 면책 판결을 받은 A씨의 얘기다. 군 장기복무 중 다리를 다쳐 전역한 그는 “건강상 이유로 채무 상환이 불가능했다”고 설명했다.

21일 오후 서울 중구 열매나눔재단에서 열린 ‘부채탕감 토론회’에 증언자로 참석한 그는 “이 토론회가 부실채권 채무자들의 자살사고 예방에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대출금 또는 사채로 대변되는 경제적 어려움은 자살률과 연관이 되어 있다.

2012년 조사에 따르면 자살 5명 중 1명은 경제적 사유(경찰 통계연보)로 인한 것이며, 자살 충동의 39.5%는 경제적 어려움(통계청 사회조사)으로 인해 발생한다.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10년 연속 자살률 1위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 에듀머니, 희망살림, 희년함께, 민생연대, 해오름, 민병두 새정치민주연합 의원 등이 21일 오전 국회에서 ‘빚 탕감 운동’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사진=민병두 의원실 제공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빚 탕감 운동’이 시민사회와 종교계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사단법인 희망살림, 사회적기업 에듀머니와 사단법인 희년함께, 한국복음주의연합과 민병두 의원(새정치민주연합) 등은 이날 오전 국회 기자회견을 하고, 오후엔 관련 토론회를 열었다.

이들은 이날 운동의 일환으로 99건, 10억원 가량의 장기 연체채권을 ‘소각’했다고 밝혔다. 지난 4월 이 단체들은 117명의 빚을 약 4억6천만원을 소각했으며 이번이 두 번째다. 여기서 소각은 이들 단체가 시민 성금 등을 모아 대부업체가 보유한 장기 연체채권을 산 후 폐기해 버린다는 뜻이다. 이번 소각은 한 대부업체가 채권을 기부하면서 이루어졌다.

사회적 기업 등으로 이루어진 이들이 올해에만 14억원에 달하는 빚을 갚을 수 있는 비결은 ‘장기 연체채권’이 엄청나게 싸기 때문이다. 은행은 3개월 이상 연체된 채권을 부실채권으로 분류하고, 장부상 손실처리한 뒤 대부업체에 헐값에 팔아버린다.

결국 이런 종류의 부실채권은 실제 추심업계에서 본 가격의 1~5%에 거래된다. 첫 번째 소각에서 이들은 약 1천300만원으로 4억6천만원짜리 채권을 살 수 있었다. 채권 100만원 당 겨우 3만원이 든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모든 채권을 다 갚아줄 수는 없다. 이들은 장기 연체채권이 어떻게 대부업체에 거래되고, 채무자의 삶을 끊임없이 옥죄는지를 알리는 것에 더 큰 의미가 있다고 밝혔다. 이들은 “금융위기 시 대형은행과 금융업체는 국민의 세금인 공적자금을 투자해 살려냈지만, 수많은 생계형 신용불량자에게는 끊임없는 빚 독촉으로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는 현실을 극복하고자 운동을 전개한다”고 설명했다.

   
▲ 희년함께, 희망살림, 한국복음주의연합 등은 21일 오후 서울 중구 열매나눔재단에서 ‘부채탕감 토론회’를 열었다. 사진=김병철 기자
 
애초 이 ‘빚 탕감 운동’은 미국의 롤링 주빌리(Rolling Jubilee)’ 프로젝트를 한국에 가져온 것이다. 금융기관의 부도덕을 비판하는 미국 시민단체 ‘월가를 점령하라’(OWS·Occupy Wall Street)는 2012년 11월부터 '롤링 주빌리' 운동을 펼쳤다.

OWS는 금융기관이 부실채권(NPL) 시장에서 개인 채무자들의 채권이 헐값에 거래되고 있는 점에 주목하며 그 방식을 활용해 시민들로부터 성금을 모아 채권을 사들인 뒤 무상 소각한다. 채권을 소각한 뒤 OWS는 해당 채무자에게 “이 빚을 갚지 않아도 된다”고 통보한다. 2013년 기준 약 2700명의 채무가 소각됐으며, 155억원의 채권을 매입하는 데 원금의 20분의 1 가량인 약 7억원이 들었다. [관련기사 : 3만원에 팔리는 ‘100만원 연체채권’… “부실채권 규제해야”]

한편 독특한 콘셉트의 운동인 ‘롤링 주빌리(희년)’는 일정기간마다 죄를 사하거나 부채를 탕감해주는 기독교 전통에서 유래했다. 많은 기독교 단체들이 ‘빚 탕감 운동’에 동참한 이유다. ‘성경의 부채탕감과 한국 교회의 역할’이라는 주제로 열린 이날 토론회에선 교회가 이 운동에 앞장서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정종성 백석대 교수는 “주의 은혜의 해(the Year of the Lord 눅 , 4:19), 즉 안식년 혹은 희년제도의 선포는 사회의 최하위계층으로 떨어져있거나 고리대금의 수탈적 압박에 짓눌려 근근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호하려는 종교적 안전장치임에 틀림없다”고 말했다. 이문식 희년선교회부회장(광교산울교회 담임목사)은 “빚 탕감 운동은 선한 개인들과 NGO 그리고 교회와 종교단체들이 앞장서서 지금 당장 실천할 수 있는 대안”이라며 “신속하고도 긴급하게 가장 절박한 사람들을 구해 낼 수 있는 긴급 빈민 구호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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