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유가족에게 막말을 해 국민들의 반발을 사면서 일약 조명을 받은 조원진 새누리당 의원이 과거 정치인으로서 어떻게 성장해왔는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그는 친박의 핵심그룹에 포함돼 있는데다 첫 국회 입성 때(2008년) 정치신인으로 알려져 있었다. 특히 그의 과거 이력을 보면, 그가 어떻게 친박에 서게 됐는지 잘 이해되기 어려운 점이 적지 않다. 학생운동과 YS 핵심참모의 보좌관, 이인제 캠프, 무소속 출마 등의 이력은 친박으로서의 고리가 잘 맞아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조원진 새누리당 의원(세월호 국조특위 새누리당 간사)이 세월호 국정조사 특위에서 유가족에 막말을 하고 희생자를 AI(조류인플루엔자)나 산불에 비유해 국민들의 반발을 산 인물이다. 그러나 새누리당 내에서는 재선인데도 박근혜 대통령의 친박그룹으로 평가받고 있다. 국회 정보위원회 새누리당 간사를 맡으며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과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공개 때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었다.

그가 어떻게 새누리당 의원의 길을 가게 됐는지의 일단이 최근 그가 직접 집필한 자서전에 기술돼 있다.

그는 지난 2월 출간된 자서전 <열정으로 다시 쓰는 내사랑 대구>에서 자신의 대학시절엔 학생운동을 했다고 회고했다. 민주화운동의 폭발기였던 1987년, 조 의원은 한국외국어대를 졸업한 직후 외대 예비역청년학생협의회 고문으로 활동하면서 학원자주화 투쟁을 이끌고 있었다고 썼다. 그는 “나는 시국대회에 나가 마이크를 잡고 정권의 부당성을 호소했으며, 당시 정권의 부당성은 자연히 학원민주화를 위한 총장퇴진운동으로 이어졌다”며 “당시 존경하며 배웠던 스승인 황병태 교수가 외국어대 총장이었으나 학생대표로 퇴진을 요구했다”고 술회했다.

그랬던 황 교수가 여당으로 가지 않고, 1988년 ‘YS(김영삼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와 같이 가기로 했으니 함께 가자’는 제안을 듣고 조 의원은 자신의 정치본능이 자극을 받아 28세에 정치에 첫발을 들였다고 썼다. 이북 출신인 아버지의 반대에도 통일민주당 당원이자 창당발기인으로까지 등록한 조 의원은 황병태 후보의 비서관으로 사회생활을 정치권에서 시작해 13대 총선에서 황 의원(강남갑)이 당선되는데 함께 했다. 그는 자신이 조직담당으로서 지역관리를 했다고 썼다.

   
지난 2008년 4월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의원과 조원진(오른쪽) 등 친박연대 후보들. 사진='열정으로 다시쓰는 내사랑 대구'
 
당시 YS 핵심참모였던 황병태 의원이 14대 총선에선 김동길 후보에 패해 조 의원은 충격에 빠졌다고 기억했다. 조 의원은 황 의원의 소개로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과 만나 최연소 부장 이사가 됐다가 황 의원이 93년 주중대사로 갈 때 중국 베이징에서 기획조사 부장으로 함께 가게 됐다고 전했다.

그러다 다시 황병태 의원이 대사를 마치고 15대 총선(1996년) 준비로 귀국할 때 조 의원도 함께 귀국해 보좌관 활동을 재개했다.

1년 뒤인 1997년 황 의원은 한보사태에 휘말려 의원직을 상실했다. 당시 조 의원은 1997년 대선 때는 이인제 캠프에 몸담았다는 기록도 있다. 1997년 11월 13일자 한겨레를 보면, 이인제 당시 국민신당 후보가 발표한 조직책 9명 가운데 대구수성갑 조직책에 ‘조원진(38세·전 대우자동차 부장)’이라는 이름이 나온다. 조 의원은 자신의 저서에서도 1997년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에 한나라당이 패한 것에 대해 “이회창 후보의 포용력이 아쉬웠던 대선이었다”고 평가했다.

이듬해인 1998년 조 의원은 무소속으로 아예 출마에 나섰다. 대구 북구갑 보궐선거에 출마했으나 패배했으며, 2년 뒤 16대 총선에서도 같은 지역구에 출마해 낙선했다.

그러다 중국에서 사업하던 조 의원이 2008년 4월 총선을 불과 열흘도 안남긴 상태에서 귀국해 친박의 간판을 달고 출마해 당선됐다.

이 과정만 보면 어떻게 그가 박근혜 대통령과 가까워졌는지가 잘 설명되지 않는다. 전두환의 군사독재에 저항하고 학원자주화투쟁까지 벌이다 YS의 통일민주당에 몸담았던 이가 어떻게 군사독재의 원조인 박정희의 딸인 박 대통령과 함께 할 수 있겠느냐는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는 정치입문 당시 박정희를 존경했던 아버지에 상의했을 때 박정희 전 대통령과 각을 세웠던 야당 의원의 비서관으로 가는 것 자체에 대해 못마땅해 했고, YS당으로 가는 것에 대해 더 큰 반대를 했다고 저서에 쓰기도 했다.

   
지난 2012년 박근혜 대통령으로부터 총선 공천장을 받고 있는 조원진 새누리당 의원. 사진='열정으로 다시쓰는 내사랑 대구'
 
다만 한가지 연결고리로 추정할 수 있는 것은 황병태 전 의원이다. YS의 핵심 정책참모였던 황 의원은 3당합당 당시 막후협상을 했던 사실상의 주역이었다는 전력 외에 박정희 정권 시절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한 이른바 ‘박정희의 사람’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의 당선 직후 TV조선에 출연한 황 전 의원은 자신이 박정희를 12년을 모셨다고도 했다.

조 의원도 저서에서 황 전 의원에 대해 “황병태 의원은 2007년 경선부터 2012년 대선까지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남다른 존경심을 발판으로, 박근혜 대통령을 만들기 위해 굉장히 노력을 많이 했다”고 평가했다.

조 의원이 무소속으로 출마했다가 떨어진 핵심이유를 박근혜 바람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정치적 스승인 황 전 의원과 박 대통령의 관계를 더 중시한 것이 아닌가 추정해볼 수 있다.

   
사진='열정으로 다시쓰는 내사랑 대구'
 
조 의원은 저서에서 지난 2000년 총선 대구북구갑 선거에 대해 “당시 나는 각종 TV토론을 통해 인지도를 높이며 초반에 좋은 스타트를 보였지만 시간이 갈수록 무소속이라는 한계와 조직기반이 취약한 점 등이 작용했다”며 “당시 박근혜 의원이 지역구인 칠성시장을 딱 한번 방문했는데, 그 때 시장 아주머니들로부터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이번에 양보하고 다음엔 니 해라’는 말이었다. 폭풍과 같은 박근혜 바람이 분 것”이라고 썼다.

그런데도 조 의원은 2008년 친박연대 후보로 당선되기 전까지 박근혜 대통령에 대해 감명을 받게 됐다는 점을 유독 강조했다. 2000년 총선 낙선 이후 중국에서 사업중이던 조 의원은 2007년 한나라당 경선에서 이명박 후보가 당선됐을 때에 대해 “박근혜 대표의 아름다운 승복을 보며 정치에 몸담았던 사람으로서 우리 정치의 새로운 희망과 대한민국의 새로운 미래가 보여 내심 기뻤다”며 “그러면서 동시에 지난 총선에서 내가 왜 그렇게 잘 나가다가 박 대표의 바람에 맥없이 무너질 수밖에 없었는지를 다시 깨닫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러다 2008년 4월 3일 중국에서 곽노전이라는 친구의 설득으로 급거 귀국, 친박연대의 깃발을 걸고 대구에서 당선했다고 썼다. 그러나 중국에서 하던 사업을 던지고 어떻게 선거 열흘도 안남긴 상태에서 귀국해 당선했는지에 대한 명쾌한 설명을 그의 저서에서 찾아보긴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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