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릭스 멘델스존 <독일의 옛날 봄노래> Op.86-6
http://youtu.be/GuxR-T-3KBY
(바리톤 토마스 햄슨)

‘19세기의 모차르트’로 불린 펠릭스 멘델스존(1809~1847)에겐 4살 위 누나 파니 멘델스존(1805~1847)이 있었다. 파니는 연주와 작곡은 물론 기억력에서도 동생을 능가하는 천재였다. 어린 시절, 펠릭스가 작곡에 착수하면 그녀의 머릿속에 이미 곡이 완성돼 있었다고 한다. 펠릭스가 13살 때, 파니는 애정과 자부심과 뒤섞인 기분으로 썼다.

“난 언제나 동생의 유일한 음악 조언자였어. 펠릭스는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보기 전에는 어떤 악상도 써 나가지 않았어. 예컨대, 나는 그가 오페라를 악보에 적기도 전에 모조리 외우고 있었어.”

어린 남매는 함께 작곡하고 제목을 붙이며 놀았다. 훗날 두 사람이 작곡한 <무언가>는 어린 시절에 이미 잉태되고 있었다. 그들은 <가든 타임즈>, <차와 눈> 등 자기들만 알아볼 수 있는 암호로 잡지를 만들며 즐거운 놀이와 재치 있는 농담으로 가득한 꿈같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

외모도 쌍둥이처럼 닮았던 두 사람은 음악에 대한 깊은 사랑과 열정을 공유했다. 파니 멘델스존의 야상곡 G단조를 들어보자. 따뜻하고 멜랑콜릭한 두 사람의 작품은 웬만큼 예민한 귀로 들어도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파니 멘델스존 녹턴 G단조
http://youtu.be/ti1eZ2B63Ro
(피아노 히더 슈미트)

파니는 스스로 작곡했을 뿐 아니라 동생의 창작에 참여했다. 펠릭스는 초기 걸작인 8중주곡 Eb장조의 씨앗을 <파우스트>에서 얻었다고 누나에게만 귀띰했다. 17살 때 작곡한 <한여름 밤의 꿈> 서곡은 두 남매의 피아노 이중주로 세상에 첫선을 보였다. 펠릭스는 누나를 ‘나의 칸토르(음악 선생님)’라 부르며 따랐다. 두 남매의 이런 관계는 평생 지속됐다. 펠릭스는 1836년 필생의 역작인 오라토리오 <성 바울> 작곡한 뒤엔 그녀의 ‘혹평’을 보내달라며 간절히 조언을 구했다.

   
▲ 어린 시절의 펠릭스 멘델스존과 4살 위 누나 파니 멘델스존
 
그러나 아버지 아브라함은 그 시대의 여느 아버지와 똑같았다. “여자가 있을 자리는 살롱”이라며, 여자가 사교생활의 장식품 이상으로 음악을 공부하는 걸 인정하지 않았다. 1820년, 펠릭스만 데리고 파리로 떠난 아버지는 15살 난 딸 파니에게 썼다.

“펠릭스에게는 음악이 직업이 될 수 있지만, 네게는 그저 장식품이고, 또 그래야만 한다. 네 명예는 네 처신과 분별에서 얻어야 한다. 펠릭스가 찬사를 받을 때 너도 기쁨을 느끼지 않느냐. 너도 똑같이 찬사를 받을 수 있었을 거란 뜻이니 그렇게 느끼고 처신하도록 해라. 이것이 여성성이며, 진정한 여성성만이 너희 여자들을 빛나게 할 수 있다.”

18세기, 레오폴트 모차르트가 15살 난 딸 난넬의 연주를 금지하며 뱉은 말과 거의 똑같지 않은가! 모차르트의 5살 위 누나 난넬은 뛰어난 피아니스트로 작곡에도 재능이 있었지만,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음악가의 길을 접어야 했다. 가부장 이데올로기가 그녀의 재능을 질식시켰는데, 50여년 뒤 태어난 펠릭스의 누나 파니도 비슷한 길을 걸어야 한 것이다.

8년 뒤 결혼을 앞둔 파니에게 아버지 아브라함은 한 번 더 못 박는다. “너의 진정한 소명, 젊은 여성의 소명을 따라라. 즉, 가정주부의 역할에 충실하란 말이다.” 인습이라는 괴물을 위해 개성과 재능을 희생하라는, 무지막지한 폭력이었다. 남편 헨젤은 하필 음치(!)였고, 결혼은 천재 음악가 파니에겐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파니는 작곡을 향한 열정을 완전히 접을 수 없었다.

1827년에 발표된 <12개의 노래>은 그냥 ‘멘델스존 작곡’이라 돼 있었는데, 파니의 작품도 세 곡 포함되어 있었다. 지금이라면 남매간의 표절 시비가 붙을 수 있는 일이지만 파니에겐 성차별의 벽을 넘어 작품을 발표할 수 있는 기회였고, 펠릭스도 이에 기꺼이 동의했다. 당시 이 가곡집에서 제일 인기 있는 곡은 파니가 쓴 <이탈리아인>이었다.

   
▲ 결혼할 무렵의 파니 멘델스존 (1805~1847)
 
파니는 결혼 뒤에도 작곡을 계속하여 400곡이 넘는 작품을 남겼는데, 대부분 가곡과 피아노 소품이었다. 그녀는 죽기 몇 달 전 자신의 이름으로 작품을 단 한번 출판했을 뿐, 대중 앞에 음악가로 등장한 적이 없다. 얼핏 초라한 성과로 보이지만, 파니가 평생 음악가의 길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된다. 런던의 한 언론은 1838년, “파니가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다면 그 재능이 전세계에 알려졌을지도 모른다”고 썼다. 부유한 집안의 딸이었기에 처신의 제약이 심했고, 그 때문에 아까운 재능을 파묻어야 했다는 것.

   
 
 

파니 멘델스존의 삶과 음악을 그린 다큐멘터리
<파니를 위한 진혼곡>(Requiem for Fanny)
http://youtu.be/udncoYOVysk

딸 파니를 희생시킨 가부장 이데올로기가 아들 펠릭스에겐 축복이었을까? 아버지 아브라함은 늘 ‘남자의 책임감’을 강조했다. 1834년, 과로에 지친 펠릭스가 뒤셀도로프 음악감독직을 사임했을 때 아브라함은 심하게 나무랐다.

“저주받을 고집불통 때문에 너는 지금까지 겪지 못했던 큰 피해를 자초했다. 아울러, 네가 키우다가 생각 없이 버린 이 악단을 통째로 불행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이 점이 더 심각하다.”

펠릭스는 늘 일에 치어 있었다. 명성이 높아질수록 초청은 점점 더 많아졌고, 책임감 때문에 어떤 요청도 거절 못했다. 본인도 자기가 무리한다는 걸 알고 있었고, 이 모든 게 자신의 삶과 힘을 잡아먹고 있다고 느꼈다. 하지만 스스로 떠안은 멍에를 평생 벗어날 수 없었다. 기력이 소진된 멘델스존은 고백한다.

“나는 감히 물러날 생각을 하지 못해. 내가 선택한 대의에 피해를 입힐 테니까.”

뒤셀도르프 음악감독직을 그만뒀을 때 아버지가 던진 경고를 스스로 되풀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1835년 11월 19일 사망했고, 펠릭스는 “나의 젊은 시절은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끝났다”고 썼다. 그러나, 아버지의 영향은 평생 남아 있었다. 가부장 이데올로기가 강요하는 의무와 도덕은 여자 뿐 아니라 남자의 평화로운 삶도 빼앗는다. 멘델스존이 38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것도 이와 아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멘델스존은 최후의 대작 <엘리야>를 작곡한 뒤 탈진했다. 지인들에 따르면 “지친 표정, 평소와 다른 아주 고통스런 표정”이었다. 1846년 말, <엘리야> 1부를 파니 앞에서 연주했는데, 그게 남매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파니는 1847년 5월 14일, 베를린의 일요음악회를 연습하다가 손에 감각이 사라지는 걸 느꼈고, 그날 저녁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이 소식을 들은 펠릭스는 서둘러 달려왔지만, 장례식과 추도식이 끝난 뒤였다. 그는 크게 소리를 지르며 쓰러져버렸다. ‘늙고, 슬프고, 구부정한’ 모습이 된 그는 여름을 스위스 인터라켄에서 요양하며 보냈다.

파니와 펠릭스는 뗄 수 없는 하나의 영혼으로 된 ‘샴쌍둥이’였을까? 펠릭스는 누나의 죽음으로 음악의 샘마저 말라버린 걸까? 누나가 떠난 세상을 살아 낼 기력이 없었을까? 9월말, 베를린에 가서 파니의 빈 방을 본 펠릭스는 다시 무너졌고, 11월 4일 세상을 떠났고, 고향 데사우의 가족 묘역에서 누나 곁에 묻혔다.

그는 마지막 작품인 가곡 <독일의 옛날 봄노래>에서 비통하게 누나를 그리워한다.

“나는 홀로 고통스러워 하네 / 이 고통은 끝나지 않으리라 / 나는 너로부터, 너는 나로부터 / 아아, 사랑하는 이여, 헤어져야 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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