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가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 지명자의 부적절한 발언을 공개해 파문이 일고 있는 가운데 SBS가 문 후보자의 발언 내용과 관련 동영상을 확보하고도 보도하지 못한 것으로 확인됐다.

SBS 정치부 기자들은 박근혜 대통령이 문창극 후보자를 지명한 10일부터 ‘검증 보도’에 착수했고 ‘식민지배는 하나님 뜻’이라는 등의 논란이 된 발언 내용이 담긴 동영상을 입수해 10일 저녁 7시 경 데스크에 보고했다. 정치부 기자들은 정치부 데스크에 보고했고, 부장을 통해 국장에게 보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보도국 간부들은 교회 연설이라는 특수한 상황이 있고, 시간을 두고 보완취재를 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후 정치부 기자들은 문창극 후보자가 강연을 했던 대학교 학생들을 만나 문제가 될 만한 발언들을 수집하고, 칼럼 내용 등 사례를 모아 다시 보고했다. 해당 기자가 기사 초안까지 작성했으나 결국 11일 SBS 8시뉴스에는 반영되지 않았다. 한 시간 뒤인 KBS 9시뉴스에서 문 후보의 발언 내용을 단독 보도했다.

SBS는 결국 특종할 기회를 두 번이나 놓친 셈이 됐다. 정치부 기자들이 10일 저녁에 동영상까지 입수해 보고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11일 KBS 9시뉴스보다 1시간 빨리 보도할 수 있었지만 SBS 보도국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 11일자 SBS ‘나이트라인’ 갈무리. SBS는 KBS가 9시뉴스에서 문창극 후보자의 발언을 보도하고 난 이후 나이트라인에서 관련 소식을 전했다.
 
SBS 내부는 부글부글 끓고 있다. SBS 기자협회도 12일 저녁 기수별 대표자들이 모여 ‘긴급 운영위원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 모인 기자들은 보도국이 정확한 경위를 밝혀야 하며, 보도 책임자들의 신속한 해명을 촉구한다는 의견을 모았다.

회의에 참가한 SBS의 한 기자는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지난 10일 세월호 참사 보도 관련해 SBS의 내부 토론회가 있었다. SBS의 세월호 보도를 돌아보면서 재난보도를 제대로 하고, 민감한 사안도 똑바로 보도하자는 의지를 다지는 자리였다”며 “그런데 토론회를 했던 바로 그 날 문창극 후보자 관련 기사가 누락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많은 기자들이 이 사태가 그냥 넘어갈 문제가 아니라는 의견을 밝혔다”고 말했다.

12일 저녁 SBS 사내 인트라넷에는 기수별 성명서가 올라왔다. 18기 기자들은 <사라진 뉴스에 대한 해명을 요구한다>는 성명서에서 “타사 기자들이 우리를 괄목상대하던 때가 있었다. 자신들이 하지 못 하는 것을 우리가 해내고 있는 데 대한 부러움으로 응원도 받았다”며 “하지만 우리는 이제 그 모든 부러움, 시기, 우러름이 끝났다는 걸 안다. 배분된 리포트 시간을 칼같이 맞추고 오탈자를 남기지 않는 것만이 뉴스 품질을 높이고 우리 존재 목적인 시민의 신뢰를 얻는 길인지 이른바 ‘함량 미달’인 우리는 모른다”고 밝혔다.

18기 기자들은 또한 “대통령이 문창극 씨를 총리로 내정했다. 우리가 철저한 검증으로 언론 본연의 사명을 지킬 것이라 믿었다”며 “그런데 경쟁사가 톱뉴스로 길게 가져간 사안이 우리 뉴스에서 사라졌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모두가 수군거리지만 정작 말해야 할 위치에 있는 사람은 말이 없다”며 보도 책임자들이 기사를 사라지게 한 경위를 설명하고 책임질 것을 요구했다.
 
17기 기자들도 성명을 통해 “일국의 총리후보자가 자국의 역사와 민족성을 모욕하는 발언을 한 사실이 확인됐다. 권력을 감시하는 언론으로서 또 시민의 알권리에 봉사하는 기자로서 마땅히 보도했어야 할 사안”이라며 “그러나 취재와 기사작성까지 완료된 시점에서 알 수 없는 이유로 기사가 누락됐다. 문창극 발언 기사가 누락된 것은 언론사로서 SBS가, 기자로서 우리가 권력 감시라는 본령을 다 할 수 있는가와 닿아있는 문제”라고 강조했다.

전국언론노조 SBS 본부는 13일 오전 발표한 성명을 통해 “세월호 참사의 오보, 이어진 정부 비판 보도의 실종으로 기존 언론들은 시청자의 눈과 마음에서 완전히 멀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어떤 경로로 건전한 취재와 정당한 논의 과정을 틀어막았는지 사측은 분명히 밝혀야 한다”며 “진보와 보수 중도 언론을 막론하고 일제히 문창극 총리 후보자의 적합도를 검증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데 SBS만 유독 문 후보자의 임명을 도왔다”고 비판했다.

SBS 본부는 또한 “기사가 방송되지 못한 것이 외압인지 자기 검열인지 그 이유를 반드시 밝혀낼 것이며 이번 사태의 책임자를 문책하고 재발방지 방안을 제시할 것을 사측에 최고 수준에 요구한다”고 밝혔다. SBS본부 공정방송위원회는 12일 오후 사측에 이 사태 관련 편성위원회를 16일에 열자고 요청했다.

   
▲ 11일자 KBS 뉴스9 갈무리
 
논란이 커지는데 아직 SBS 보도국은 공식적인 해명을 내놓지 않고 있다. 다만 정승민 정치부장과 성회용 보도국장이 13일 오전 열린 편집회의에서 이 사태에 관해 해명했다. 참석자들은 정승민 부장은 “교회에서 신도를 상대로 발언한 점이나 발언 배경의 특수성 때문에 당사자의 해명을 들을 필요 있었고, 시간 들여 검토할 필요가 있었다”며 “그 과정에서 시간이 흘렀고 결과적으로 KBS가 먼저 보도하게 됐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성회용 보도국장은 “교회 강연의 성격, 참석자의 범위 등을 확인할 필요가 있겠다 싶었다. 폐쇄적인 모임에서 한 얘기는 아닌지 등 배경 확인이 필요했다”며 “동영상이 이미 인터넷에 공개돼 있어 (문 후보자의 발언이) 비판받을 여지가 충분했지만, 3년 전 발언이었고, 어떤 상황에서 그런 발언이 나왔는지 조금 더 확인하라고 지시한 것”이라고 해명했다고 참석자가 전했다.

성 국장은 또한 “젊은 기자들이 중요한 기사를 제때 보도하지 못한데 대해 분노하는 것에 대해서는 공개적으로 사과한다. 내 불찰이지 다른 원인은 없었다”며 “이런 사안, 특히 사람 신상에 관한 일은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는 게 우리의 숙명이다. 민감한 사안을 얼마나 빨리, 그리고 얼마나 정확하게 판단을 내릴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함께 고민하는 자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고 회의 참석자가 전했다.

일각에서 정승민 정치부장이 총리후보자와 고등학교 동문이고, 성회용 국장이 중앙일보 출신이어서 보도가 누락됐다는 의혹이 제기된 것에 대해 성 보도국장은 “그런 말이 도는 건 상당히 유감이다. 내가 기사 판단을 잘못한 것이지 저는 문창극과 일면식도 없고, 악수조차 한 적도 없고 한 번도 마주친 적 없다”고 밝혔다.

미디어오늘이 성회용 보도국장과 정승민 정치부장에 직접 전화통화를 시도하고 문자메시지를 보냈으나 연결이 되지 않았다.

SBS는 이 사태 이전에도 ‘보도 누락’ 관련해 홍역을 치른 적이 있다. SBS <그것이 알고싶다> 팀이 세월호 참사 관련 방송을 제작하기로 했지만 제작본부장이 ‘6.4 지방선거 이후 방송하라’며 제작을 중단시킨 사건이 있었다. 논란이 커지자 제작본부장은 다시 방송이 가능하다고 밝혔지만 이미 10일 간 제작이 중단된 상태에서 방송이 어려워졌고 결국 <그것이 알고싶다> 세월호 참사 편은 지방선거 이후인 6월 7일 방송됐다. (관련 기사 : <SBS ‘그것이 알고싶다’ 세월호 편 제작 중단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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