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과정에서 나타난 박근혜 정부의 무책임과 무능에 대해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대표가 일갈을 하고 나서 주목된다. 유족의 절규는 국가에 대한 절망감이며, 당국의 대처는 무질서와 무능력이 상상을 초월한다는 지적이었다.

강우일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의장(제주교구장·‘베드로’)은 주교회의가 16일 발행한 ‘경향잡지’ 6월호에서 세월호 참사를 두고 “많은 이들이 이렇게 괴로워하고 힘들어할 만큼, 이번 세월호 참사는 그냥 잊고 떠나보내기에는 너무 가슴 아픈 재앙이고, 우리 모두가 그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한 국가적 범죄라는 생각이 든다”고 털어놨다.

강 의장은 “그냥 희생자들에 대한 애도를 표하고 그들의 영원한 안식을 기도하는 것으로 만족할 일이 아닌 것 같다”며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시각에서 이 사건을 조명하고, 이 재앙에서 우리가 읽어야 할 시대의 징표는 무엇이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이번 사건에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일지 진지하게 고뇌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라고 밝혔다.

강 의장은 박근혜 정부의 대처에 대해서도 “시간이 흐를수록 세월호 비극에 대한 국민의 슬픔과 무력감이 울화와 분노로 바뀌어가는 것 같다”며 “그것은 세월호가 인천항을 떠나기 전부터 진도 앞바다에서 침몰하기까지, 그리고 침몰 후 한 달씩 이어지는 희생자 수색 과정에서 드러난 행정 당국의 무질서와 무책임과 무능력이 상상을 초월하였기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국가 개조를 해야 한다’는 박근혜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강 의장은 “대통령 스스로가 ‘국가 개조’라는 말을 입에 올릴 만큼 사안이 심각했다”며 “속된 말로 표현하면 국가가 골병이 든 것”이라고 평가했다. 강 의장은 “오죽하면 희생자 유족들이 ‘이런 국가가 국가인가, 이민을 떠나겠다’ 하며 토로하겠는가”라며 “국가란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는데 그 본분을 완전히 상실했으니 이런 국가의 국민으로 살고 싶지 않다는 절망감의 표출”이라고 설명했다.

   
강우일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의장. 사진=천주교주교회의
 
강 의장은 단원고교생 희생자들을 두고 “침몰하는 세월호와 함께 바다 밑바닥으로 가라앉아 목숨을 잃은 단원고 학생들은 아무런 자기 탓 없이 예기치 못한 사고를 당했다”며 “화물을 규정의 3배나 넘게 실어버린 선주 측의 탐욕, 그것을 눈감아주고 출항을 허락한 공권력, 승객들을 버리고 자기만 살겠다고 도망친 선원들의 무책임, 그리고 인명 구호의 책임을 최우선해야 하는 관계 공무원의 직무유기가 3중 4중으로 덫을 놓고 어린 학생들을 몰살했다”고 비판했다.

아이들은 가만히 있으라고 하는 무책임한 안내 방송에 따라 꼼짝 않고 선실에서 묵묵히 기다리고 있다가 탈출 시기를 놓쳐 앞날이 구만리 같은 풋풋한 인생을 접었다고 강 의장은 애도했다.

그는 이들의 죽음이 갖는 의미에 대해 “죄 없는 아이들이 왜 그렇게 집단으로 참변을 당해야 했을까”라며 “그 때묻지 않은 수많은 젊은이들이 아무런 의미 없이 그냥 죽을 수는 없다. 목숨은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강 의장은 “그런 최고의 가치를 지닌 목숨이 무더기로 죽어간 데에는 분명히 큰 의미가 숨겨져 있을 것”이라며 성경에 나와있는 베들레헴 아이들의 학살극을 전했다.

“죄 없는 아이들의 죽음은 2천 년 전 베들레헴에서 일어났던 무참한 학살을 연상하게 한다. 동방박사들이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아기를 경배하러 왔다고 하자 헤로데 임금과 이스라엘의 권세가들은 크게 당황하였다. 그러고는 미래의 화근을 없애려고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버렸다(마태 2,16-18 참조).”

이를 두고 강 의장은 “이 무구한 젖먹이들의 죽음은 표면적 사실만 보면 불의가 세상을 지배하고, 힘이 센 자가 힘없는 약자를 마음대로 농락하고 짓밟는 인간 역사의 오랜 부조리가 반복된 또 하나의 사례에 지나지 않았다”며 “진도 앞바다에서 무더기로 수장당한 단원고 아이들과 동승한 희생자들 모두 베들레헴의 젖먹이들처럼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맞서지도 못하고 무력하게 유린당했다”고 평가했다.

강 의장은 “관피아들과 공조 체제를 이루며 불의와 비리를 양산해 온 사업가들, 규제를 완화하며 이러한 세력을 대대로 양산해 온 국가 지도층이 이 아이들을 바다 속으로 쓸어넣었다”며 “그러나 그들만이 아니라 그러한 불의와 비리의 관행과 일상화를 묵인하고 무관심하게 보아 넘겼던 우리 시민들 모두가 공모자인 셈”이라고 반성했다.

그는 “사회의 불의와 비리를 고발하고 밝혀야 할 언론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고, 모두가 입을 다물고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라며 “불의를 보고도 침묵하고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것은 악을 수용하고 협조하는 죄”라고 평가했다.

이번 사태를 두고 강 의장은 “우리는 진실이 묵살당하고 정의가 억압당할 때 침묵과 외면으로 비켜가는 무책임을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며 “통곡소리가 들릴 때 못 들은 척하고 귀를 닫지 말아야 하며, 보기에 끔찍한 광경이 벌어질 때 눈을 돌려 못 본 척하고 지나치지 말고 멈추어 서야 한다. 그리고 다가가야 한다”고 제안했다.

국가기관이 개입되었다고 해서 무조건 정당화되거나 용납될 수는 없다고도 강 의장은 강조했다. 그는 국민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 국가공권력의 이름으로 고귀한 인권이 무참히 유린당한 사례가 우리 역사에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고 제시했다.

밀양송전탑 사건을 들어 강 의장은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고 그분의 제자로 살아가려면 오늘 눈물짓고 고통 받는 이들, 오늘의 가장 작은 이들 곁으로 다가서고 그들의 아픔과 한을 공유해야 한다”며 “이 가장 작은 이들의 희생을 밑거름으로 번영과 성장을 추구하는 세력에 대해서는 그 주체가 국가 권력이라고 해도 ‘아니요!’라고 거부하는 저항의 연대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제안했다.

강 의장은 “예수님은 가장 작은 이들의 배고픔과 목마름을 외면하고, 그들의 고통과 외로움에 무관심한 이들에게는, 영원한 불이 준비되어 있다고 경고하셨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다음은 주교회의서 발행하는 ‘경향잡지’ 6월호에 특별기고한 강 의장 글 전문이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성찰

세월호 희생자 안산 분향소 조문객만 50만이 넘었다고 하고 전국적으로 합산하면 184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옛날에도 세월호나 비슷한 정도의 대형 사고가 있었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오랫동안 조문 행렬에 참가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사고일로부터 한 달이 지났지만 온 국민의 침울한 애도 분위기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지난 5월 10일 토요일 저녁 안산에는 2만 명에 가까운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애도의 시간을 공유했다. 왜 이렇게까지 온 나라가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을까? 많은 시민들의 슬픔과 무력감이 울화와 분노로 바뀌고 있다. 이 나라의 온 백성이 심각하게 속병을 앓고 있다.

많은 이들이 이렇게 괴로워하고 힘들어할 만큼, 그만큼 이번 세월호 참사는 그냥 잊고 떠나보내기에는 너무 가슴 아픈 재앙이고, 우리 모두가 그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한 국가적 범죄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 신자들도 이 사건을 접하며 그냥 희생자들에 대한 애도를 표하고 그들의 영원한 안식을 기도하는 것으로 만족할 일이 아닌 것 같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시각에서 이 사건을 조명하고, 이 재앙에서 우리가 읽어야 할 시대의 징표는 무엇이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이번 사건에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일지 진지하게 고뇌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시간이 흐를수록 세월호 비극에 대한 국민의 슬픔과 무력감이 울화와 분노로 바뀌어가는 것 같다. 그것은 세월호가 인천항을 떠나기 전부터 진도 앞바다에서 침몰하기까지, 그리고 침몰 후 한 달씩 이어지는 희생자 수색 과정에서 드러난 행정 당국의 무질서와 무책임과 무능력이 상상을 초월하였기 때문이다.

대통령 스스로가 ‘국가 개조’라는 말을 입에 올릴 만큼 사안이 심각했다. 이건 속된 말로 표현하면 국가가 골병이 든 것이다. 오죽하면 희생자 유족들이 “이런 국가가 국가인가, 이민을 떠나겠다.” 하며 토로하겠는가. 국가란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는데 그 본분을 완전히 상실했으니 이런 국가의 국민으로 살고 싶지 않다는 절망감의 표출이다.

침몰하는 세월호와 함께 바다 밑바닥으로 가라앉아 목숨을 잃은 단원고 학생들은 아무런 자기 탓 없이 예기치 못한 사고를 당했다. 화물을 규정의 3배나 넘게 실어버린 선주 측의 탐욕, 그것을 눈감아주고 출항을 허락한 공권력, 승객들을 버리고 자기만 살겠다고 도망친 선원들의 무책임, 그리고 인명 구호의 책임을 최우선해야 하는 관계 공무원의 직무유기가 3중 4중으로 덫을 놓고 어린 학생들을 몰살했다. 아이들은 가만히 있으라고 하는 무책임한 안내 방송에 따라 꼼짝 않고 선실에서 묵묵히 기다리고 있다가 탈출 시기를 놓쳐 앞날이 구만리 같은 풋풋한 인생을 접었다.

이들의 죽음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죄 없는 아이들이 왜 그렇게 집단으로 참변을 당해야 했을까? 그 때 묻지 않은 수많은 젊은이들이 아무런 의미 없이 그냥 죽을 수는 없다. 목숨은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이다. 그런 최고의 가치를 지닌 목숨이 무더기로 죽어간 데에는 분명히 큰 의미가 숨겨져 있을 것이다.
죄 없는 아이들의 죽음은 2천 년 전 베들레헴에서 일어났던 무참한 학살을 연상하게 한다. 동방박사들이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아기를 경배하러 왔다고 하자 헤로데 임금과 이스라엘의 권세가들은 크게 당황하였다. 그러고는 미래의 화근을 없애려고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버렸다(마태 2,16-18 참조).

티 없는 젖먹이들이 권력자들의 탐욕 때문에 무참히 목숨을 빼앗긴 것이다. 이 무구한 젖먹이들의 죽음은 표면적 사실만 보면 불의가 세상을 지배하고, 힘이 센 자가 힘없는 약자를 마음대로 농락하고 짓밟는 인간 역사의 오랜 부조리가 반복된 또 하나의 사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하느님의 ‘구원의 역사’라는 시야에서는, 이 젖먹이들의 죽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첫 동료 순교자들의 제사였다.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기 위해, 세상 모든 이의 죄를 대신 기워 갚기 위한 속량의 제물로 자신을 십자가에 봉헌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제사에 자신의 목숨을 함께 제물로 바치는 티 없는 어린이들의 합동 제사였다.

진도 앞바다에서 무더기로 수장당한 단원고 아이들과 동승한 희생자들 모두 베들레헴의 젖먹이들처럼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맞서지도 못하고 무력하게 유린당했다. 관피아들과 공조 체제를 이루며 불의와 비리를 양산해 온 사업가들, 규제를 완화하며 이러한 세력을 대대로 양산해 온 국가 지도층이 이 아이들을 바다 속으로 쓸어넣었다.

그러나 그들만이 아니라 그러한 불의와 비리의 관행과 일상화를 묵인하고 무관심하게 보아 넘겼던 우리 시민들 모두가 공모자인 셈이다. 세월호가 인천과 제주를 매일 오가면서 몇 년을 두고 똑같은 불법을 일삼았다니, 화물 과적을 고발하고 규정 위반이라고 단속하고 안전시설 미비라고 따지는 사람이 몇 명이라도 있었다면 이렇게까지 참담한 비극이 일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회의 불의와 비리를 고발하고 밝혀야 할 언론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고, 모두가 입을 다물고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다. 불의를 보고도 침묵하고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것은 악을 수용하고 협조하는 죄다. 죄 없는 아이들의 목숨은 이런 우리 모두의 방조와 무관심이 저지른 죄를 밝히기 위해 필요했던 속량의 제물이 아니었을까?

베들레헴 젖먹이 엄마들의 비탄과 예언자 예레미야의 외침 속에 팽목항 유족들의 울부짖음이 공명이 되어 들려온다.

“라마에서 소리가 들린다. 울음소리와 애끊는 통곡소리. 라헬이 자식들을 잃고 운다.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마태 2,18).

이제 우리는 이 사회의 관행이 되고 일상화된 불의와 비리의 고리를 파쇄하기 위해 우리 각자가 할 수 있는 역할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진실이 묵살당하고 정의가 억압당할 때 침묵과 외면으로 비켜가는 무책임을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 통곡소리가 들릴 때 못 들은 척하고 귀를 닫지 말아야 한다. 보기에 끔찍한 광경이 벌어질 때 눈을 돌려 못 본 척하고 지나치지 말고 멈추어 서야 한다. 그리고 다가가야 한다.

국가기관이 개입되었다고 해서 무조건 정당화되거나 용납될 수는 없다. 국가 공권력은 국민을 위해 존재한다. 그런데 우리 역사 속에는 국가의 이름으로 고귀한 인권이 무참히 유린당한 사례가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 몇십 년이 지난 후 사법부가 무죄라고 판결하고 보상금이 지급된다 하여도 구겨지고 짓밟힌 인생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2008년 이후 밀양 농민들은 765kv 고압 송전탑 건설을 반대해 오다가 두 명이 자살하고 한 명이 자살을 기도했다. 74세나 되는 할아버지가 스스로 분신을 하면서까지 송전탑 건설에 항의했지만 작년 10월에 당국은 경찰 병력을 3천 명이나 동원해서 노인들을 밀어내고 공사를 강행했다. 그 후 칠순 할머니가 농약을 마시고 세상을 떠났고, 또 한 분이 자살을 기도했다. 왜 이 노인들이 이런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을까?
푼돈밖에 안 되는 보상비로 평생 일해오던 농토를 뺏기고 고향도 뺏기고 희망도 빼앗긴 노인들이 8년을 버티다 병들고 지쳐 쓰러져가고 있다. 뜻있는 이들이 희망버스를 타고 달려가 이들을 지원하고 위로하기도 하지만, 역부족인 것 같다. 한전은 주민들을 보상비로 회유하여 찬성 쪽으로 기울게 하고, 그로 인하여 마을 공동체가 돈 때문에 완전히 파괴되었다. 이 송전탑은 신고리 3호기 핵발전소의 완공을 앞두고 거기서 생산되는 전기를 송전하기 위한 탑들이다.

그런데 그동안 이 원전들을 운영하고 감독하는 고위 공무원과 관계자들이 뇌물을 받고 불량부품 납품과 문서 위조를 눈감아주어 무려 97명이 검찰에 기소되는 대규모 원전비리 사건이 터졌다. 이런 비리의 소용돌이 속에서 운영되는 우리 원전들은 끊임없이 고장과 사고가 이어지고 있다.

이 원전들에 후쿠시마형 사고가 터지면 세월호 사고와는 비교도 안 될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원전이 집중되어 있는 경상남북도의 상당 지역이 방사능의 직접 영향권이다. 몇 십만 명이 방사능에 피폭될지 모를 일이다. 밀양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목숨을 바쳐 울부짖어온 것은 사실은 그들 개인의 땅 문제만이 아니라 가공할 방사능 재앙에 대해 우리 온 국민에게 던지는 예언적 경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자렛 노동자 가정에서 가난하게 사셨고, 수도 예루살렘보다 변방 갈릴래아에서 일하셨던 것은 세상에서 가장 가난하고 힘없는 노동자들, 이방인과 세리, 죄인과 창녀들에게 다가가 그들이 겪는 좌절과 실망과 고통을 함께 나누며 그들에게 해방과 위로를 주시려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성전 안에 조용히 머물러계시지 않았다. 예수님은 유다, 사마리아, 갈릴래아뿐만 아니라 이방인 마을도 찾아가시고, 농부와 어부, 목자와 노동자들 곁으로 다가가서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마태 11,28)고 하시며 세상 한복판에 들어가셨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고 그분의 제자로 살아가려면 오늘 눈물짓고 고통 받는 이들, 오늘의 가장 작은 이들 곁으로 다가서고 그들의 아픔과 한을 공유해야 한다. 이 가장 작은 이들의 희생을 밑거름으로 번영과 성장을 추구하는 세력에 대해서는 그 주체가 국가 권력이라고 해도 “아니요!”라고 거부하는 저항의 연대를 만들어가야 한다.

예수님은 가장 작은 이들의 배고픔과 목마름을 외면하고, 그들의 고통과 외로움에 무관심한 이들에게는, 영원한 불이 준비되어 있다고 경고하셨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