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환, 그와의 인터뷰는 이미 일주일 전에 예정되어 있었다. 약속을 잡고 이틀 후인 4월16일 세월호 사고가 터졌다. 의도하지 않게 세월호 사고 초기에 그와 인터뷰를 하게 된 것이다. ‘희망고문’으로 끝나버린 ‘에어포켓’이 이야기되고 실종자 생존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을 때였다. 

우연하게도 그는 희생자가 된 단원고 학생들과 같은 ‘안산시민’이다. 그가 운영하는 도시 텃밭인 ‘바람돌이 농장’도 경기도 안산시에 위치해 있다. 그는 “농장에 인적이 끊겼다”고 말했다. 얼마 전 심은 작물들에게 눈길을 줄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안산시민들의 분위기를 전했다. 그런 마음들이 어디 안산시민들뿐이었겠는가. 

서울의 한강 한가운데 위치한 노들섬의 텃밭에서 만나 오후 내내 그와 나눴던 이야기를 기자는 곧바로 정리할 수가 없었다. 대참사의 상황에서 ‘도시농부’에 관한 이야기는 살아있는 자의 한가한 ‘사치’로 느껴질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최소한 세월호의 모든 실종자들의 생사가 확인된 뒤 기사화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며 미뤘지만, 마음을 바꿨다. 세월호 사고를 통해 새삼 확인했듯 기업의 ‘돈벌이’와 정부관료들의 '먹이사슬'을 합리화하기 위해, ‘효율성’이라는 미명 하에 안전과 생명의 가치를 경시하는 한국사회에 생명과 사람을 말하는 ‘도시농부’이야기는 지금의 상황에서도 의미가 분명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세월호 희생자들을 애도하며, 머뭇거렸던 도시농부 전도사인 안철환의 인생과 도시농부에 관한 이야기를 지금 풀어놓는다. 

“노들섬을 개발한다고? 서울이 마냥 안전하기만 한 도시인가!”

외모가 어린이 애니메이션 '모래요정 바람돌이'를 연상시키는 안철환 대표는 두 다리가 불편한 장애인이다. 어릴 적 앓은 소아마비로 인해 목발이나 휠체어에 의지해서만 움직인다. 그가 300평이 넘는 텃밭농사를 짓고 있는 1급 도시농부라고 한다면, 누가 쉽게 믿을까. 그는 자기농사 짓는 것만으론 성에 차지 않았는지 불편한 몸으로 전국의 도시들을 누비며 도시농업의 중요성과 자신의 농법을 전파하고 다닌다. 그의 직함은 텃밭보급소 이사장이자, 도시농업시민협의회의 상임대표다.

   
 안철환 대표와 서울 한강 한가운데에 있는 노들섬 텃밭에서 만났다. 사진 = 윤성한 논설위원 
 
세월호 사고 때문에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있지만, 서울시장 선거에서 한강 노들섬의 텃밭은 선거 쟁점이 되고 있다. 정몽준, 김황식, 이혜훈 새누리당 서울시장 예비후보들은 앞다투어 노들섬 텃밭을 방문하고 개발공약을 내놓았다. 노들섬은 이명박 오세훈 등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소속 전임 시장들이 '오페라 하우스'를 짓겠다고 한 땅이다. 이 계획은 박 시장이 취임하면서 백지화됐다. 노들섬은 새누리당 후보들에겐 자당 소속 오세훈 전임시장의 ‘유산’이자 정치적 패배의 상징인 셈이다. 새누리당 소속 시장후보들은 박원순 현 시장이 '금싸라기' 땅을 ‘텃밭’으로 놀리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도시농업의 전문가인 안 대표에게 노들섬 텃밭 개발 문제를 첫 질문으로 던졌다.

“6.25 발발 직후 이승만 대통령은 서울을 지키겠다고 시민들에게 약속해 놓고선 하룻밤 사이에 시민들을 버리고 도망갔다. 노들섬이 바로 그 곳이다. 당시 이승만 정부는 저 한강다리를 폭파시켰다(한강다리는 노들섬을 교각 삼아 가로지르며 섬을 둘로 나누고 있다). 그렇게 대통령이 도망간 3개월 동안 서울시민들이 굶어죽지 않고 어떻게 살 수 있었나. 바로 ‘도시농업’ 덕분이었다. 세월호 사건을 보면서 우리 사회가 위기관리에 대한 준비가 안 되어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경험하고 있지 않은가. 노들섬을 개발한다고? 남북대치상황에서 서울이 마냥 안전하기만 한 도시인가? 위기관리가 경제적 가치로만 따질 문제가 아니다. 효율성만 생각해 땅들마다 건물로 다 채운다면 도시의 위기관리를 어떻게 하겠나. 농사짓는 도시로 가야 위기관리가 된다. 재난에 민감한 일본만 보더라도 도시의 주택가 에 텃밭이 많이 있다. 텃밭은 위기상황에서 도시의 생명을 연장하는 일종의 에어포켓이다. 1000억이 되든 1조가 되든, 땅값이 그렇게 중요한가.”

그는 노들섬의 텃밭은 오히려 서울의 자랑이 될 수 있는 ‘도시농업공원’으로 더욱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노들섬을 개발하겠다고 하는 정치인들은 아마도 부자들에게 지금의 텃밭은 서울의 땅값을 떨어뜨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아닌가 모르겠다. 그들은 서울의 브랜드 가치를 높혀 부동산 값 올려야 하는데 도시농업이 방해가 된다는 생각인 것이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생각이다. 도쿄, 뉴욕 등 세계적 도시들은 곳곳에 도시농업공원을 조성해 오히려 도시와 시민의 삶의 가치를 높이고 있다. 도시농업은 메트로폴리스의 세계적 트렌드가 되고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도시농부로는 백악관 앞마당에서 텃밭농사를 짓는 미국 오바마 대통령과 부인 미셀 오바마가 손꼽힌다. 한국의 한 경제지에서도 2014년 11가지 트랜드 중 8번째로 ‘도시농부’를 소개하기도 했다. 안전한 먹거리와 농사를 통한 놀이와 즐거움이 은퇴세대 뿐만이 아니라 젊은 세대에게도 지지를 받는 세계적인 트렌드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장애인’에다 ‘서울특별시’ 출생이란 농부로서 어울리지 않는 ‘핸디캡’을 가진 그가 어떻게 도시농부가 됐을까? 이 질문에 62년생인 그는 유년시절 서울의 모습을 떠올렸다. 당시 서울에는 소위 ‘4대문’안에서도 농사짓는 곳이 있을 만큼 농지가 많았다. 청와대 뒤편인 종로구 부암동에도 논이 있었다. 그가 주로 자란 장위동·종암동은 일대가 농지였다고 한다. 유원지가 된 ‘뚝섬’엔 퇴비용 ‘똥웅덩이’들이 곳곳에 있었다. 안 대표는 자신의 형이 그 ‘똥웅덩이’에 빠져 죽을 뻔한 적도 있었다고 기억했다. 서울내기였다고 농사를 모른다는 건 편견이란다. “어머니도 항상 심어먹었다.” 당시만 해도 ‘도시농업’은 서울시민들의 중요한 삶의 기반이자 일종의 ‘보험’ 같은 것이었다.

“지금 도시에서는 실직하면 삶이 추락하고, 어디 돌아갈 곳이 없다. 이전에는 고향이 있었지만, 지금 도시민들은 갈 곳 없는 위로태운 삶을 살고 있다. 자립기반을 시장주의자, 국가주의자들이 다 뺏어가 버렸다. 그런 점에서 농사는 위기상황에서 서민들의 자립기반이 되는 진짜 보험이다.”

그는 서울은 로마를 닮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시장의 효율과 경쟁을 최상위 가치로 여기는 ‘신자유주의’가 기승을 부리는 현대의 도시는 ‘로마’처럼 외부에서 빼앗아 먹지 않으면 살 수 없는 비자립적 존재라는 것이다.

“도시는 자기 똥조차 자기가 해결하지 않고, 남에게 갖다 버린다. 이런 비자립적 삶을 살기 위해, 또 주변지역을 비자립적으로 만들어버린다. 얼마 전 스페인을 다녀왔다. 로마의 지배가 농업을 올리버, 밀, 포도 등으로 단작화(하나의 작물만 집약적으로 재배하는)시켜놓았다. 가도 가도 한 작물의 밭이 지평선처럼 펼쳐졌다. 단작화는 집약적 노동을 필요로 한다. 상품을 위한 ‘단작화’는 사람을 돈의 노예로 만든다. 우리나라도 비슷한 사정이다. 우리농촌도 ‘단작화’하고 있다. ‘먹는’ 농사 안한다. 다 ‘파는’ 농사다. 농촌에서도 부식거리를 다 산다. 부식을 트럭에 싣고 돌아다니며 파는 장사가 시골에서 잘 된다. 도시와 시골 모두 자립 기반을 상실하고 있는 게 현대 사회다.”

인간을 존재케 하는 기본조건인 ‘먹거리’의 관점에서 대량생산과 소비를 목적으로 고도화된 인간의 조직화된 경제활동은 ‘생산력’을 비약적으로 높이는 사회시스템을 만들었을지 몰라도, 인간의 삶은 그에 반비례하여 점점 더 ‘구속’되어 간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 경제적 조건이 다르기에 그의 이야기가 모든 인류의 삶을 관통하는 원리일 수는 없겠지만, 한국사회처럼 절대 ‘빈곤’을 벗어나 빈부격차에 따른 상대적 ‘박탈감’과 그에 따른 ‘삶의 질’의 문제를 고민하는 사회 공동체와 인간 존재에게는 삶의 화두를 던지는 이야기라 여겨진다. 그가 말하는 ‘자립기반’이란 것도 절대적 기준이 아니라 ‘타’와 ‘아’의 삶의 질을 비교하는 상대적인 개념으로 보았을 때 말이다.

그런 점이 반영된 것인지, 도시민들도 ‘농업’에 대한 욕구가 큰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가 연구책임을 맡아 조사한 ‘2013년 서울시 도시농업 활성화 기반조성을 위한 실태조사 보고서’ 중 비도시농부 설문조사(서울 25개구 389명 대상 설문조사, 조사기간 2013년 10월 1~5일까지) 결과에 따르면, 도시농업을 하지 않고 있는 서울시민들 중 56.2%가 도시농업에 참가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반면 이들은 ‘텃밭’의 부족이나 접근성 문제로 ‘농사’욕구를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주변에 텃밭이 너무 멀거나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해서(44.2%)’ ‘땅을 구하기 위해 신청해도 기회가 돌아오기 어려워서(15.5%)’ 농사지을 땅이나 자재를 구하는데 비용이 많이 들어서(14.4%) 등으로 조사된 것이다.

“도시농사를 지으니, 세월이 갈수록 점점 부자가 된다”

그런데 근본적인 의문 하나. ‘도시농업’하면 비자립적 삶의 극복이 정말 가능한 것일까? 그의 대답이다. “몸부림이다.” 그는 이 대답을 하며 크게 웃었다. 몇 평의 ‘텃밭’으로 도시의 삶에서 자립적 삶이 가능하리라고 생각한다면 ‘미친 놈’소리 듣기 딱 알맞은 것을 그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가 ‘도시농업’을 미친듯이 전도하는 ‘몸부림’을 치는 데는 도시농사가 그의 삶에 가져다 준 선순환의 변화가 크기 때문이다.

   
안철환 대표의 웃는 모습을 보면 정말 '모래요정 바람돌이'를 닮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진= 윤성한 논설위원 
 
그는 농사짓기 전과 비교해 식비가 7~80%줄었고 한다. 텃밭에 심어 수확한 ‘채소’와 ‘열매’를 먹으며 식습관의 변화가 왔기 때문이다. “예전엔 시장가면 제일 먼저 사는 게 고기, 담배, 과자였다. 콜라, 과자 중독자였다. 담배도 하루에 두 갑 피웠다. 농사를 지으면서 싹 끊었다. 고기는 남이 주는 것만 먹는다(하하). 그러다 보니 거의 시장을 안 가게 됐다. 씀씀이가 확 줄었다.”

그는 소비가 ‘다이어트’되니 “세월이 갈수록 부자가 된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는 농사를 지으면서 휴가도 텃밭에서 하게 된다며 ‘소비절약’은 물론 텃밭은 ‘마음의 휴식처’가 된다 말한다. “휴가 갔다 돌아오면 왠지 공허하지 않느냐. 텃밭에서 일하면 마음이 뿌듯하다. 흙냄새 맡으면 마음이 편해진다. 작물은 집에서 키우는 화초하고도 다르다. 화초와 달리 자라는 게 보인다. 생노병사하는 생명의 즐거움을 알게 된다. ” 그는 지인들에게 부부싸움하고 나면 밭에 가라고 권유한다. 텃밭에 나가 풀도 뽑고 호미질하다 보면 화난 마음을 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좋아하는 ‘농사와 농부’에 대해 그가 처음부터 관심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그는 남보다 불편한 몸이었지만 30대까지 “좋은 세상 만들어보겠다”는 젊은 뜻으로 ‘학생운동’, ‘노동운동지원’, ‘통일운동’ 등 갖가지 사회운동을 섭렵했다. 그러다가 그가 직장으로 잡은 곳이 ‘소나무 출판사’. 사회운동하며 결혼도 못하고 있던 그를 출판사를 하던 선배가 일 배우며 '입벌이'라도 하라며 불렀다. 그 출판사에서 기획했던 책에서 ‘농사’에 대한 그의 마음이 싹트기 시작했다. 두밀리 자연학교의 설립자이자, 장기려 박사와 청십자운동을 했던 ‘ET할아버지’ 채규철 씨의 ‘ET할아버지와 두밀리 자연학교’(소나무)가 바로 그가 제작한 책이다.

97년 IMF직전, 다니던 출판사를 나온 후 잠깐 방황했던 그의 마음을 다시 붙잡았던 ‘화두’ 역시 농사에 관한 책 만들기였다. 사람의 운명이 대개 그렇듯이 ‘뜻’과 ‘인연’이 조우하여 궁합이 맞으면 인생의 길은 그렇게 정해져 가는 것이다. 그가 자료수집 차 들렀던 전국귀농운동본부에서 과거 사회운동으로 인연을 맺었던 후배를 만났다. 그의 뜻은 ‘물’을 만난 것이다. 그는 전국귀농운동본부에서 ‘귀농통문’이란 계간지 제작을 요청받았고, 그것이 밑거름이 되어 그가 출판기획자로서 자랑하는 또 하나의 농부책 ‘귀농, 아름다운 삶을 찾아서’(99년, 전국귀농본부 엮음)를 만들었다. ‘귀농, 아름다운 삶을 찾아서’는 귀농인들을 위한 가이드로는 일종의 ‘바이블’과 같은 책이다. 지금도 ‘귀농 길라잡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돼 꾸준히 읽히고 있다.

"농사는 오히려 도시가 절박할 수 있다" 

그 즈음이었다. 그의 ‘농심’은 책속의 활자에만 머물지 않았다. 진짜 ‘농사’를 시작했다. 처음 한 농사는 3평짜리 주말농장. 그는 그기에서 배추 씨가 싹을 틔운 것을 보고 신기한 체험을 했다고 한다. “심은 지 3일 만에 싹을 틔운 배추를 보고 미쳐 버렸다. 얼마나 신기하던지, 무당에게 신 내리는 게 바로 이런 것이구나! 배추 씨 안에 누군가 있었구나 하는 그런 느낌이었다” 그 후 그는 자신의 몸이 불편하다는 사실을 싹 잊어버릴 정도로 농사에 재미를 붙였다.

그래서 다음 해에 일을 저질렀다. “세평이 너무 답답해 보였어요. 그래서 좀 더 넓은 땅을 찾다보니...” 무려 800평의 밭을 임대한 것이다. 물론 혼자 다 지은 것은 아니었다. 8명의 사람들을 조직하고 각자가 100평씩 짓기로 했다. “그 밭에서 미친 듯이 살았다. 도시락·라면·막걸리를 싸들고 완전히 농사의 즐거움에 빠졌었다” 그렇게 한해를 보내고 부인을 설득하키로 했다. 집 사기로 모아둔 돈으로 밭을 사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질렀다. 400평의 밭. 지금 바람돌이 농장이 된 땅이다.

그의 부인이 몸이 불편한 그에게 밭을 사는 걸 허락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의 물음에 부인의 답은 이랬다. “농사를 지으면서 당신이 바뀌더라.” 그를 만나본 사람은 알겠지만. 그는 재미있는 이야기꾼이다. 얼굴표정마저 익살스럽다. 잘 웃는 ‘해보’다. 하지만 부인의 눈엔 연애하며 웃음 많던 그 ‘해보’가 직장생활 하면서 웃음이 사라졌다. 그랬던 그가 농사를 지으면서 다시 ‘해보’가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부인의 마음까지 얻었으니, 그후 그의 텃밭욕심은 ‘확장’일로였다. 지금의 안산 ‘바람돌이’ 농장은 2000평까지 늘어났다. 물론 본인이 추가로 매입한 땅은 200평뿐이고 나머지 1400평은 빌렸다. 이런 ‘초대형’ 텃밭은 녹지가 50%가 넘는 수도권의 위성도시 안산시이기에 가능했다. 텃밭욕심이 발동하면서 그는 농사만 짓고 살았다. 그러길 4년. 40여종에 이르는 다양한 밭작물을 심어보았다. 현재 그가 전파하고 있는 텃밭농법 ‘호미 하나로 농사짓기’의 전부를 그 때 다 익혔다고 한다. 하지만 사람들과 어울리길 좋아하는 그가 아무리 농사에 미쳤어도 홀로 산속 밭에만 있으려니 얼마나 심심했겠는가. “도 닦는 것도 아니고(하하)...매일 아는 사람 안 올라오나. 그런 생각이 들고...그러던 어느 날 연락이 왔다.”

2004년 전국귀농운동본부에서 귀농인들 대상으로 그에게 현장실습을 부탁해왔고, 이어 안산의 환경운동단체에서 회원들을 상대로 텃밭교육을 요청한 것이다. 그때 그는 그냥 ‘농부’와 ‘도시농부’가 다르다는 인식을 하게 됐다. 현장실습을 진행하다 보니 귀농실습생들은 귀농일정이 생기면, 실습 중간에도 작물을 두고 떠나게 되는 반면 텃밭교육을 받던 도시농부들은 작물의 ‘생로병사’를 끝까지 함께했다는 것이다. “도시농부들이 열심히하는 모습을 보며 오히려 농사는 도시가 더 절박하게 느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가 번역한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 고 노무현 대통령이 좋아했던 책  

그 즈음, 그는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작가 요시다 타로, 들녘)이란 책을 번역한다. 번역자를 구하려했지만 도시농업에 관한 이야기를 잘 번역해 낼 작가를 끝내 구하지 못하자, 본인이 직접 번역을 하기로 한 것이었다. 그가 번역한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은 노무현 대통령이 좋아했던 책 중의 하나이자 ‘봉하마을’ 운영하는 데 영감을 준 책으로도 잘 알려진 책이다. 이 책은 미국의 봉쇄정책과 구 소련의 해체 등으로 경제위기에 봉착한 쿠바의 수도 아바나의 시민들이 유기농법의 도시농업으로 삶의 위기를 헤쳐나간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의 부인은 책을 번역하던 그에게 “당신이 하는 게 그게 도시농업이야”라고 말했다고 한다. 부인의 말에 그는 “시골 가자는 말 할까봐 무서워 ‘도시’를 강조하는 거지”라고 웃어넘겼지만, 이미 그는 대한민국의 도시농업이 삶의 일부가 되는 그런 도시로 만들고 싶은 ‘도시농업운동’의 길로 깊숙히 들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서울 노들섬 텃밭 중 일부. 600여 시민들이 서울시로부터 1년간 분양받아 텃밭농사를 짓고 있다. 
 
당시 전국귀농운동본부(본부장 이병철)과 인드라망생명공동체(이사장 도법스님)이 공동개최한 귀농토론회에서 그는 도시농업에 대해 발표하는 기회를 가졌는데, 그 반응이 뜨거웠다. 그 발표를 듣고 도법스님과 이병철 본부장이 ‘도시농업운동’을 기획해 보라고 강력하게 권유(?)했다는 것이다. 그는 평소 관심이 많았던 유기순환 농법인 전통농법을 접목한 그만의 ‘도시농업’을 고민해 다음해인 2005년도에 보고서를 내놓았고, 본격적인 도시농업운동 활동가의 길로 들어섰다. 그는 전국귀농운동본부에서 도시농업위원회 위원장을 맡게 된다. ‘농부책 출판기획자’에서 ‘텃밭농부’로 다시 ‘도시농업운동가’로 ‘도시농부’로서 그의 인생은 점점 더 넓어지고 깊어졌다. 그리고 2010년 ‘도시농부운동’은 전국귀농운동본부에서 독립하게 된다. 그게 지금 그가 이사장을 맡고 있는 ‘텃밭보급소’다. 텃밭보급소는 ‘도시농업’에 대한 책도 내고, ‘교육’도 진행하는 상시적인 도시농업운동 조직이다.

그가 상임대표를 맡고 있는 도시농업시민협의회는 도시농업운동을 하는 40여개 전국단체와 서울·대구·광주·인천·부산 등 5개 지역연합회로 구성돼 있다. 도시농업시민협의회는 도시농업 활성화를 위한 대정부, 입법 등 정책대응 활동에 주력하고 있다. 최근 가장 주력하고 있는 활동은 도시계획법과 농지법 개정운동. 도시를 계획할 때 일정면적 이상의 농지를 확보해 도시의 식량공급위기상황에 상시적으로 대비하는 시스템을 갖추자는 취지다. 도시계획법상 개발유보지로 분류된 생산녹지에 보금자리 등 아파트만 자꾸 지는 등 농지를 훼손하는 것을 제한해보자는 주장이다. 만약 불가피하게 개발하게 된다고 해도 농지총량제의 개념을 도입해 일정 면적 이상의 도시농지를 보존하자는 것이다. 이와함께 보존되는 도시농지에 시민들이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하는 법 제도와 정책환경을 만드는 활동도 병행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그와 도시농업시민협의회에게 현재 서울시가 운영 중인 노들섬 텃밭은 상징적인 장소이자 정책이다.

"300평 농사짓는 프로 도시농부 만들기에 도전한다"  

앞으로 도시농부전도사로서의 그의 욕심은 무엇일까? “300평 농사짓는 ‘프로’도시농부 만들기” 도시농부가 도시적 삶의 대안 중 하나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는 게 요즘 그의 머릿속에서 자리잡은 욕심이다. 자자체 등과 연계해 지역공동체에 안전한 먹거리를 제공하면서도 농사가 궁극에는 일자리도 될 수 있는 도시농부를 육성하고 싶다는 것이다. 일본 요코하마시를 그 사례를 제시했다. 요코하마 지역 젊은이들이 직장생활하면서 일정규모의 농사를 짓다가 나중에는 노령화되고 공동화되는 요코하마시 외곽의 농촌마을로 들어가 자연스럽게 전업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그의 인생에서 가장 성공한 농사는 뭐였을까? 두 다리가 불편한 장애를 가졌던 그에게 어머니가 어린 시절부터 말했던 인생 농사법이 하나가 있었다고 한다. “여자는 순진할 때 꼬셔라(하하).” 사람농사법이다. 그는 순수했던 대학시절 사귄 후배와 10년의 연애 끝에 결혼했다. 전두환 정권시절 운동권 내의 연애는 일종의 금기였지만, 그의 말대로 그는 ‘호박씨’를 까며 부인과 결혼이라는 “내 인생 최대의 성과”를 냈다.  

사람의 인생에서 ‘사람’ 농사만큼 귀한 농사가 또 어디 있겠는가. 도시농부 전도사 안철환 대표는 ‘도시농부’만들기란 사람 농사를 지으려 오늘도 두팔엔 ‘목발’을, 머리 속엔 ‘호미’를 갖고 전국의 도시를 돌아 다닌다.

   
 서울 노들섬 텃밭 중 일부. 600여 시민들이 서울시로부터 1년간 분양받아 텃밭농사를 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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