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에 발표한 칼럼 <세월호 침몰 사고, 음악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가 공개된 후 적지 않은 지지와 반론이 이어지면서 논쟁이 진행되었다. 논쟁은 뮤지션 이이언(@eaeon)의 반론으로 촉발되었다. 이이언과 내가 의견을 주고 받았고 뮤지션이자 비평가인 미묘(@mimyo)와 디제이 디구루(@djdguru)의 의견이 더해지면서 논쟁이 확대되었다. 음악 기획자인 하박국(@havaqquq)은 논쟁 과정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게 정리해서 논쟁을 알리는데 기여했다. 이후 미묘가 의견을 덧붙였고, 나도 SNS를 통해 의견을 보완했다. 여러 네티즌과 음악 관계자들 역시 의견을 더하면서 적지 않은 이들이 논쟁에 참여하거나 지켜보았다. 현재 논쟁은 더 이상 확대되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논쟁의 당사자로서 의견을 보완할 필요성이 있다고 느낀다. 어리석게도 했던 얘기를 되풀이 할 수도 있고, 의견을 보완해도 서로의 의견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수도 있어서 의미 없는 일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첫번째 글에서 충분한 설명이 되지 않아 다소 강압적으로 느껴지거나 논리의 비약처럼 느껴진 부분이 있고, SNS에서 이어진 논쟁이나 반응들이 지나치게 그 부분에만 집중된 면이 있다. 덕분에 논쟁이 생산적으로 발전되지 못한 것이 아쉽다.

가장 많은 반론은 세월호 침몰 사고가 뮤지션들의 직접적인 책임 때문인 것처럼 과장하고, 모든 음악이 사회적으로 발언해야 한다고 강요한다는 지적이었다. 그렇게 느꼈다면 내 문제의식을 정확하게 읽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문제의식을 정확하고 섬세하게 표현하지 못한 탓도 적지 않을 것이다.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뮤지션들이 그동안 사회적인 발언을 하지 않았던 것이 세월호 침몰 사고의 직접적인 원인이라는 얘기가 아니었다. 세월호 침몰 사고 이후 많은 이들이 정치라는 것이 우리 삶과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닌데도, 자신은 정치와 무관하게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한국 사회의 현실에 대해 눈 감고 살아온 자신의 무관심과 몰이해 때문에 이번 사고가 벌어졌다고 자성하지 않았던가. 마찬가지로 음악계에서도 음악이 기본적으로 정치적일 수밖에 없고 음악을 한다는 것 자체가 사회적 참여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함으로써, 음악 혹은 음악적 행위로 할 수 있고 해야 할 역할을 충분히 다하지 못한 것이 세월호 침몰 사고가 일어나고 지금처럼 어이없는 일이 연속적으로 벌어지는 사회가 되는데 일조한 것 아닌가 하는 문제의식이었다. 당위적으로 무엇을 하든 안하든 이미 음악은 정치적인데 비판적인 메시지를 발언하면 순수하지 못한 것이라고, 음악을 당위적으로 이용한다고 오해하면서 정작 자신의 음악은 이미 정치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거나 모른 체 한 이들이 너무 많았던 것 아니었나 싶은 것이다. 그 결과 우리 사회의 많은 음악들이 음악의 순수성이라는 은폐된 정치성쪽에 더 집중되는 바람에 음악의 지향이 다양해지고 음악을 통해 우리 사회를 보다 건강한 방향으로 끌고 갈 수 있는 가능성을 놓쳐버렸다는 것이 나의 문제의식이었다. 바로 그 지점이 세월호 침몰 사고를 거치며 음악계에서 짚어봐야 할 자기 반성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했다.

   
▲ 진도 팽목항 주위에 세월호 실종자들의 무사 귀한을 바라는 노란리본이 매달려 있다. 사진=진도 팽목항 김병철 기자
 
인간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가족, 사회, 정치, 국가 등 크고 작은 시스템과 물질적 조건들, 이데올로기들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 사회 체제와 시스템은 체제와 시스템 안의 모든 것을 규정한다. 그래서 어떤 것도 태어나고 존재하는 순간부터 정치적이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도 음악인들 가운데 상당수는 삶과 음악의 근본 조건을 제대로 인식하고 성찰하기보다는 음악을 사회와 분리된 예술가 개인의 개별 행위로만 인식해버렸다. 그 결과 많은 이들에게 음악은 지극히 사적이거나 한정된 감성과 세계만을 다루는 사적 행위가 되었고, 음악과 음악적 행위는 예술가의 자유만으로 오인되었다. 한국의 지배 체제가 그러한 인식을 부추기고 강요한 부분도 분명히 있다.

음악이 정치적일수밖에 없기 때문에 반드시 정치적인 메시지를 다루라는 얘기가 아니다. 자신의 음악이 이 사회에서 어떻게 존재하고 기능하는지를 알고 음악을 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자신의 음악이 기본적으로 정치적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안다면 자신의 음악과 음악적 행위도 지금과는 분명 다를 수밖에 없다는 의미이다. 그럼에도 서정적인 음악을 하든, 현실참여적인 음악을 하든 그것은 본인의 자유이다. 그리고 직접적으로 표현하거나 참여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방식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당대의 사회적 현실을 드러내거나 개입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생산되는 많은 음악과 음악적 행위들은 음악이 기본적으로 정치적일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순수와 자유, 음악적 아름다움이라는 논리에만 갇혀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그런 음악이 훨씬 많기 때문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도 어떠한 의견을 내거나 의도적인 시도를 해서는 안되는 것일까? 물론 창작자의 자율성이 억압되어서는 곤란하다. 그러나 창작자의 자율성은 순수하기만 한 것이고, 신성불가침의 영역일까? 동의하지 않고 하기 싫은 얘기를 의무적으로 하라는 얘기가 아니다. 최소한 음악이 존재하는 조건을 들여다 보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지금처럼 잘 팔리기 위해 기획하듯 짜맞춰서 만드는 음악들이 다수인 상황에서 음악에 아무런 의도가 없다고만 말할 수는 없다. 상품으로 기획된 음악의 의도는 순수한 것이지만, 음악이 정치적일수밖에 없음을 인식하고 자신의 음악이 이 사회에서 어떻게 기능할지를 고민하거나, 긍정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주장은 당위성을 강요한다고 반응하는 것은 너무나 편파적이다.

예술 자체가 사회적 조건과의 긴장 때문에 자율성과 당위성 사이에 존재하고 있다. 자율성과 당위성 가운데 하나만으로는 존재할 수 없다. 그렇다면 현재의 예술이 자율성만으로 존재할 수 없게 만드는 현실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예술의 자율성을 잃지 않으려고 당위적으로 노력하면서도 예술이 가질 수밖에 없는 정치성을 인식하고 자신의 음악이나 행위가 놓여질 사회적 의미망을 고민하는 것이야말로 음악을 지나치게 사적이지 않게 만들고, 지나치게 당위적이지 않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예술의 근본적 정치성을 이해하면서도 예술적 독자성을 지키는 한 가지 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현재 한국의 대중음악은 지나치게 한정된 내적 자율성에만 치우쳐 있다. 음악의 사회적 의미를 인식하고 고민하는 이들은 인디 신의 일부와 민중가요 진영만으로 보인다. 나의 주장은 이러한 흐름이 균형을 잡았으면 좋겠다는 의미였다.

그럼에도 어느 쪽을 선택하는지는 예술가 본인의 자유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세월호 참사 같은 사고가 반복되고 더욱 커지는 것은 다른 영역에서와 마찬가지로 필연적 정치성을 외면하고, 자율성에 기반한 대응만 하는 것으로는 더 이상 희망을 찾을 수 없다는 증거가 아닐까? 음악계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적으로 자율적이고 개별적인 태도를 취한 이들이 많았는데도 우리 사회의 병폐가 해결되지 않고 갈수록 심각해졌지 않은가. 그렇다면 지금까지 다수가 취했던 태도 자체에 대한 반성이 필요한 것 아닐까? 부족했던 것은 자유로운 선택이 아니라 음악의 사회적 맥락과 역할을 고민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물론 음악의 정치성을 이해하고 적극적으로 개입하려는 뮤지션들이 많았다고 세월호 침몰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그런 사회라면 세월호 같은 사고가 일어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줄지 않았을까? 하다 못해 사후 대응이 이렇게 어이없게만 이어지지는 않지 않았을까? 음악이 할 수 있는 순기능이 한두가지가 아니지만 자신의 음악과 음악적 행위가 발휘할 수 있는 사회적 역할을 풍부하게 고민하고 실천하는 이들이 많은 사회가 그러지 않은 사회보다 더 좋은 사회 쪽에 가까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최소한 가능성이라도 더 많은 사회라고 생각한다. 정치에 대해 직접 노래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음악이 만들어내는 사회적 효과를 냉정하게 성찰하는 음악, 사랑 얘기를 하면서도 정치 얘기도 하는, 그 둘을 지나치게 분리하지 않는 뮤지션, 사회와 역사와 정치가 자신의 삶과 관계를 맺는 다양한 양상에 주목하면서 음악이 표현하는 세계의 폭을 넓히는 뮤지션, 노래로 표현하지 않더라도 다른 식의 행동으로 표현하는 뮤지션이 지금보다 더 늘어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오해를 덜기 위해 다시 말하지만 음악이 사회적으로 참여하는 방식은 굉장히 다양하다. 창작자가 정치적인 의식을 가지고 작품을 만들어야만 정치적인 효과를 발생시키는 것이 아니다. 사회적인 의미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작품을 만드는 것만이 사회적으로 참여하는 유일한 방식도 아니다. 그래서 음악이 정치와 만날 수 있는 방식이 얼마든지 다양할 수 있다거나, 협소한 방식만 지나치게 강요해서는 안된다는 의견에는 적극 동의한다. 그러나 무조건 음악은 순수해야 하고, 음악가 개인의 자유에만 맡겨야 한다면 음악의 존재 자체가 필연적으로 정치적이고, 그동안의 지나친 자율성이 세월호 침몰 사고 같은 부정적인 현실을 축적하는데 일조했다고 생각하기에 동의하기 어렵다. 지나친 목적 예술이 위험하다면 지나친 자율성과 순수주의도 위험하다. 우리에게 지나친 것은 전자가 아니라 후자이다.

만약 한국의 음악이나 음악적 행위가 지금까지 해왔던 것과 달라지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면 더 할 수 있는 얘기가 별로 없다. 그러나 음악의 필연적 정치성을 이해하고, 세월호 침몰 사고에 우리 모두 직간접적인 책임이 있으며, 이제는 지금과는 다른 삶의 방식과 행동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 한 개인으로서만이 아니라 음악과 음악인으로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제는 음악이 어떠한 역할을 어떻게 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 했으면 한다. 어떻게 해야 음악의 근본적 정치성과 사회적 역할을 인식하고 행동하면서도 예술의 자율성이 훼손되지 않을 수 있는지로 논의가 확대되어도 좋을 것이다. 어떻게 해야 음악의 사회적 개입 방식이 예전보다 진화할 수 있는지 얘기해보고, 왜 그런 인식과 논의가 적은지를 음악 산업 구조적으로 분석해볼 필요도 있을 것이다. 나는 음악에 대한 이해와 음악을 통한 행동 가능성의 상상력을 풍부하게 확장하고 싶다. 그리고 나의 글이 논의와 상상의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첫 번째 글에서 이러한 의도와 맥락이 충분히 부각되지 못하고 세월호 침몰 사고가 뮤지션들의 책임이며, 무조건 정치적인 작품을 발표하라는 식으로 오해될 여지를 주었던 것은 섬세하고 정확하고 풍부하게 쓰지 못한 나의 책임이다.

논쟁의 와중에도 벌써 뮤지션들은 움직이고 있다. 4월 25일 광화문 광장에서 가야금을 연주하며 일인시위를 벌인 모던가야그머 정민아, 홍대입구역 앞에서 일인시위를 벌인 뮤지션 연리목, 버스킹 공연을 펼친 뮤지션 유니온의 사례가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반드시 일인시위나 공연을 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어느 단체나 조직이 움직이기를 기다리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했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예를 든 것이다. 온라인으로 추모곡을 발표하고 있는 뮤지션들 역시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존 삶의 방식을 똑같이 유지하지 않는 용기이다. 세월호 참사로 확인된 한국 사회의 총체적 침몰에 자신의 삶을 비춰보고, 자신의 삶이 존재하는 현장에서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고, 자신이 해오거나 할 수 있는 일로 개입해야 할 부분은 없는지 따져보는 것, 그 이야기를 서로 나누는 것, 그리고 실제로 해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삶과 사회의 필연적 연관관계를 인식하고, 반성하고, 다른 삶의 방식을 고민하지 않는다면 또 다른 대형 참사가 다시 일어나지 말라는 보장이 없을 것이다. 자신의 삶을 완전히 바꾸지는 않더라도 조금이라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한다. 음악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런 얘기마저 할 수 없고 이마저 당위의 강요로만 여겨지지 않기를 바란다. 그럼에도 부족한 부분은 부디 더 많은 이들의 이야기와 행동으로 채워지고 극복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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