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 엄청난 사고다. 여객선 세월호 침몰 사고. 4월 21일 화요일 현재 탑승자 476명 가운데 174명만 구조되었고, 113명의 죽음이 확인되었지만 여전히 189명의 생사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죽음 하나하나 아프지 않고 안타깝지 않은 사연이 있을까만 한 생을 다 누려보지도 못한 고등학생들의 숱한 죽음은 특히 많은 이들을 망연자실하게 하고 있다. 게다가 사고가 일어나기 전부터 사고가 일어난 순간, 그리고 사고 이후 현재까지 벌어지는 모든 일들은 가히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경우를 모두 모아서 보여주는 것만 같다.

그래서 세월호 침몰 사고는 이 땅에서 살아가는 모든 이들을 한없이 절망하게 하고 있다. 일제 식민통치와 한국전쟁, 독재를 거친 저개발 독재국가에서 산업화와 민주화를 비교적 성공적으로 이끈 나라로 발전했다는 자부심, GNP·GDP 수치와 각종 스포츠 대회에서의 우수한 성적, 한류 열풍 같은 것들로 확인된 자부심은 이번 사고로 완전히 무너졌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국가에 대한 신뢰, 정치와 언론을 비롯한 공공영역에 대한 신뢰는 땅에 떨어졌고, 모든 국민들이 트라우마 같은 충격과 슬픔과 불신과 회의를 호소하고 있는 지경이다.

이러한 때에 새로 나온 음반 이야기, 공연 이야기를 할 자신이 없다. 어쩔 수 없이 쓰려고 마음 먹었던 음반 이야기를 조용히 밀어놓았다. 대중음악계 역시 마찬가지이다. 예정되었던 음원 발표, 크고 작은 콘서트와 페스티벌들이 줄줄이 취소되거나 연기되었다. ‘그린플러그드 서울 2014’, ‘월드 DJ 페스티벌’을 비롯한 상반기의 대표적인 음악 페스티벌들만이 아니다. EBS Space 공감을 비롯한 일상적인 공연들도 일시 중단된 상황이다. 물론 모든 음악 관련 행사들이 연기되고 취소된 것은 아니지만 지금은 차분히 음악을 들으며 즐거워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러한 때에 음악을 통해 더 큰 위로를 받을 수는 없겠느냐는 얘기도 있지만 지금은 눈 앞에 펼쳐진 비극과 아비규환의 무게를 감당하기도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음악인들 역시 이 슬픔과 무능의 지옥 같은 풍경을 묵묵히 지켜봐야 할 때일 수 있지만 과연 그것만이 음악이 할 수 있는 전부일까. 과연 음악은 이러한 비극 앞에서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해야 할까.

   
▲ 세월호 침몰 사건 6일째인 21일 오후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고잔동 문화광장에서 실종자들의 무사귀환을 바라는 시민들이 촛불을 태우고 있다. ⓒ 연합뉴스
 
지금 음악은 어쩌면 “아우슈비츠 이후에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라고 했던 아도르노의 선언에 귀를 기울여야 할지도 모르겠다. 분명 시간이 흐르면 사건이 조금씩 마무리 될 것이고, 조금씩 더 많은 음악이 요청될 것이다. 지금도 실종자와 사망자의 소식을 알리는 뉴스에는 비감하고 비극적인 음악들이 BGM으로 흘러나오며 보는 이들의 감정적 울림을 증폭시키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지금 음악이 해야 할 일은 이렇게 벌어진 참극과 희생의 상태를 강조하는 BGM일까. 아니, 결코 그렇지 않다. 그것이야말로 아도르노가 말한 야만이다.

이런 식의 BGM은 결국 사고의 피해자를 지극히 감정적으로 소모하게 만들 뿐이다. 연일 이어지는 뉴스 속보 역시 대부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사고가 마무리 된 다음, 희생자들을 위로한다는 미명 아래 어설픈 위로와 연민으로 점철된 음악을 만들어서는 안된다. 희생자들을 위로하고 상처 받은 이들을 어루만지지 말자는 얘기가 아니다. 지금 세월호에 탔던 사람들과 이들의 가족 및 친지, 그리고 모든 국민들이 깊은 내상을 입었지만 그들을 위로하고 감싼다는 미명 아래 어설픈 봉합을 시도해서는 안된다는 이야기다. 당연히 갑자기 세상을 떠나버린 이들을 그리워하고, 위로하고, 상처받은 이들을 다독여야겠지만 음악이 거기서 멈춰버린다면, 그렇게 음악이 어설픈 치유와 통합의 들러리가 된다면 세상은 하나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미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사건을 통해 우린 이 곳이 아비규환 지옥임을 확인했다. 이런 현실에서 필요한 것은 냉정과 증오이다. 과연 누가 이러한 현실을 만들었는가. 안전행정부라고 부처의 이름까지 바꾸며 국민의 안전을 챙기겠다고 했지만 결국 무능만을 드러낸 박근혜 정부, 제대로 감시하고 관리하고 감독해야 할 역할을 하지 않았으며 위기 앞에서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관료체제, 제 역할을 하지 않은 세월호 관계자들, 진실을 말하기는 커녕 속보 경쟁에 급급해 확인되지도 않은 보도를 남발했던 언론. 사건의 원인을 따지고 들어가면 한도 끝도 없을 것인데 분명한 것은 우리가 지금껏 구축한 한국이라는 나라의 시스템이 지극히 허술하고 엉망이었으며 우리 모두가 어떤 식으로든 책임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음악이 이러한 문제의 원인을 냉정하게 직시하지 않고, 잘못되고 썩어빠진 것들을 증오하지 않고, 그저 슬픔만을 강조하며 사건의 비극성만을 확대재생산하는 BGM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오늘 음악이 할 일은, 음악인이 할 일은 단지 SNS에 답답함을 토로하고 명복을 빈다고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눈물을 뚝뚝 떨구게 하는 슬픈 노래를 만드는 일이 아니다. 부디 슬픔으로 도망가지 말자. 고통을 스펙타클처럼 전시하며 소비하지 말고, 고통의 근원으로 다가가야 한다. 무엇보다 사건과 현실을 정직하게 바라보고 이유와 근원이 무엇인지, 이유와 근원으로부터 우리 자신은 얼마나 가까운지 성찰해야 한다. 그리고 미워할 것들을 미워하고 증오할 것들을 증오해야 한다. 바로 그러한 작업을 음악을 통해 표현함으로써 오늘을 직시하고 기록하고 고발해야 한다.

음악은 뉴스가 아니고 칼럼이 아니고 사설이 아니고 보고서가 아니고 영화도 아니고 문학도 아니지만 그래서 음악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믿는다. 가령 정태춘이 <아, 대한민국> 음반에 담은 '우리들의 죽음'을 통해 맞벌이 영세 서민 부부 자녀의 죽음을 노래함으로써 우리는 그 아이들의 죽음을 슬퍼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들이 그렇게 밖에서 방문을 잠근 방 안에서 놀 수밖에 없게 만든 우리 사회의 불평등을 처절하게 증오하게 되고, 우리의 침묵을 비겁으로 인식하게 된 것처럼 오늘의 음악 역시 세월호의 참극에 답해야 한다. 우리 삶의 무기력과 패배감과 모멸감의 원인이 무엇인지, 이 나라가 언제 어떻게 이렇게 나라도 아닌, 나라를 빙자한 지옥이 되어버렸는지 말해야 한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말해야 한다. 바로 자신의 언어, 자신의 음악으로 말이다.

어쩌면 세월호 침몰 사고가 일어난 것은 그렇게 음악으로 말해야 할 것들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음악으로 세상을 노래하는 것이 정치적이라며 피하고, 한정된 순수와 낭만만을 담으려 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외면하고 도망간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세월호 침몰 사고 이후에도 서정시만 쓰고, 낭만만 노래한다면 그 시, 그 노래 읽고 싶지 않고 듣고 싶지 않다. 음악은 정치가 아니지만 우리의 삶은 결코 정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모든 음악이 다 현실의 문제를 노래할 필요는 없지만 오늘의 남루와 비참과 불의를 직시하지 않고, 사유하지 않고, 대결하지 않는 세상에 올바른 세상이, 희망이, 대안이 데우스 엑스 마키나처럼 나타날 리는 만무하다. 문제는 시대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이다. 음악 역시 그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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