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췌하기가 이를 데 없는 한 사내가 생을 마감하려 절벽 위에서 푸르디푸른 오키나와의 바다밑으로 뛰어내린다. 2012년 방송된 일본 동경방송(TBS)의 10부작 드라마 <운명의 인간>의 첫 장면이다. 바다로 뛰어든 이 사내는 다름 아닌 일본 최대신문 ‘마이초’의 국회반장이자 최고의 민완기자였던 요미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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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명의 인간 화면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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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일본 총리 사하시가 미국과 맺은 오키나와 반환 밀약의 진실을 숨기고 국민을 속이려 하자, 민완기자의 수완으로 이를 파헤치려 한다. 초반전 잇따른 특종으로 사하시 총리를 궁지에 몰아넣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권력은 궁지에 몰리면 몰릴수록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법. 결국 유미나리는 사하시의 ‘역공’에 걸려든다. ‘정의’의 대가는 혹독하다. 결국 유미나리는 회사도, 가족도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잃게 된다.
이 드라마에선 ‘권력’이 자신에게 도전하는 ‘저항적’ 엘리트에 역공을 가하는 가장 치사하고 효과적인 방법이 나온다. 드라마를 보면서 주인공 유미나리 기자의 얼굴 위에 채동욱 전 검찰총장의 얼굴이 ‘오버랩’ 되는 이유였다. 사하시 총리는 경찰과 검찰을 동원해 요미나리를 ‘불륜남’으로 몰아간다. 사건이 전개될수록 국민을 속인 권력의 ‘치부’는 국민의 뇌리 속에서 사라지고 그 치부를 고발하려 한 엘리트 기자의 ‘불륜’에 대한 말초적 흥미만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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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명의 인간 화면 갈무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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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운명의 인간>은 작가의 상상력으로만 만들어진 허구의 이야기가 아니다. 1971년 실제 일본에서 있었던 ‘니시야마’ 사건을 소재로 삼은 동명의 소설 ‘운명의 인간’을 원작으로 한다. 이 소설의 작가 ‘야마사키 도요코’는 2007년 MBC드라마로 만들어져 시청자들의 눈길을 사로 잡았던 <하얀거탑>의 원 작가로 한국에서 더 잘 알려져 있다. <하얀 거탑>에서 보았듯, 권력의 냉혹함, 인간 군상들의 다양한 욕망과 양심에 대한 문제의식을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녹여내는 작가의 역량은 <운명의 인간>에서도 여과 없이 드러난다.
‘니시야마 사건’은 마이니치 신문의 니시야마 기자가 미국이 오키나와를 반환하면서 지불하기로 한 오키나와 원상회복 비용을 일본정부가 비밀리에 떠맡기로 한 사실을 폭로하면서 시작된다. 니시야마는 관련 사실을 증빙하는 문서의 복사본을 외무성의 여성사무관을 통해 입수했고, 관련 내용을 기사화했다. 그런데 그가 사회당 의원에게 건넨 그 문서가 국회에서 공개되면서 그와 정보원은 궁지에 몰리게 된다. 정부는 관련 사실을 전면 부인했고, 오히려 문서유출자 색출에 나선 것이다. 결국 니시야마 기자와 정보원인 여성사무관은 국가공무원법 비밀준수 위반혐의로 기소 당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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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명의 인간 화면 갈무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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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소속사인 마이니치 신문은 정부가 국민의 알권리를 훼손하고 있다고 대정부 투쟁에 나서지만, 정부는 ‘의외’의 치사한 반격을 가한다. 검찰이 그를 기소하며 사건의 본질과 관계없는 ‘여성사무관을 호텔로 불러 정을 통하고 이를 이용해서’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선정적인 소재를 찾던 황색 언론에게 좋은 먹잇감을 던져준 것이다. 정부는 이 표현 하나로 해당사건의 성격을 ‘섹스스캔들’화 하는데 성공한다. 국민을 속인 정부란 사건의 본질은 감춰지고 여자의 성을 이용해 자신의 욕망을 채운 남자의 ‘섹스스캔들’만 남게 된다. 그 반전의 성공에 당시 사토 에사쿠(佐藤榮作)수상은 오키나와 반환을 성사시킨 공로로 1974년 노벨 평화상까지 수상하게 된다.
니시야마 사건은 청와대와 법무부장관의 압력에도 원세훈 국정원장과 김용판 서울경찰청장을 선거법 위반 혐의로 기소한 검찰총장 ‘채동욱’은 사라지고, ‘혼외자’를 둔 불륜남 채동욱만 남는 지금의 채동욱 혼외자 의혹사건과 꼭 닮아있다.
니시야마 기자가 취재했던 오키나와 반환 밀약의 진실은 37년 후에야 밝혀지게 된다. 2009년 12월1일 도쿄의 법정에서 요시노 분로쿠(吉野文六) 당시 외무성 미국 국장은 법정증인으로 출두해 미국과 밀약이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고 한다. 72년 법정에서 부인했던 그가 아무런 정치적 부담이 없는 시대가 와서야 똑바로 증언한 것이다.
채동욱 ‘찍어내기’의 이유로 다들 생각하는 ‘국정원 등의 대선개입 사건’은 과연 언제 그 진실이 밝혀질 수 있을까? 대선개입사건의 재판에서 김용판 서울경찰청장이 무죄 판결이 나고 검찰의 수사 의지가 별로 보이지 않는 점 등으로 볼 때 당대에 사건의 실체가 밝혀지기는 어려운 일로 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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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동욱 전 검찰총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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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드 <운명의 인간>을 보면서 채동욱의 운명과 국정원 대선개입사건의 미래를 생각해 보는 것도 일드 <운명의 인간>을 재미있게 보는 감상법이다. 이밖에도 <운명의 인간>은 일본 속의 식민지와 같은 ‘오키나와’(과거 류큐국)의 아픈 역사를 잘 드러내고 있어 일본의 식민지였던 우리와의 동질감도 의외로 느껴 볼 수 있게 한다. 또한 현재 기자이거나 기자지망생들이라면, 드라마를 보는 내내 ‘기자는 어떻게 무엇으로 살아가야 하는지’ 고민을 하게 만드는 드라마다.
*위 기사의 내용 중 ‘니시야마 사건’의 개요는 이홍천 박사의 2009년 12월 9일자 미디어오늘 기고글 ‘37년 만에 인정받은 노기자의 특종’을 일부 인용하거나 참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