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바타>가 3D입체 영상 붐을 일으키면서 할리우드에서는 때 아닌 3D입체영화들이 쏟아져 나왔다. 물론 3D입체 영상기술은 새롭게 부상한 테크놀로지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그동안 수익 확보 방안을 찾던 할리우드 제작자들은 컨버팅까지 동원해 3D입체영화라고 팔아먹었다. 물론 자체 스토리를 통해 3D입체 영상을 구현한 영화들이 제작되기도 했다. 그러나 단언컨대 영화 <아바타>의 계보를 이는 작품은 단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 제임스 카메론이 새롭게 손본 <타이타닉>도 마찬가지였다.

새롭게 만들었다던 이런 영화들은 거의 모두 기존의 3D입체 영화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 즉 시각적 스펙타클을 강화 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영화 <아바타>는 실사 영화와 허구의 애니메이션 공간을 아바타를 통해 연결하여 인간의 상상력을 무한 확장했다. 그것은 단지 시각적인 스펙타클이 아니라 이야기의 깊이를 더욱 깊게 해 감동을 더 강하게 남겼고, 이에 자연스럽게 3D입체 영상 관람을 유도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후의 작품들은 시각적 효과를 강조하며 수익 보전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 결과 3D입체 영화는 그 자체로 더 이상 화제가 되지 못하게 되었다. 괜히 관람료만 비싼 상황에서 관객들의 불만 요인이 되고 있다.

할리우드도 한국처럼 유행을 통해 유사개별화 현상이 심한 곳이다. 히트 작품이 나오면 그와 비슷한 작품들이 대거 제작된다. 우리는 위험도를 줄이고 최대한 수익을 회수하기 위한 전략임을 모르지 않는다. 이러한 측면에서 다시 하나 볼 수 있는 것이 리부트(Reboot) 현상이다. 최근 이병헌이 <터미네이터 제네시스>에 출연 확정되면서 이 용어가 다시 부각되었다. 물론 <스파이더맨>과 <고질라>, <닌자 거북이> 리부트 시리즈가 한국 관객들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계속 회자될 가능성이 많다.

   
문화일보 2014년 4월2일자 2면
 
익히 알려져 있듯이 리부트는 컴퓨터 시스템을 다시 부팅하는 개념과 잇닿아 있다. 캐릭터와 설정을 그대로 두고 나머지 서사 구조는 대폭 손질하는 방식을 리부트라고 한다. 단순히 작품을 몇 가지 에피소드나 장면의 강화를 이끌어내는 리메이크 하는 것과 다른 점이다. 대개 이의 시초를 <배트맨 비긴즈>로 잡고 있다. 놀런의 배트맨 리부트에서 드러났듯이 리부트 시리즈는 하나의 작품이 아니라 연작 시리즈로 작품을 완결할 때, 관객을 스노우볼 효과를 통해 동원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수퍼맨>을 리부트 한 <맨오브 스틸>이 팬티의 색깔까지 바꾸었지만, 200만 명밖에 동원을 못해 실패한 것 아니냐는 지적은 리부트의 완결을 보고 평가해도 늦지 않는다. 사실 <배트맨 비긴즈> 자체도 그렇게 많은 관객을 동원하지 못했다.

리부트 영화가 대거 제작되는 것은 물론 소재 고갈에 시달려 오던 할리우드의 새로운 돌파구로 보인다. 어쨌든 기본 이상은 할 테니 말이다. 팬들은 자신들이 좋아 하는 캐릭터가 새로운 이야기를 통해 다시 찾아오는 현상에 대해 매우 반가워할 수밖에 없다. 원작의 내용은 더 이상 우려먹을 대로 먹었으니 더 이상 나올 국물도, 맛도 없다. 무엇보다 캐릭터들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이 살아 숨 쉬며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어 내었으면 하겠다. 하지만 새로운 캐릭터들이 진입할 기회를 박탈, 제한 당할 가능성이 언제나 항존 한다. 선택과 집중이라는 측면에서 문화 보수주의가 매우 강해지는 것을 말한다. 자신에게 익숙한 캐릭터만 집중적으로 소비하겠다는 의도를 강화 하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캐릭터의 창조와 등장은 요원해지는 셈이다. 물론 한국의 독자적인 캐릭터를 통해 진입하는 일보다 한국인 배우들은 할리우드의 캐릭터를 빛내는 조연으로 분할 것이다.

그런데 이 리부트의 캐릭터들은 거의 대부분 영웅 캐릭터들이다. <어벤져스> 제작진이 한국에 신경을 쓰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할리우드 영웅 캐릭터들이 유독 잘 먹혀드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는 지구를 구하는 로봇 영화나 만화 들이 한국에 인기가 높은 이유와 맥락이 닿아있다. <트랜스포머>의 세계적인 흥행 기록은 한국과 일본에 있다. 일본과 비슷하게 한국은 작고 미약함에 대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고, 이를 로봇이나 영웅을 통해 대리 충족해 왔다. 한국에서 그 대리만족 도구인 로봇은 일본산, 영웅은 할리우드산이었다. 이는 독재경제개발 과정과 맞물려 있었다. 강력한 리더십을 통해 큰 난제를 해결하고 큰 성취감을 느끼는 심리가 이와 맞물렸다. 이는 전후 일본과 박정희 군사 독재 정권과 전두환 독재정권 시기의 로봇, 영웅 캐릭터의 등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핍박받는 존재가 선택할 것은 두 가지다. 영웅을 기다릴 것인가 아니면 고통을 속으로 감내할 것인가였다. 제2차 세계대전 전후 폭발 했던 영웅들은 리부트라는 이름으로 다시 고성장기의 낭만을 상품화 하고 있다.

   
영화 '어벤저스2'
 
그런데 사회는 복잡해졌다. 한 사람의 영웅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다. 그래서 <어벤져스>에서는 영웅 캐릭터들이 떼거리로 등장해야 한다. 캐릭터들이 총출동할 만큼 복잡 위험해진 글로벌 시대에 우리는 어쩌면 살고 있는지 모른다. 영웅이 부존하는 시대가 아니라 영웅이 집단으로 등장해야 하는 셈이다. 하지만 더 이상은 영웅은 필요 없는 시대이기도 하다. 어디 영웅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문제를 해결 할 수 있을까. 더구나 이분법이 통용되지 않는 데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고성장기의 미몽은 여전히 영웅들을 부르고 있다. 세계적인 저성장의 세기에 아마도 우월한 영웅의 시대를 향수하기 때문일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을 둘러싸고 있는 박정희 시대의 신화를 보면 능히 알 수 있다.

여기에 또 하나 더욱 강조되고 있는 점이 있다. 바로 성실보다 우월의 상태를 더 좋은 가치로 생각하는 풍토이다. IMF이후 무한 경쟁의 격화와 자본주의적인 보상 체계의 급격한 수용이 만든 풍토다.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에서 정작 진정한 주인공은 엘사가 아니라 한나였다. 문제를 일으킨 엘사 공주를 찾아가 본래 상태로 되돌려 놓은 것은 한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중적으로 한나를 언급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대개 엘사의 미모와 초능력 그리고 ‘렛잇고’를 부르는 자유 의지를 높이 살 뿐이다. 여왕을 장애인이나 소수자로 간주하는 것은 비약이었다. 한나처럼 열심히 그리고 성실히 자신의 소신을 통해 고군분투한 이들보다 당장에 우월하게 눈에 띄는 이들을 더 선망하는 사회의 미래는 없다. 강자를 위한 약육강식만이 있다.

그것은 영웅을 부르는 시대의 역설적인 피드백 효과이다. 저성장에서 우리가 기다려야 할 일은 영웅적 리더의 호출이 아니라 공동체를 나눔과 복지 그리고 성공에 대한 사회 국가적 시스템의 리부트이다. 아무리 영웅들이 떼로 몰려다녀도 하는 일이라고는 사회와 국가 시스템을 리부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오히려 지킬 뿐이다. 또한 결국 <겨울왕국>의 주인공들은 자신들의 왕국을 지켰을 뿐이다. 그런 짓들에 우리들은 열광을 보낼 뿐이라니. 그들 밑에 있는 백성들의 시각은 이제 도통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그 진실이 너무 고통스럽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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