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로 66주기를 맞는 제주 4·3 사건이 추념일로 지정됐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가 ‘국민의 자긍심과 사회통합을 이루겠다’는 목표로 설립한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에는 이 사건에 대한 유물은커녕 사건의 개요나 설명이 단 한 줄도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4·3사건은 이미 11년 전 제주4·3사건 진상규명을 통해 숨겨진 국가기록을 발굴하는 등 참혹했던 학살기록 뿐 아니라 당시 초대 이승만 대통령의 ‘계엄선포’와 ‘탄압’ 지시까지 드러났으나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에는 ‘없는 역사’가 돼 있는 것이다.

4·3 직전 미군·경찰 “제주도민 70~90% 좌익”

반대로 이런 기록은 제주 4·3평화기념관에만 상세히 보존, 전시되고 있었다.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명림로에 위치한 4·3평화기념관에는 해방 직후 조성된 지역공동체가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 서북청년단 등 외지인들에 의해 무참히 짓밟힌 증거와 기록을 담고 있다. 지난 2003년 특별법에 따라 활동한 제주 4·3진상규명위원회의 보고서는 사건으로 인한 희생자 규모가 2만5000~3만 명에 이른다고 추정했다. 위원회에 신고된 희생자만 해도 1만4000명에 달하며, 이 가운데 정부 토벌대에 의한 희생자가 86.1%를, 무장대에 의한 희생자가 13.9%로 크게 대비된다. 또한 여성(21.3%·2985명)과 10세 이하 어린이(5.8%·814명), 61세 이상 노인(6.1%·860명) 등 약자가 무려 33%가 넘는 등 ‘살육’의 대상이 무차별적이었음을 드러냈다.

특히 미군과 육지(본토) 사람들이 제주도를 빨갱이 소굴로 규정하면서 마녀사냥을 부추긴 육성도 기념관은 보존하고 있다.

   
서울 세종로에 있는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사진=조현호 기자
 
1일 기념관과 제주4·3사건 진상보고서에 따르면, 4·3 사건의 도화선이 됐던 1947년 3월 1일 관덕정 앞 시위대 발포사건 이후 전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었던 민관합동 총파업(3월 10일)이 벌어지자 미군은 조사단을 제주에 파견했다. 3월 1일 시위과정에서 발생한 경찰 발포로 6명이 사망하고 8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희생자 대부분이 시위를 구경하던 시위꾼이었다. 이를 두고 미군은 열흘 뒤 ‘파업’의 원인에 대해 G2보고서에서 “경찰 발포로 도민 반감이 고조된 것을 남로당 제주조직이 선동해 증폭시켰다”며 “제주 인구의 70%가 좌익 동조자”라고 분석했다.

당시 최경진 경무부 차장은 기자들에게 “제주도 주민 90%가 좌익색체”라고 발언했다고 한성일보가 1947년 3월 13일자에서 전했다.

‘제주도만 유일하게 선거무효’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엔 누락

4·3평화기념관에 따르면,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350명의 무장대가 12개 지서와 우익단체를 공격하면서 무장봉기가 시작된 4·3사건에서 무장대와 가담자들의 요구사항 가운데 하나는 이승만과 미군이 추진하던 ‘단독선거 및 단독정부 수립에 대한 반대’였다. 통일된 조국, 통일된 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요구였다. 실제로 이 사건과 주민들의 참여로 1948년 5월 10일 남한 내에서만 실시된 총선거에 제주도 선거구 2곳만이 투표수 과반수 미달로 무효처리되는 초유의 사태로 이어졌다. 이듬해 5월 10일 재선거에서 제주도는 국회의원을 선출할 수 있었다.

이에 반해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엔 이 같은 내용은 물론 4·3사건 자체에 대해 전혀 거론하거나 설명해놓지 않았다. 역사박물관에는 단독선거 자체를 미화하고 반대자를 좌파로 모는 데만 급급했다. 박물관은 단독선거에 대해 “5·10 총선거는 21세 이상의 모든 남녀에게 최초로 선거권이 부여된 직접·평등·비밀·자유 원칙의 민주선거였다”며 “남북한의 좌익은 5·10 총선거를 저지하려 했으며, 중도파는 남북 협상 후 총선거에 불참했다”고 기록했다. 대한민국 박물관은 “그러나 이러한 혼란 속에서도 5·10 총선거를 투표율 95.5%로 성공적으로 치러졌다”고 주장했다. 4·3사건과 제주도 선거무효를 빼놓고 ‘성공적인 선거’라고 미화한 것이다.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에서 소개한 5.10 남한 단독선거에 대한 평가. 사진=조현호 기자
 
이승만 “가혹하게 탄압하라” 제주도만 계엄령, 모두 누락

이밖에도 4·3 사건 진행과정에서 1948년 11월 중순부터 1949년 3월까지 4개월은 무차별적으로 학살이 이뤄진 시기로, 이는 이승만 당시 초대 대통령의 지시와 무관치 않았다. 이승만은 대통령 취임 이후 첫 계엄령을 제주도를 대상으로 공포했다. 그해 11월 17일 이승만은 국무회의에서 ‘제주도지구 계엄령 선포에 관한 건’을 대통령령 제31호로 의결했다. 이승만은 회의록에서 “제주도의 반란을 급속히 진정하기 위해 동지구를 합위지경(계엄지역)으로 정하고 본령 공포일로부터 계엄을 시행할 것을 선포한다”고 썼다.

또한 이승만은 공식석상에서 대놓고 ‘가혹하게 탄압하라’고 말하기도 했다. 제주4·3평화기념관에는 1949년 1월 21일 국무회의에서 “미국 측에서 한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많은 동정을 표하나 제주도, 전남사건의 여파를 완전히 발근색원하여야 그들의 원조는 적극화할 것”이라며 “지방 토색(討索) 반도 및 절도 등 악당을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하여 법의 존엄을 표시할 것이 요청된다”고 말한 이 대통령의 발언록이 보존돼 있다. 이승만은 모슬포경찰서와 성산포경찰서를 신설하라는 대통령령도 공포(49년 1월 18일)했으며, 서북청년회 단원을 경찰과 군대에 편입하라고 지시하기도 했다는 내용도 기념관엔 전시돼 있다.

이에 반해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에는 이런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첫 계엄령 선포 자료도, 전국적인 소요사태에 대한 지시발언 등 주요 행적을 전혀 전시하지 않았다.

   
이승만 초대대통령이 1949년 1월 21일 국무회의에서 제주 4.3 사건에 대해 '가혹한 탄압이 요청된다'고 지시한 회의록. 사진=(제주 4.3평화기념관) 조현호
 

   
제주 4.3 평화기념관에 전시된 토벌대의 양민 집단학살 뒤 암매장하는 사진들. 사진=조현호 기자
 
“말로만 추념일 역사의식은 외눈박이로 퇴보”

이 같은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의 전시행태’를 두고 제주지역에서는 외눈박이 역사의식을 드러낸 것이라고 평가했다. 최희영 제주 4·3연구소 사무국장은 1일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현 정부는 정부수립 과정에서 자행한 학살과 같은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는 기록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라며 “역사에서의 과오를 반성하지 않겠다는 기득권세력의 외눈박이 현대사인식 태도 때문”이라고 밝혔다.

최 국장은 “국가가 4·3을 추념일로 지정한 것은 다행스런 일이지만, 더 성숙한 사회로 가려면 기득권 갖고 있는 사람들이 좌우이념을 내려놓고 함께 가는 길을 모색해야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이에 대해 황보명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전시운영과장은 1일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전시하는 과정에서 역점을 두고 있는 부분에 4.3 사건 유물을 보유하지 못했기 때문에 전시가 안된 것 같다”며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려는 작업을 올해부터 시작하고 있다”고 해명했다. 황 과장은 “관련자료를 전시할 필요가 있다면 전시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지난 1992년 제주4.3연구소 등에 의해 발굴된 제주 다랑쉬굴 내 시신 유해. 사진=(제주4.3평화기념관) 조현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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