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장은 나를 끌고 세면장으로 갔다. 팬티까지 모두 탈의시킨 다음 손과 발을 묶었다. 하필 겨울이라서 너무나 추웠다. 조장은 아무 말 없이 내 뺨을 후려쳤다. 난 중심을 잃고 넘어졌다. 그런 나를 조장은 발로 밟아대고 찬물을 끼얹기 시작했다.”

지난 1984년부터 1987년까지 부산 형제복지원에서 지냈던 한종선씨(38)가 기억하고 있는 당시 물고문 장면이다. 한씨는 지난 2012년 전규찬 한국예술종합학교 미디어영상학부 교수(언론개혁시민연대 대표)가 기획하고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소장과 함께 쓴 책 <살아남은 아이>를 통해 도저히 믿기 힘든 복지원에서의 고문과 구타, 성폭행 등의 인권유린 상황을 고발했다.

한씨에 증언에 의하면 그때 복지원에서는 멀쩡한 사람들이 성폭행과 구타, 고문, 기합 등으로 정신이상자가 되거나 지체장애·불구자가 되는 일은 허다했다. 복지원 수용자들을 관리하던 ‘조장’이라는 사람은 뱀 껍질을 주면서 그것을 먹으면 전체 기합을 주지 않겠다고 학대하는 등 가혹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 살아남은 아이 / 한종선·전규찬·박래군 지음 / 문주 펴냄
 
당시 9살이었던 한씨와 함께 끌려갔던 12살 누나는 여자로서 가장 치욕스러운 고통을 경험하고 정신분열증 환자가 됐다. 복지원에 잡혀 가기 전 사회에서 한씨에게 글도 가르쳐 주고 공부도 잘했던 누나는 여자소대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동생을 보게 해달라고 말했다가 수차례 구타를 당했다.

한씨는 “25소대 조장들이 누나를 사정없이 머리끄덩이를 잡아끌고 가는 모습을 수도 없이 보았다”며 “우리 누나 역시 성폭행을 당하고 성추행과 고문 등으로 정신이상자가 됐으니 복지원에서의 성폭력은 비일비재했고, 남자 소대에서도 성폭력은 있었다”고 말했다.

지난 22일 SBS <그것이 알고 싶다> ‘형제복지원의 진실’ 편을 통해 형제복지원 사건이 재조명되자 온라인에선 사건의 진상을 규명을 요구하는 서명운동이 벌어지는가 하면 김영춘 민주당 부산시장 예비후보가 당시 형제복지원을 운영했던 사람들에 대한 재조사와 책임자 처벌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하는 등 국민의 분노가 높아지고 있다. 포털사이트 다음 아고라에서 23일부터 시작한 서명인원은 2500여 명을(24일 오후 6시 기준) 훌쩍 넘어섰다.

   
한종선씨는 28년 전 기억을 더듬어 글과 그림으로 당시 실상을 드러냈다. 그림=한종선
 
박래군 소장은 24일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그때 복지관에 있었던 사람들이 아주 비인간적이고 처참한 삶을 살았지만 국가와 사회가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이나 책임을 기피하고 있고, 가해자인 복지원 원장은 반성할 줄 모르고 있으니 국민의 분노가 지금이라도 끓어오르는 것은 당연하다”며 “사회복지라는 미명하에 저질러진 범죄는 다른 것보다 더 흉악한 범죄임에도 국가가 사회복지에 기여한 공을 인정해 가해자가 훈포장과 서훈을 받으며 영전까지 하는 작금의 현실은 피해자들에게 더 큰 고통을 주고 있다”고 지적했다.

박 소장은 이어 “최근 여론의 주목을 받으면서 형제복지원사건 진상규명 대책위원회 활동도 많이 알려져 못 만났던 가족들도 만나고, 당시 피해자들도 하나둘 나오고 있어 이번에도 그냥 묻히게 해서는 안 된다”며 “피해자 보상을 넘어 국가 범죄에 대한 재발 방지 대책까지 마련하기 위한 특별법 제정 운동과 함께 책임자 엄벌 등 계속 반복되는 사회복지시설 인권유린 문제를 근본적으로 막기 위한 구조적 개혁이 수반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1975년 부산시와 위탁계약을 맺은 형제복지원은 국가보조금을 지원받으며 3500여 명의 부랑인을 수용했던 전국 최대 규모의 사회복지기관이었다. 하지만 1987년 한 검사 발견으로 수사가 진행된 결과 12년 동안 513명의 원인 모를 사망자가 발생한 사실이 드러났다. 박인근 형제복지원의 원장은 수용자들을 폭행하고 감금하게 한 혐의와 함께 수십억 원을 횡령한 혐의 등으로 구속됐지만 2년 6개월 형만을 선고받았을 뿐,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과 피해자 구제는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한편 24일 진선미·김용익 민주당 의원 등 여야 의원 40여 명은 ‘형제복지원 피해사건 진상규명 및 피해자 지원에 관한 법률’ 제정안을 발의했다. 이 특별법은 △국무총리 소속 형제복지원 피해사건 진상규명위원회 설치 △실효성 있는 관련자 조사를 위한 ‘동행명령’을 현실화 △피해자 국가보상 및 명예회복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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