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광고국이 삼성 백혈병 문제와 무노조 경영 등을 비판하는 외부 칼럼을 쓴 송경동 시인에게 일부 표현을 수정해 달라고 직접 요청했다. 온라인 노출 전에 요청이 이루어졌고, 경향신문 편집국은 삼성의 연락을 받은 뒤 필자에게 동의를 구하지 않고 일부 문장을 통으로 들어냈다. 이밖에도 경향신문은 최근 삼성 비판 기사의 출고시기를 늦추거나 데스킹 과정에서 ‘삼성’을 삭제했다.

20일 경향신문 기자들과 송경동 시인의 말을 종합하면 경향신문 광고국은 지난 19일 오후 송경동 시인에게 전화를 걸어 삼성 비판 표현을 수정해 달라고 요청했다. 송경동 시인은 <어디서라도 이겨봐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칼럼에서 삼성 백혈병 문제를 언급하면서 “무슨 아우슈비츠도 아니고 삼성전자와 삼성SDI, 삼성반도체 등에서 생체실험의 대상이 되었다가 죽거나 투병 중인 이들이 제보된 이들만 190여 분이었다”고 썼다. 광고국은 이중 ‘생체실험’이라는 표현을 수정해 달라고 전화했고, 송 시인은 이를 받아들였다. 광고국이 전화를 건 시각은 오후 6시 반께로 이 칼럼이 온라인에 입력(밤 9시8분)되기 전이다.

송경동 시인은 광고국 요청 직후 반올림 자료를 확인한 뒤 오후 7시께 김후남 여론독자부장에게 전화를 걸어 광고국 요청사항과 함께 ‘190여 명’을 ‘243명’으로 수정해 달라 요청했다. 그러나 경향신문은 이날 밤 11시 18분(최종 수정시각) 이전 온라인에서 문장 전체를 삭제했고, 20일자 지면에도 문장을 삭제한 채 내보냈다. 조호연 국장은 “김후남 여론독자부장은 ‘삼성SDI에서는 이 같은 사례가 없었으며, 삼성반도체라는 회사가 없으며, 숫자에 논란의 여지가 있고, 아우슈비츠와 생체실험이라는 표현은 과도한 표현’인데 ‘사실관계를 따지기에는 시간이 늦었다’고 판단한 뒤 문장 전체를 삭제했다”고 전했다. 김 부장은 20일 오전 송 시인에게 ‘삼성 측에서 문제제기가 있었고, 논란의 여지가 있는 문장을 삭제했다’는 취지의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송경동 시인은 이날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광고국에서 먼저 연락이 와 ‘생체실험’이라는 표현을 수정해 줄 것을 간곡하게 부탁했고, 그래서 ‘그렇게 하자’고 동의했다”며 “그러나 김후남 부장과 이야기할 때 문장 전체는 남길 것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송 시인은 “문장 전체가 삭제된 사실을 오늘 아침 문자를 확인한 뒤에야 알았다”고 말했다. 그는 “기사가 온라인에 나가기 전 광고국이 수정 요청을 했다는 것은 경향이 삼성과 기사를 공유하고 있거나 경향이 광고주 삼성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것”이라며 “거대자본에 독립적이어야 하고, 소수자의 목소리를 반영해야 할 경향신문에 있어서는 안 될 일”이라고 말했다.

조호연 국장은 이날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몇 가지 팩트가 틀리고 몇 개는 과도한 표현이라서 이 문장은 들어내도 큰 맥락에 문제가 없고 (삭제한 문장이) 핵심은 아니라고 판단했다고 알고 있다”고 말했다. 조 국장은 “칼럼의 경우에도 팩트가 틀리거나 표현이 과한 경우에도 이런 절차를 밟는 경우가 간혹 있다”고 전했다. ‘광고국이 기사를 미리 보고 필자에게 수정 요청을 한 일이 적절하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조 국장은 “광고국과 송경동 시인이 인연이 있고 벽이 없는 부분이 있어서 미루어 짐작할 순 있지만 확인해야 할 문제”라며 “다만 내부적으로는 확인해 볼 문제이지만 편집국장이 광고국의 문제를 대답하는 것은 적절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경향신문의 삼성 기사 ‘손질’은 지난 10일 경향신문 독립언론실천위원회에서도 제기된 바 있다. 3월 1일자 26면에 실린 정책사회부 박철응 기자의 기자칼럼 <“그때 삼성 노조 있었더라면”>은 원래 2월 22일 토요일자에 출고 예정이었는데 일주일 뒤에야 나왔다. 이 칼럼은 2월 20일 ‘삼성바로잡기 운동본부’ 출범에 대한 내용인데 출고시기가 늦춰진만큼 시의성이 떨어졌다고 볼 수 있다. 독실위에 참여한 한 기자는 “국장은 ‘삼성으로부터 외압이나 외부 자극은 없었고 내부에서 삼성 눈치 본 것도 없다’고 대답했지만 기사 보류에 대한 과정을 명쾌하게 설명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또 다른 기자는 “결국 실을 칼럼을 왜 늦췄는지 납득할 수 없다”고 말했다.

3월 15일자 <공무원엔 성접대·뇌물, 심사 교수엔 기프트카드> 기사에서는 ‘삼성’이 사라졌다. 이 기사는 정부통합전산센터 용역업체 직원, 전산센터 공무원, 입찰 심사위원인 교수 등이 입찰비리에 연루됐다는 내용인데 취재 기자는 삼성SDS가 수백만 원어치 상품권을 건넨 것을 확인한 뒤 이를 기사 끄트머리에 썼다. 삼성SDS 관련 내용은 그러나 기자와 상의 없이 데스킹 과정에서 삭제된 것으로 전해졌다. 이를 두고 경향신문 기자들은 “데스크가 삼성 등 대기업에 알아서 기는 자기검열을 하고 있다”고 반발했다.

조호연 국장은 기자칼럼 게재를 늦춘 이유를 “당시를 전후로 비슷한 내용의 기사와 칼럼이 올라왔다”며 “그런 측면에서 (기자칼럼 주기인 일주일을 고려해) 한 주를 미룬 것”이라고 설명했다. 조 국장은 ‘국장이 판단한 것이냐’는 질문에 “그렇다. 비슷한 내용의 기사가 자주 나오게 되면 분리하는 게 신문제작의 노하우, 관행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조 국장은 삼성SDS 관련 내용 삭제 경위에 대해서는 “다른 업체들은 1억 원 이상을 줬고, 성접대까지 있었는데 SDS는 300만 원어치 상품권이었다”며 “사회적 책임이 큰 기업은 작은 잘못을 하더라도 크게 다뤄야 한다는 원칙은 있지만 이 케이스는 그렇게 처리해도 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조호연 국장은 연이은 삼성 기사 논란과 관련 편집국 내 문제제기에 대해 “이 3건에 대해서는 저널리즘 원칙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부끄러운 게 없다. 지금 이걸 놓고 기사 원칙에서 벗어났다고 한다면 직접 토론하고 싶다. 오히려 자본권력이 세진 상황 때문에 기자들이 오해를 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한다”고 말했다. 조 국장은 “(기사 출고시기 연기, 일부 표현 데스킹 등) 데스크에 이런 재량이 없다면 모든 기사를 다 쓰고 내보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다만 “(기자들의 문제제기에) 책임감을 무겁게 느끼고, 그렇게 (편집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경향신문 내 이 같은 ‘삼성’ 기사 논란에 대해 송경동 시인은 “경향신문만 아니라 진보언론 모두가 박근혜 정권에서 생존 자체를 고민할 만큼 문제가 있다 보니 이런 일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면서도 “그 동안 경향신문은 희망버스 광고를 도와주고 기사도 써왔다. 이런 경향신문이 흔들리고 무너진다면 언론 전체가 무너진다. 조금 힘들더라도 지킬 게 있다”고 말했다. 송 시인은 “평기자들을 중심으로 문제제기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또 다른 계기가 되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편집국 한 기자는 “경향신문에 다닌다는 자존심이 상하는 문제”라고 말했다.

[기사 일부 수정]
경향신문 조호연 편집국장은 삼성SDS 관련 내용 삭제는 데스킹 과정에서 누락된 것이지 신문에서 삭제된 게 아니고, 자신의 대답 중 일부가 잘못 전달됐다며 수정을 요청했습니다. 송경동 시인 칼럼 수정 과정에서도 시간 착오가 있었습니다. 이에 관련 내용을 수정합니다.

   
▲ 경향신문 2014년 3월 20일자 29면 오피니언면에 실린 송경동 시인의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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