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모녀의 비극적인 죽음 앞에 마음이 무너지지 않는 사람은 정상이 아닐 것이다. 세 모녀가 죽어갈 때 박근혜가 그렇게도 사랑한다던 대한민국은 그녀들 곁에 없었다. 시민의 기본권 보장과 인간적 존엄의 확장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국가라면 세 모녀가 죽음을 선택했을 때 국가는 존재하지 않았던 셈이다. 세 모녀의 죽음이 애도와 한탄으로만 끝난다면 그건 세 모녀에 대한 모독일 것이다. 이런 참극이 재발하지 않을 사회적 제도를 고안하고 집행해야 한다. 그게 살아남은 자들의 정치적, 윤리적 책무다.

세 모녀처럼 모진 삶에 치여 극단적인 선택을 할 사람들은 대한민국에 널려 있다. 예비 자살자들이 줄을 지어 있는 것이다. 사회적 타살과 다르지 않을 경제적 곤궁에 의한 자살을 방지하기 위한 장치들 가운데 대뜸 생각나는 것이 '기본소득제'다. 기본소득은 철학적, 윤리적으로 정당하다. 한 개인의 성공과 실패를 결정짓는 것은 압도적으로 출생과 같은 운(fortune)이고 거기에 더해 과거 세대와 현재의 사회구성원들이 만들어 낸 지식과 경험과 기술이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빌 게이츠나 스티브 잡스, 이건희의 성취가 그들 개인에게 전적으로 귀속되는 것이 부당한 것처럼 사회적 열패자들의 실패도 온전히 그들의 탓은 아니다. 한 사회가 이룬 성취와 부는 구성원 모두가 평등하게 공유하는 것이 지극히 정당하다. 이를 위한 최적의 수단이 기본소득이다.

경제적 측면에서도 기본소득제의 도입은 타당하다. 기본소득의 도입을 통해 가처분 소득이 늘어나면 자연히 소비가 촉진돼 내수경제가 살아날 것이고, 레드오션에 진입하는 비정규직 노동자와 영세자영업자의 수가 줄어 노동시장 및 영세 자영업 시장의 과당경쟁도 일정 부분 해소될 것이며 이를 통해 시장임금이 상승하고 자영업자들의 이윤율도 제고될 것이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내재적 속성이라 할 기술혁신으로 인해 고용 없는 성장은 상수(常數)가 된 지 오래다. 완전고용 혹은 완전고용에 가까운 고용은 기대하기가 어렵다는 뜻이다. 모든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같은 슬로건은 아름답고 또렷하지만 허망한 말이기도 하다. 일자리 나누기 같은 방식도 명백히 한계가 있다. 어쩌면 가장 강력한 실업대책이 기본소득일 수 있다.

기본소득제의 도입에 따르는 재원마련이 터무니 없는 것도 아니다. 이미 선행된 연구들이 있거니와 토지와 증권, 이자 등에서 발생하는 불로소득에 고율로 과세하고, 환경세를 신설하며, 연금을 기본소득으로 전환하면 기본소득과 무상의료, 무상교육에 필요한 재원이 얼추 마련된다. 토지, 증권, 이자, 배당, 상속 같은 것은 대표적인 불로소득이자 과거 세대와 현세대가 만들어 낸 가치로 이를 세금의 형식으로 사회가 공유하는 것이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윤리적으로 정당하다.

이미 대한민국은 미봉이나 대증처방으로는 치유하기 어려울 정도로 중병에 걸려 있고, 많은 시민들의 삶은 불안과 고통에 짓눌려있다. 패러다임의 전환 없이 대한민국의 재생은 어렵다. 기본소득이 새로운 사회를 향한 상상력의 원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뒤늦게나마 대한민국에 기본소득제가 도입된다면 세 모녀의 영혼도 작은 위로를 받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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