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주의와 국가주의는 서로 다른 속성을 갖는다. 그럼에도 그 둘은 단짝이 되어 함께 다닌다. 국가주의적 관점에서 민족주의를 가장 잘 활용한 사람은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국민교육헌장’은 그 중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며, 국가, 국민, 민족은 거의 동일한 수준에서 혼용됐다. 국가주의와 민족주의가 가장 잘 만난 것은 스포츠였을 것이다. 축구와 복싱, 레슬링 등 당시 인기를 끌었던 스포츠종목들은 예외 없이 개인의 성공이나 스포츠정신보다는 국가와 민족이라는 ‘상상의 공동체’에 대한 무한사랑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당시 대통령의 성을 딴 ‘박스컵(Park’s Cup)’은 국가주의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근대 이후 스포츠가 국가주의 혹은 민족주의의 양상으로 나타난 부분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말하는 것은 어쩌면 쉬운 일일지 모른다. 하지만 올림픽대회처럼 근대국가를 기반으로 성립한 스포츠의 경우에는 국가주의가 표면화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선수들은 국가대표로 대회에 참가한다. 국가대표라는 명칭은 선수 개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국가의 멍에를 지고 있는 것이다. 올림픽위원회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개별 국가는 금메달 개수에 따라 순위를 매기고 경쟁을 부추긴다. 이 과정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보는 이들은 결국 선수 개인들이다. 메달이나 기록과 같은 성적에 자신을 내던짐으로써 결국 자신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늘날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통해 전혀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대다수 현대인들이 겪는 노동의 소외가 스포츠선수들에게도 그대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 김연아 피겨스케이팅 선수가 23일 오전(한국시간) 러시아 소치 해안클러스터의 아이스버그 스케이팅 팰리스에서 열린 2014 소치 동계올림픽 피겨 갈라쇼에서 '이매진(Imagine)에 맞춰 열연하고 있다. ⓒ 연합뉴스
 
이번 소치 동계올림픽에서도 안현수의 금메달과 김연아의 판정 논란에서 결국 ‘국뽕’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줬다. 국민 대중은 상대적으로 ‘국뽕’에서 조금 벗어나려는 모습이 보이기도 했지만, 언론은 점점 그 중독의 양상이 더 심각해지고 있다. 금메달을 딴 러시아의 소트니코바에 대한 언론 보도는 상당 부분 비하 의도를 갖는 것처럼 보였다. 어느 팬이 김연아의 시상대를 금메달보다도 월등하게 높게 만든 것은 애교라고 할 수 있다면, 공중파 KBS에서 올림픽 성적을 정리하는 자막으로 김연아의 은메달 앞에 ‘실제로는 금메달’이라고 덧붙이는 수준까지 보여줬다. 차기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스피드스케이팅 이상화 선수가 피겨에서 금메달 따는 것을 보여주겠다거나 브라질 월드컵에서 같은 조에 속한 러시아에 대한 복수를 홍명보 감독이 해줘야 한다는 식의 댓글도 있었다. 일부 네티즌은 패러디물을 통해 소트니코바에 대한 성적 폭력을 저지르기도 했다.

안현수를 바라보는 우리 국민들의 시선은 혼란스럽고 복합적인 감정이었다. 한국 선수로서 2006년 토리노 동계올림픽에서 3관왕까지 했음에도 이번에는 경쟁국가의 선수로 참가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안현수를 둘러싼 논란을 보게 되면 올림픽과 같은 현대스포츠에서 국가주의가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를 보게 된다. 빙상연맹을 비롯한 국가에서 관리하는 대부분의 스포츠연맹들은 국가주의의 상징이다. 올림픽과 월드컵을 비롯한 다양한 국제대회를 위해 ‘태릉선수촌’이 운영된다. 하지만 최근 알려진 것처럼 비인기종목 선수들은 선수촌 식당을 이용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빙상연맹의 사례처럼 폭행과 파벌 등의 문제점 역시 메달지상주의나 국가주의가 아니라면 그 정도로 심각하게 나타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한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안현수가 ‘빅토르 안’이라는 이름으로 러시아 국가대표로 활약하는 과정에서 러시아라는 국가가 그를 어떻게 관리하는가 하는 점이다. 그 정점에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통치를 하고 있는 푸틴 대통령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맞물려 있다. 푸틴은 안현수에게 훈장까지 수여함으로써 국가의 영웅으로 대우하고 있다. 선수의 의지와 상관없이 국가는 지속적으로 선수들을 일종의 도구로 전락시키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 권경우 문화평론가
 
이번 올림픽 기간 중 어느 광고에 “너는 김연아가 아니다. 너는 한 명의 대한민국이다.”라는 문구가 있었다. 개인을 대한민국으로 동일화하는 논리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사회에서는 아무리 공정함을 외쳐도 소용이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비정상화의 표본이기 때문이다. 판정 논란을 통해 부당함을 호소하고 분노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비정상화­를| 정상화로 바꾼 이후에야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김연아는 언론과 국민들의 업청난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을 대한민국과 동일화시키지 않는 위엄을 지켰다. ‘나는 대한민국이 아니다’라고 외친 것이다. 아름다운 은퇴 무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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