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한 달 간 굵직한 사건이 많았다. 대선 직전 국정원 대선개입 수사결과를 허위 발표한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은 1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은 30여년 만에 내란음모죄가 적용돼 1심에서 징역 12년을 선고 받았다. 서울시 공무원 간첩 사건에 대한 국가정보원의 증거조작 의혹도 최근 불거졌다. 이 사이 한 달 넘게 언론에 등장하지 않은 중대 사건이 있다. 채동욱 전 검찰총장의 혼외아들로 지목된 채모(12)군의 개인정보 유출 사건이다.

채모 군의 개인정보 유출사건을 수사하고 있는 서울중앙지검 형사3부는 지난해 12월 조이제 서울 서초구청 행정지원국장과 조오영 전 청와대 행정관에 대한 구속영장이 기각된 후 이렇다 할 수사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지난 1월 13일 서초구청에 대한 2차 압수수색도 소득은 없었다.

한 검찰 출입기자는 “1월 중순에 검찰 인사가 나면서 담당 검사도 바뀌었다. 현재 수사가 진행되고는 있지만 언론의 관심이 많이 떨어진 상황”이라고 전한 뒤 “조오영 등의 진술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수사인데 당사자가 입을 다물거나 계속 말을 바꿔서 검찰 내부에서도 수사가 어렵다고 하소연 한다”고 귀띔했다. 분명한 건 검찰이 이번 수사에 시간을 끌고 있다는 사실이다.

조오영 청와대 행정관은 채모군의 가족관계등록부 정보를 요청한 배후에 대해 애초 의혹을 전부 부인했다. 그러다 행정안전부 김모 국장을 '윗선'으로 지목했다 수사가 진행되자 다시 신학수 전 청와대 민정비서관을 언급하는 등 수시로 말을 바꿨다. 이를 두고 몇몇 언론은 “조 행정관이 수사를 혼선에 빠트리기 위해 일부러 엉뚱한 사람을 대고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 채동욱 전 검찰총장 혼외 의심 아들의 개인정보 유출 사건 관련 인물들. ⓒ한겨레신문
 
그럼에도 배후에 대한 규명은 현재까지 전혀 진전되지 않고 있다. 조오영 행정관의 직속상관이었던 박근혜 대통령의 최측근 이재만 청와대 총무비서관이 핵심 윗선으로 지목되었으나 구체적인 수사는 이뤄지지 않았다. 이와 관련 한 법조계 관계자는 “이재만의 이름이 나왔으니 수사가 지지부진해진 것 아니냐”고 되묻기도 했다.

곽상도 전 청와대 민정수석 역시 수사가 안 되기는 마찬가지다. 지난해 10월 1일 국회 긴급현안질의에서 신경민 민주당 의원은 “8월 중순 곽상도 전 수석이 채동욱 총장의 정보를 들고 강효상 조선일보 편집국장을 만났다”고 주장했다. 조선일보는 지난해 9월 6일 채동욱 총장에게 혼외아들이 있다는 단독보도를 냈다. 당시 언론계에선 조선일보가 채모 군의 개인정보를 취득한 과정에 관심이 모아졌다.

그러나 방상훈 조선일보 사장은 혼외자식 보도를 두고 “기자정신으로 일궈낸 특종”이라며 관련 의혹을 일축했다. 수사가 지지부진해지면서 조선일보는 자사보도의 정당성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지난 1월 강효상 조선일보 편집국장은 조선일보 노동조합과의 신년 인터뷰에서 “곽상도 전 민정수석이 나한테 정보를 흘렸다는 것은 허무맹랑한 거짓말”이라며 “신경민 의원은 면책특권에 숨지 말고 자신 있으면 당당히 말해라”라고 주장했다. 이와 관련 신경민 의원은 지난해 말 본지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굉장히 정확한 제보를 받았지만 정보원을 밝히기 어렵다”고 말했다.

   
▲ 지난해 9월 16일 조선일보의 '채동욱 혼외자식' 보도를 규탄하는 언론계 인사들의 집회 모습. ⓒ언론노조
 
   
▲ 채동욱 전 검찰총장의 사퇴 소식을 전한 YTN 화면.
 
조선일보의 ‘채동욱 혼외자식’ 보도는 원세훈 전 국정원장을 선거법 위반으로 기소하며 국정원 대선개입 수사에 박차를 가하던 채동욱 검찰총장을 낙마시킨 결정적 사건이었다. 이 때문에 언론계를 중심으로 국정원·청와대·조선일보가 합작해 불법으로 취득한 개인정보로 기사를 썼다는 의혹이 강하게 제기됐다.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얼미터에 따르면 채동욱 전 총장이 사의표명하기까지 정치적 외압이 있었냐고 묻는 질문에 응답자의 46.3%가 “외압이 있었다”, 31.1%가 “외압이 없었다”고 답했다. 관련 기사를 쓴 조선일보 기자 2명은 개인정보보호법 위반 등 혐의로 검찰에 고발당하기도 했다.

강효상 조선일보 편집국장은 조선일보 노조와 인터뷰에서 “취재팀에서 한 달간 발품을 팔며 모자이크처럼 맞춰가면서 만든 작품이다”, “처음에는 3~4일이면 지나갈 사안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채 전 총장이 총장직을 걸고 사실을 부인하면서 일이 커졌다”, “야당 등에서 정치적인 문제제기를 하면서 예상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갔다”고 말했지만 이를 곧이곧대로 믿기 어려운 상황이다. 그러나 해당 사건수사가 속도를 내지 않으면 조선일보 보도를 둘러싼 의혹에 대해선 영영 확인하기 어려워진다. 이 경우 언론계에선 또 다른 ‘혼외자식’ 보도가 반복해 등장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강효상 편집국장은 “초판이 나간 뒤 검찰 쪽에서 수많은 압력성 전화가 걸려왔다. 기사를 1면 톱에서 내리면 우리가 검찰에 굴복하는 상황이 돼버렸다”고 주장했다. 강효상 국장은 이어 “우리가 믿을 것은 사실의 힘이다. 팩트가 있는 한 청와대도 검찰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검찰총장 재임 시절에 불륜을 저지른 것도 아닌, 십년 전의 사건을 당사자 중 누구도 문제를 제기한 적이 없음에도 공중의 정당한 관심사라며 대대적으로 보도한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만약 야당과 몇몇 언론이 제기한 의혹처럼 채모군 개인정보 유출 배경이 검찰의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 수사를 방해하려는 권력층의 의도가 개입된 것이라면 그리고 그 결과가 채동욱 총장의 사퇴였다면, 이 사건은 앞서 언급한 김용판 무죄·이석기 유죄·국정원 증거조작보다 중대하다고 볼 수 있다. 언론인들의 적극적인 관심과 취재가 필요한 이유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