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과 2013년, tvN <응답하라 1997>과 <응답하라 1994>가 얼마나 성공했는지는 새삼 이야기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응답하라 1994>의 마지막회 평균 시청률은 11.9%(닐슨코리아, 유료플랫폼 기준)이었다. ‘응답하라’ 시리즈는 tvN의 채널인지도를 획기적으로 높였고 CJ로 대표되는 케이블 콘텐츠의 성장과 지상파플랫폼의 위기 등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이 성공적인 드라마를 만든 장본인은 KBS에서 건너온 예능PD였다. 그는 2011년 KBS 2TV에서 <남자의 자격>을 연출하며 공전의 히트를 치고 각종 수상을 휩쓴 뒤 CJ로 이직했다. 그는 전남 순천에서, 경남 사천(과거의 삼천포시)에서 각종 농산물이 선물로 올라와 돌려주기가 곤혹스럽다며 웃었다. 13일 오후 상암동 CJ본사에서 그를 만났다.

응사의 성공요인 ‘잘 만들어서’ 아니라, ‘다르게 만들어서’

   
편집-안혜나 기자 hyena@
 

수많은 기자와 평론가들이 ‘응답하라 시리즈’의 성공요인을 분석했다. 그러나 정작 PD의 생각은 듣지 못한 것 같아 물어봤다. 비교적 명쾌한 답이 돌아왔다.

“드라마는 여성의 것이다. 여성이 열광하면 광범위한 인기를 얻을 수 있다. 그럼 러브라인이 터져야 한다. 시발점은 매력 있는 캐릭터였다. 쓰레기·칠봉이·삼천포 등 매력적인 캐릭터가 잘 소구됐다. 그게 첫 이유다”

두 번째 이유도 있었다.
“다들 각박하게 굴며 살고 있다. 그런데 속으로는 다들 따뜻하게 살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우리가 하고 싶었던 건 따뜻한 이야기였다. 이방인이 서로 기대며 느끼는 따뜻한 정서를 대중이 그리워했던 것 같다”

응사 시리즈의 성공, 그것도 연 타석 성공은 예능PD의 드라마 연출이 가진 장점이 있음을 의미했다. 그래서 궁금했다. 드라마를 만든 예능PD의 심경이. 그는 응사 시리즈의 성공이 자신의 ‘출신배경’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우리가 잘 된 이유는 잘 만들어서가 아니라 다르게 만들어서였다. 드라마PD가 어떤 메커니즘으로 드라마를 만드는 지 잘 모른다. 최초의 대본작업부터 구성·대본회의·편집·촬영에 최종 종편까지 예능프로그램의 제작 메커니즘대로, 우리 마음대로 연출했다. 그래서 최초에 가졌던 생각이 끝까지 이어졌다”

신원호 PD는 “예능은 1분 1초도 지루해선 안 된다. 모든 편집이 ‘제발 지루하지 마세요’다. 모든 장난질이 ‘조금만 참아주세요’다. 그 방식이 드라마에 녹아들었다. 우리들의 생존방식”이라고 말했다. 그는 “성나정의 남편 복선도 조금이라도 덜 지루하게 보여주고 싶었던 장치”라며 “응사 시리즈는 큰 서사를 다루는 일반 드라마와 다른 디테일의 힘이 있었다. 직업병의 결과”라고 전했다.

예컨대 김일성 사망, 삼풍백화점 붕괴, IMF 금융위기 등 사회적 사건부터 대학농구열풍, 서태지와 아이들 신드롬 등 시대에 대한 구체적 묘사는 시청자에게 큰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신 PD는 이런 장치들이 단순한 복고코드 이상의 역할을 했다고 설명했다.

“그냥 그 사건이 극의 배경이 되는 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공감을 가져왔다. 삼풍백화점의 경우 현장을 구현한 것도 아니고, 무너졌다는 팩트를 삽입한 것만으로도 당시의 정서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실화가 주는 무게감이 있었다. 서태지 음악의 악마소동처럼 극의 배경으로 등장하면서 드라마의 리얼리티가 와 닿았다. 드라마가 끝났지만 등장인물들이 지금 이 세상을 살고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이유다”

세세한 시대고증을 위해선 시간이 필요했다. 예능프로그램 연출처럼 회의부터 편집까지 많은 부분에 PD가 손을 대다보니 뺏기는 시간도 많았다. 사전제작기간이 3개월이었지만 시간이 부족했다. 방송 사고와 함께 ‘극의 전개가 막판에 늘어졌다’는 지적도 모두 물리적인 어려움에서 비롯됐다. 신 PD는 “극의 내용이 변질됐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지방친구들의 상경과 살 부비는 정서를 좋아했던 분들은 막판에 러브라인으로 치중이 돼 아쉬움이 많았을 것”이라 밝혔다.

   
▲ tvN <응답하라 1994>를 연출한 신원호 PD. 사진=이치열 기자
 

예능의 ‘리얼 패러다임’, 더 이상 혁신 나오기 어려워

응사 시리즈로 성공한 그가 다시 예능으로 돌아올까. “예능이 너무 어렵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어떻게 보면 (예능에서 드라마로) 피신해있는 상황이다. 더 이상 혁신적인 게 나오기 어렵다”고 말한 대목에 주목하면 그가 또 다시 드라마를 만들 가능성은 높아 보였다.

“미국은 여전히 서바이벌과 오디션을 하고 있는데 우리가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로 깊숙한 사생활로 들어가며 독해졌다. 예능은 리얼로 패러다임이 바뀌었고,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다. 지금은 군인, 할아버지, 아빠가 등장했고 여기에 대응하는 아류작도 나왔다. (하지만) 연예인의 리얼은 한계가 있다. 하지 않아도 될 짓을 출연료 받으면서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눈에 띄는 예능프로그램은 있다. 그는 KBS <1박 2일>을 최근 가장 잘 만드는 예능으로 꼽았다. 최근에는 후배인 유호진 PD에게 전화를 걸어 칭찬을 하기도 했다. “잘 만든다는 점에 입각해보면, <1박 2일>은 지금 전성기 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유호진 PD는 <1박 2일>의 정수를 배운 마지막 조연출이었다. 얼마 전 김주혁의 눈물도 인상적이었다. 아빠나 군인으로 가둬지지 않은 6명의 멤버로 여행을 가는 열린 포맷으로 운신의 폭이 넓다” ‘친정’에 대한 여전한 애정이 묻어나는 대목이었다.

물론 그는 이직을 후회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tvN에 대한 자부심도 엿보였다.

“사실 tvN에 입사할 때까지 집에 케이블이 없었다. 여기 와서 케이블에 어떤 채널이 있는지부터 배웠다. 처음에 와서는 (tvN을) 설명하는데 꽤 걸렸다. 요즘은 잘 안다. 촬영가면 알 수 있다. <응답하라1997> 시작할 때 사람들이 물어봤다. 다들 모른다며 지나갔다. 요즘은 tvN이라고 하면 아줌마 아저씨도 안다. 불과 2년 사이 벌어진 일이다”

지상파 PD들의 케이블·종편 이탈은 올해도 이어지고 있다. 이번 달에도 MBC 예능PD 2명이 JTBC로 옮겼다. KBS에서 SBS로 둥지를 옮겼던 신효정 PD는 2월에 사표를 내고 CJ로 둥지를 옮겼다. 신원호 PD는 소수의 PD들이 ‘표적’이 되어 지속적으로 지상파를 이탈할 것으로 내다봤다.

“받겠다는 의지와 가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받겠다는 인원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우리들도 KBS에서 CJ로 옮긴 뒤 스코어에서 혁혁한 공이 있다고 평가받고 있고, JTBC도 지상파 출신이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다. 훈련된 PD를 데려오는 게 채널인지도를 높이고 프로그램이 성공하는데 가장 빠른 길이라는 인식을 강하게 하게 되는 상황이다. 앞으로도 표적 이동은 있을 것이다”

신 PD는 김태호 MBC PD의 이직 가능성을 묻자 “<무한도전>이 곧 김태호여서 쉽게 옮기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답했다.

드라마 만들지만 예능PD로 기억되고 싶다

그는 나이대로 볼 때 김태호·나영석 등과 함께 향후 10년간은 한국 예능을 이끌 세대다. 그에게 어떤 PD로 기억되고 싶은지 물었다.

“나는 사실 드라마를 하면서 변질됐다.(웃음) 지금은 드라마에 무게를 둘 것 같다. 하지만 내가 앞으로 단 한편의 예능프로그램을 안 해도, 내 이름의 마지막에는 예능PD가 붙었으면 좋겠다. 내가 배운 토대가 예능이고, 드라마가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것도 예능인으로서 다르게 만들었던 것 때문이다. 드라마·다큐멘터리·쇼·코미디가 다 섞여있는 장르가 예능이다. 그저 채찍 맞으면서 일만 하는 후배들에게, 이런 길도 있다고 보여줄 수 있는 선배로 남고 싶다”

그는 편집실에서 담배와 컵라면을 쌓아가며 살았던 과거를 회상하며 “힘은 힘대로 들고 욕은 욕대로 먹는다는 열패감이 있었지만 지금은 예능의 순기능이 인정받고 있다”고 반가워한 뒤 “나에게 영감을 주는 것은 늘 마감시간과 회의테이블이다. 다음 작품에서도 이우정 작가와 장르 구문 없이 계속 가게 될 것”이라고 자신 있게 예고했다. 그의 자신감이, 멋지다.


“‘바위처럼’ 나이트에서 췄으면…”

‘응사’ 뒷이야기, ‘응사’와 ‘응칠’의 동성애 코드에 “결이 다르다”


   
▲ ‘응답하라 1994’ 신원호 PD (안경쓴 이) ⓒ tvN
 
신원호PD에게 <응답하라 1994>의 촬영 뒷이야기를 들었다. 

성나정과 그의 친구들이 민중가요 <바위처럼>을 추는 장면이 인상 깊었다.
연기자들이 <바위처럼>을 알고 있었나. 


“어렴풋이 알겠다고 하는 멤버도 있었다. 나도 사실은 잘 몰랐다. 많은 분들이 대학시절 신입생 때 한번쯤은 들었던 복고코드였다. 다들 춤을 추면서 신나했다. 나이트에 가서 이렇게 추자는 사람도 있었다”

신원호 PD가 기억하는 1994년은.

“재미없게 보냈다. 영화를 하고 싶은데 뒤에서 채찍질을 해서 대학을 갔다. 입학하고나서부터 고민이 들었다. 적극적으로 영화판을 쫓아다니지도 않았다. 술만 마셨다. 크게 재밌게 기억되는 그림은 없다. ‘응사’에서 나오는 빙그레(바로 분)가 나와 가장 비슷했다”

<응답하라 1997>(응칠)에서 준희와 윤제, <응답하라 1994>(응사)에서는 빙그레와 쓰레기의 동성애 코드가 인상적이었다. 두 편 모두 동성애 코드를 넣은 이유는.

“겉으로 보면 그렇게 보일 수 있지만 출발 의도는 완전히 달랐다. ‘응칠’에선 절대 이뤄질 수 없어서 가슴 아픈 이야기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준희가 윤제를 좋아하는 모습은 가슴이 아팠다. 빙그레의 경우는 삶의 정체성 혼란을 겪는 시기가 스무살이었다. 전공에 대한 회의와 방황, 성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캐릭터로 그리고 싶었다. 결국 빙그레는 (쓰레기에 대한 마음은) 동경이고 존경이었음을 알고 정체성을 찾아가는 캐릭터였다”

‘응칠’과 ‘응사’ 모두 주인공 직업을 두고 비현실적이라는 비판이 있었다.  

“이 정도 판타지는 괜찮지 않을까. 보는 분들이 판타지 요소를 통해 마지막에 안심하고 돌아서게 하고 싶었다. 응사의 경우 다분히 이야기 요소로서 직업을 설정했다. 직업이 이 친구의 캐릭터를 보강해주는 장치라고 본다면 재밌는 직업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극에서 직업에 대해 구체적으로 파고들지는 않았다. 응칠의 경우 직업과 인물의 개연성 면에서 윤제의 형이 안철수와 비슷하긴 했다”

막판에 왜 ‘쑥쑥이’(성나정의 남동생)가 나오지 않았나.
“마땅히 펼칠 수 있는 스토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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