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1억 건을 넘었다’는 것을 제외하면, 대량 개인정보 유출은 새삼스러운 사건이 아니다. 약방의 감초처럼 대량 개인정보 유출 사건에 주민번호가 포함되어 있음도 마찬가지다. 해커든 내부자든 개인정보를 노리는 사냥꾼들에게 주민번호는 매우 매력적인 정보다. 서로 다른 개인정보를 통합하는 열쇠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정보의 가치가 높을수록 침해의 위험도 높아진다는 것은 상식이다. 주민번호가 중국 등 해외에서 공공연하게 판매되고 있다는 것도 오래된 일이다. 이미 2006년 온라인 게임 리니지에서 발생한 대량 명의도용 사태는 유출된 주민번호에 기반한 것이었다. 당시 한 토론회에서 필자는 행정안전부 관계자에게 유출된 주민번호에 대한 대책을 물었다. 행안부 관계자는 명의도용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이러한 대책을 비웃듯, 그 이후에도 주민번호를 포함한 대량 개인정보 유출과 명의도용이 빈발했다. 이번 개인정보 유출 사고 직후에 나온 정부대책 역시 종류는 많지만 근본적인 대책은 배제되었다.

그러나 여론과 정치권의 분위기는 이전과 달라졌다. 진보, 보수언론을 막론하고 주민번호 체제의 근본 개혁을 주문하고 있다. 대통령도 ‘대체 식별번호를 마련하라’고 지시했고, 심지어 새누리당 황우여 대표도 주민번호를 변경해주고 임의의 일련번호 체제로 바꿀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국회에는 주민번호 체제를 변경하기 위한 주민등록법 개정안의 발의가 준비되고 있다.

오로지 안전행정부만 주민번호를 고집하고 있다. 보도에 따르면, 주민등록증 발행번호를 대체 식별번호로 활용하겠다고 하지만, 기존의 주민번호는 유지하겠다고 한다. 안전행정부에 묻고 싶다. 이미 유출된 전 국민의 주민번호를 기반으로 행정을 하겠다는 것인가? 국민들은 평생 명의도용 등의 피해를 우려하며 살아야 하는가? 안전행정부는 주민번호 변경으로 인한 ‘사회적 혼란과 비용’을 들먹인다. 그러나 전 국민의 주민번호가 유출된 작금의 상황이야말로 ‘사회적 혼란과 비용’을 초래하고 있는 것 아닌가? 이미 이번 정보유출 사태로 인해 고작 한달동안 카드 재발급으로 든 비용만 500억 원이라고 한다. 드러나지 않는 피해들을 포함하면, 지난 10여년동안 얼마나 많은 사회적 비용이 들었겠는가?

이제 주민번호를 바꿀 때가 되었다. 방향은 명확하다. 주민번호와 같은 개인식별 체계는 생년월일, 성별, 출생지 등을 알 수 없는 임의의 일련번호 체계로 바뀌어야 한다. 주민번호 자체가 정보주체의 의도와 무관하게 나이, 성별, 출신지를 노출시키며, 이러한 정보 역시 차별을 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번호는 ‘사람’에게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신분증에 부여되는 것이어야 하며, 필요할 경우 변경할 수 있어야 한다. 우선 현재 주민번호가 유출된 사람에게는 원할 경우 변경해주어야 함은 물론이다. 정부는 법적 근거가 없다는 얘기를 되풀이하지 말고, 의지가 있다면 법적 근거를 마련해주어야 한다.
무엇보다 국가가 부여하는 식별번호를 주민번호처럼 여기저기 사용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 이미 각 사회 영역에는 고유의 식별번호가 있다. 의료 영역에는 의료보험증 번호를, 조세에는 조세번호를, 학교에서는 학번을 쓰면 된다. 주민번호는 복지나 선거 목적으로 최소한도로 이용되어야 한다.

   
▲ 오병일 진보네트워크센터 활동가
 
현재 민주당 민병두 의원과 정의당 김제남 의원이 주민등록법 개정안을 각각 발의할 예정이다. 그러나 주민번호 변경에 대한 우세한 여론에도 불구하고, 모든 법안이 그렇듯이 정부가 반대하면 통과가 쉽지 않다. 그래서 더욱 더 ‘이제 주민번호를 바꾸자!’는 시민들의 목소리가 응집되어 국회에 전달될 필요가 있다. 진보넷은 주민번호제도 폐지에 공감하는 시민사회단체와 함께 주민등록법 개정안 통과를 촉구하는 온라인 서명운동 등을 벌여나갈 계획이다.

주민번호없는 세상을 상상하기 힘들다면, 그만큼 우리가 이 체제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통제와 관리에 익숙해진 것이다. 세계 대부분의 나라들은 한국의 주민번호 체제와 같은 것이 없어도 잘 돌아가고 있다. 정보화가 진행될수록 주민번호의 위력은 배가된다. 주민번호 체제가 유지된다면, 한국에서 프라이버시권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 이 기회를 놓치면, 또 몇 년, 몇 십년 동안 주민번호 체제가 유지될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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