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여론과 정치권의 분위기는 이전과 달라졌다. 진보, 보수언론을 막론하고 주민번호 체제의 근본 개혁을 주문하고 있다. 대통령도 ‘대체 식별번호를 마련하라’고 지시했고, 심지어 새누리당 황우여 대표도 주민번호를 변경해주고 임의의 일련번호 체제로 바꿀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국회에는 주민번호 체제를 변경하기 위한 주민등록법 개정안의 발의가 준비되고 있다.
오로지 안전행정부만 주민번호를 고집하고 있다. 보도에 따르면, 주민등록증 발행번호를 대체 식별번호로 활용하겠다고 하지만, 기존의 주민번호는 유지하겠다고 한다. 안전행정부에 묻고 싶다. 이미 유출된 전 국민의 주민번호를 기반으로 행정을 하겠다는 것인가? 국민들은 평생 명의도용 등의 피해를 우려하며 살아야 하는가? 안전행정부는 주민번호 변경으로 인한 ‘사회적 혼란과 비용’을 들먹인다. 그러나 전 국민의 주민번호가 유출된 작금의 상황이야말로 ‘사회적 혼란과 비용’을 초래하고 있는 것 아닌가? 이미 이번 정보유출 사태로 인해 고작 한달동안 카드 재발급으로 든 비용만 500억 원이라고 한다. 드러나지 않는 피해들을 포함하면, 지난 10여년동안 얼마나 많은 사회적 비용이 들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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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주민번호를 바꿀 때가 되었다. 방향은 명확하다. 주민번호와 같은 개인식별 체계는 생년월일, 성별, 출생지 등을 알 수 없는 임의의 일련번호 체계로 바뀌어야 한다. 주민번호 자체가 정보주체의 의도와 무관하게 나이, 성별, 출신지를 노출시키며, 이러한 정보 역시 차별을 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번호는 ‘사람’에게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신분증에 부여되는 것이어야 하며, 필요할 경우 변경할 수 있어야 한다. 우선 현재 주민번호가 유출된 사람에게는 원할 경우 변경해주어야 함은 물론이다. 정부는 법적 근거가 없다는 얘기를 되풀이하지 말고, 의지가 있다면 법적 근거를 마련해주어야 한다.
무엇보다 국가가 부여하는 식별번호를 주민번호처럼 여기저기 사용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 이미 각 사회 영역에는 고유의 식별번호가 있다. 의료 영역에는 의료보험증 번호를, 조세에는 조세번호를, 학교에서는 학번을 쓰면 된다. 주민번호는 복지나 선거 목적으로 최소한도로 이용되어야 한다.
▲ 오병일 진보네트워크센터 활동가 | ||
주민번호없는 세상을 상상하기 힘들다면, 그만큼 우리가 이 체제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통제와 관리에 익숙해진 것이다. 세계 대부분의 나라들은 한국의 주민번호 체제와 같은 것이 없어도 잘 돌아가고 있다. 정보화가 진행될수록 주민번호의 위력은 배가된다. 주민번호 체제가 유지된다면, 한국에서 프라이버시권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 이 기회를 놓치면, 또 몇 년, 몇 십년 동안 주민번호 체제가 유지될지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