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독재 미화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를 두고 조선·중앙·동아일보 등이 연일 ‘균형잡힌 사관’, ‘대한민국 사관’ 등으로 포장하고 나서는 가운데 조선·동아일보의 과거 친일행각에 대한 비판이 나온다. ‘민족지’로 시작했던 두 언론사는 1930년대 중일전쟁을 전후해 일왕에 대한 찬양과 일제의 징병·징용을 부추기는 등 친일행태를 벌여왔다.

조선일보의 경우 방응모 전 사장이 취임한 이후 친일행위가 노골적으로 표출됐다. 평안북도 정주에서 광산업으로 큰 돈을 번 방 전 사장은 조선일보가 경영난으로 표류하고 있던 1932년 조선일보와 인연을 맺고 이후 조선일보를 인수, 1933년 조선일보 사주로 취임했다.

방응모 역시 초기 민족주의 활동을 벌여온 것으로 알려졌다. 1932년에는 안창호의 사면과 복권을 위해 노력했으며 일제시대 대표적 저항시인인 한용운을 후원하기도 했다. 하지만 동시에 1933년 일제의 기관총 구입비용 1600만원을 헌납하고 1935년 친일잡지 조광을 창간하는 등 친일과 민족주의자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다 1940년대 이후 본격적인 친일파로 활동한다.

방응모는 조광 1940년 3월호에서 “황국 일본이 명치유신 이후 일청, 일로의 양 전역을 지나 오늘 만주사변과, 지나사변을 겪는 동안 우리의 발길은 대륙에 힘차게 드듸서게 되었으니 여기 일본의 뻐더가는 생장 발전의 힘참 거름을 볼 수 있거니와 이제 2천 6백년 2월11일 기원을 당하와는 천황, 황후 양 폐하와 성수무강 하옵심을 삼가 비옵고 천태자 전하, 의궁친왕 전하, 조궁, 효궁, 순궁, 청궁 4대친왕 전하의 어강녕을 빌어 마지 안는다 (중략) 이 전국적 제전에 임하여 오인은 국운의 창성과 황군장병의 무운장구를 삼가 기원하여 마지안는바이다”라는 글을 싣기도 했다.

이 사이 조선일보에서도 점차 친일논조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봉창의 폭탄 투척 사건이 있었던 1932년 1월 10일에는 “어료차(천왕의 마차)에 이상이 없어 오전 11시 50분 무사히 궁성에 환행하시었다”고 보도했다. 조선일보는 1937년 1월 1일치 1면에서 일왕 부부의 사진을 1면에 크게 실었으며 이후 해마다 1월 1일에 일왕 부부 사진을 실었다.

아울러 조선일보는 1939년 4월 29일자 사설에서 일왕 히로히토의 생일을 맞아 생일축하문을 쓰며 충성의 넘어선 ‘극충극성’이란 표현을 쓰고 일왕을 ‘지존’이라고 표현했다. 항일독립운동을 말살하기 위한 ‘조선사상범 보호관찰령’에 대해서는 1936년 12월 13일자 사설에서 “사회개조를 목적으로 한 사상범을 대상으로 하는 법령인 만큼 사회적 의의가 크다고 할 것”이라 주장했다.

   
▲ 조선일보 1940년 1월 1일자 신년호. 히로히토 일왕 부부의 사진과 일장기가 선명하다.
 
조선일보는 중일전쟁이 시작된 1937년 8월 2일자 사설에선 “출정장병을 향하여 위로 고무 격려의 편지 한 장 보내는 것도 총후(후방)의 임무”라고 썼다. 이후 전쟁자금을 위한 국방헌금 사고를 실었다. 또한 일제의 육군특별지원병제도에 대해선 1938년 6월 15일자 1면 머리기사에서 “황국에 대해 갈충진성을 다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1939년 4월 29일자 1면에선 ‘천장절’(일본 천황의 생일)을 맞아 “신민 두루 성스러운 뜻을 받들어 오래오래 사실 것을 축하하옵는 동시에 만백성이 한마음으로 어려운 시국에 대처해 새로운 동아시아 건설의 성업을 수행해야 할 것이다”라고 적었다.

초기 활동에도 불구하고 조선일보를 ‘친일 부역언론’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조선일보가 지금까지 자신들을 ‘민족지’라고 칭하지만 그러기에는 일제 부역 흔적이 너무나 선명하다. 방응모 전 사장도 해방정국부터 친일파로 분류되고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친일인명사전에도 등재되는 불명예를 안았다.
동아일보도 마찬가지다. 동아일보 사주 일가의 조상인 김성수 전 사장은 1919년 3·1운동 당시 자신의 집을 회합장소로 내줄 만큼 민족주의 운동을 펼쳤다. 상하이 임시정부에 후원금을 보내고 김좌진 장군의 독립군을 후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성수 역시 친일파로 변절했다. 그는 1920년 장덕수 등과 함께 동아일보를 설립하고 개량주의 노선을 천명했지만 동아일보는 1936년 일장기 말소 사건 이후 친일 행태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김성수 본인도 중일전쟁에서 일제를 옹호하는 라디오 방송을 했으며 일제에 군사헌금 1000만원을 헌납했다.

김성수는 1940년 ‘학도 출진 장행의 밤’이라는 행사를 개최하여 “반도 청년에게 순국의 실이 열렸는데도 불구하고 왜 학도 전원이 용감하게 지원하지 않는가”라고 말했다. 같은 해 ‘보전 장행회’를 개최해 “학병 지원은 이 시대 최고의 영광이며, 한번 길이 열린 이 순국의 대도에 시종여일하게 돌진함으로써 학도의 머리에는 영광이 길이 빛날 것이다”는 요지의 격려사도 했다.

동아일보도 1936년 일장기 말소사건 이후 279일간 정간된 후 속간과 함께 낸 사고에서 “대일본제국의 언론기관으로서 조선 통치의 익찬(도와서 올바른 데로 인도함)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1938년 항일감정을 없애는 신민교육을 위한 ‘교육령’을 개정 공포했을 때는 그 해 4월 3일자 기사에서 “교육령 개정은 미나미 총독의 국체명징, 학제쇄신의 구체화로서 조선 교육사상 획기적인 것”이라고 적었다.

   
▲ 동아일보 1938년 1월 1일자 신년호. 역시 히로히토 일왕 부부의 사진이 실려있다.
 
7월 7일에는 중일전쟁 1년을 맞아 “조선은 병참기지로서 중대한 존재로 총후 국민의 열렬한 단결, 호국의 운동은 각 지역에 앞서 모범을 보이고 있다”고 밝혔다. 1939년 조선총독부 조선인 지원병 가운데 최초의 전사자가 발생하자 “조선 지원병의 영예”라고 보도했다. 1939년 4월 29일에는 조선일보와 마찬가지로 천장절을 맞아 일본 황실을 찬양했으며, 1940년 일왕 히로히토 생일에는 “1억 민초는 항상 황은의 광대심후함에 감격을 새롭게 한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1940년 폐간됐다. 이를 두고 이들 언론에서는 ‘민족지의 전통이 없었다면 폐간 되었겠느냐’고 반박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 언론의 폐간은 일제의 조선어말살정책에 따른 것이다.

이들 언론들은 방응모와 김성수에 대해서도 일제의 무단통치에 어쩔 수 없이 일부 협력했을 뿐, 민족주의자라는 평가를 내려야 한다고 주장하곤 한다. 그러나 민족주의와 독립운동은 다소 결이 다르다. 이들의 글을 보면 민족주의가 한반도에 한정된 것인지, 일본인까지 아우르는지 알 수 없을 정도다. 때문에 불가피하기 때문에 일제에 협력한 것을 두고 친일이라고 평가내릴 수 없다는 주장은 상황논리일 뿐이다.

기본적으로 두 사람은 일제에 협력하면서 재산을 불렸고 그 재산은 여전히 후손들에게 전해지면서 두 신문도 족벌언론으로 현재까지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언론들은 ‘친일’이라는 정체성의 근본을 부인한다. 친일 논란에 휩싸인 교학사 교과서에 대한 이들의 애정도 본인들의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목적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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