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3월 9일,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델라웨어 카운티 미디어 가에 위치한 FBI 지국 사무실. 전날 밤 무하마드 알리와 조 프레이저가 맞붙은, 전 세계를 열광시킨 세기적 대결의 열기와 흥분이 채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아침 일찍 출근한 FBI 요원들은 할 말을 잊었다. 출입문 자물쇠는 뜯겨져 있었다. 철제 캐비닛 안에 있던 내부 비밀문서들도 몽땅 없어졌다. FBI 사무실이 털린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FBI 요원들은 눈앞에 벌어진 일을 보고도 이를 믿기 어려웠다. 누가 감히 이런 일을…. 사라진 내부 문건에는 당시 대학가의 반전 시위 주모자와 참가자, 흑인 인권운동가 등에 대한 비밀스런 사찰과 공작 내용도 대거 포함돼 있었다. 절대 외부로 새나가서는 안될 비밀자료들이었다. 전날 밤 ‘세기의 승부’가 펼쳐지던 그 때 FBI로서는 결코 잊을 수 없는 FBI 사무실 침탈이라는 ‘세기적 사건’이 터진 것이다.

   
▲ 무하마드 알리와 조 프레이저 대진 포스터. 이 '세기의 대결'이 있던 1971년 3월 8일 FBI 델러웨이 지부 사무실이 털리는 세기적 사건도 발생했다. 사진=뉴욕타임스∙레트로리포트 화면 갈무리
 
당시 FBI는 에드가 후버 국장이 지배하는 또 하나의 정부였다. 법무장관은 물론 역대 대통령들 까지도 그를 무시할 수 없었다. FBI의 사찰은 비단 반전 시위대나 인권운동가들에 국한 된 게 아니었다. 정치인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유력 정치인들의 비밀과 약점을 꿰고 있었다. FBI는 후버의 ‘사찰권력’을 가능하게 하는 눈과 귀였다. 닉슨 대통령은 이런 후보와 FBI를 적극 활용했다. 그의 운명을 결정하는 워터게이트 사건의 씨앗은 이 때 이미 잉태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후버 국장은 격노했다. 자신의 왕국을 급습한 불한당들을 잡기 위해 그는 FBI 수사 요원 200명을 급파했다.

“FBI 사무실이 털리다니…” 진노한 후버 국장 수사요원 200명 급파

사건 발생 10여 일이 지난 후 <뉴욕타임스>와 , <워싱턴포스트> 등에는 ‘FBI 시민감시단(Citizen's Commission to Investigate the F.B.I)’ 명의로 된 우편물이 배달됐다. 그 안에는 FBI의 비밀 사찰 활동을 입증하는 FBI 내부문건들이 들어 있었다.

   
▲ FBI의 사찰 실태 등을 보도한 <워싱턴 포스트> 기사. 사진=뉴욕타임스∙레트로리포트 화면 갈무리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FBI 본부에서 보낸 한 문건은 반전 운동가들과 저항적인 대학생 그룹들과의 대면 접촉을 늘릴 것을 지시했다. “(반전운동가와 대학생들에게) 편집증적 망상에 시달리게 할 수 있으며, 나중에는 모든 우편함 뒤에는 FBI 요원이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을 심어줄 수 있다”는 것을 노린 것. 정보 수집 차원을 넘어, 대민 심리공작에 나설 것을 지시한 것이다.

비단 이 뿐만이 아니었다. ‘코인텔프로(Cointelpro)’라는, 당시로선 그 정체가 모호한 용어의 ‘작전’ 내용에는 인권운동가와 정치적 반대세력, 이른바 반체제 인사, 공산주의자 등을 대상으로 한 광범위한 스파이 활동과 함께 이들에 대한 ‘공작’ 내용도 담겨 있었다. 가령 대학교와 학생모임, 시민단체 등에 정보원을 심는 것은 기본이고, 거짓 정보를 흘려 운동세력들이 서로 반목하고 의심하도록 했다. 나중에 밝혀진 것처럼 마틴 루터 킹 목사에게 “자살하지 않으면 혼외 관계를 폭로하겠다”는 협박 메일을 보낸 것도 바로 FBI의 ‘코인텔프로’ 작전의 하나였다. ‘코인텔프로’라는 말이 적(혹은 적대세력)에 대한 정보공작을 의미하는 ‘카운터인텔리전스 프로그램(Counterintelligence Program)’의 줄임말이라는 것은 그로부터 수년이 지난 후에야 카 스턴 NBC 기자가 밝혀낼 수 있었다.

FBI시민감시단이란 이름으로 배달된 FBI 내부문건은 당시 진보적인 성향으로 분류되던 상하 의원들에게도 전달됐다. 그러나 그 누구도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 언론도 마찬가지였다. <뉴욕타임스>와 는 ‘도난당한 기밀문서를 돌려 달라’는 FBI와 후버 국장의 위세에 눌려 결국 FBI에 요구에 순응했다. 물론 기사화도 되지 않았다.

NYT·LA타임스는 FBI 압력에 굴복…진보적 정치인도 ‘침묵’

   
▲ 레인즈 부부 자택 2층 상황실에서 작성한 FBI 지부 사무실 도면. 사진=뉴욕타임스∙레트로리포트 화면 갈무리
 
오직 <워싱턴 포스트>만 예외였다. FBI 도난사건 발생 2주 만에 <워싱턴포스트>에 유출된 FBI 문서가 기사화됐다. FBI가 오랫동안 대학생 조직과 시민단체, 인권운동가들을 감시하고 사찰하고 있다는 기사였다. 창립자의 딸로 <워싱턴 포스트>의 발행인을 맡은 지 채 2년이 되지 않았던 캐서린 그레이엄은 FBI의 문건 반환 요구를 뿌리치고 이를 보도하기로 결정했다. 시민들이 알아야 할 일이라면 보도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본 것이다. 그 때서야 <뉴욕타임스>, 등 다른 신문과 방송도 보도 대열에 합류했다.

FBI는 후버 국장의 특별지시로 200여 명의 수사팀을 투입해 범인 검거에 모든 힘을 쏟았다. FBI의 위신이 걸린 문제였다. 그러나 수사는 지지부진했다. 범인들이누구인지 도대체 종잡을 수 없었다. ‘FBI 시민감시단’이 보낸 우편물을 샅샅이 조사했지만 지문 하나 찾을 수 없었다. 유일한 단서는 사건이 발생하기 얼마 전 FBI 요원이 되고 싶다며 델라웨어 지부 사무실을 찾았던 스와트모어 대학 여학생이었다. 그가 밝힌 신원과 주소는 모두 가짜였다. 당시 그녀를 인터뷰했던 FBI 요원의 진술에 의해 안경 낀 20대 여성의 몽타주가 작성됐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더 이상의 단서는 나오지 않았다. FBI의 수사는 답보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FBI는 1976년 3월 11일 이 사건을 ‘미결사건’으로 종결지었다. 절도혐의 공소시효 5년을 넘긴 지 3일 만이었다. FBI 사무실을 완벽하게 턴 완전 범죄였다.

그들이 누구인지, 어떤 사람들인지는 43년이 지나도록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지난 7일 이들 간 큰 도둑들이 자신을 드러내기 까지는. 도둑들은 모두 8명이었다. 처음에는 9명이었지만, 1명은 중간에 빠졌다. 도둑들을 조직한 것은 당시 하버포드 대학의 물리학 교수였던 윌리엄 C 데이비던이었다. 반전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있던 데이비던은 1970년 닉슨대통령이 캄보디아 침공을 발표하고, 반전운동이 그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 답답해했다. 그는 반전운동과 인권운동을 탄압하던 FBI의 공공연한 사찰과 정치공작 실태를 폭로할 수 있다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믿었다. 그 증거를 찾기 위해 FBI 사무실을 터는 계획을 세웠다. 후버의 FBI는 매우 관료화된 조직이었고, 따라서 모든 지시 사항과 사찰 내용 등이 문서로 작성돼 보관돼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데이비던은 반전운동을 하면서 만난 사람들 가운데 조심스럽게 믿을만한 사람을 골랐다. 존 레인즈와 보니 레인즈는 당시 3자녀를 둔 부모이면서도 부부가 모두 이 FBI 털기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존 레인즈는 당시 템플 대학의 종교학 교수였다. 자물쇠를 따기 위한 잠금장치 해제 전문가도 있었다.

델라웨어 카운티 FBI 지부 3달 동안 살펴

   
▲ FBI가 작성한 보니 레인즈 몽타주. 물론 위장 신분으로 인터뷰해 그의 실명은 밝혀지지 않았다. 사진=뉴욕타임스∙레트로리포트 화면 갈무리
 
이들은 당초 필라델피아 FBI 사무실을 털 생각이었지만, 곧 계획을 수정했다. 필라델피아 FBI 본부 사무실은 도심 고층 빌딩에 위치하고 있어 잠입이 거의 불가능했다. 이들은 그 목표를 델라웨어 카운티 FBI 지부로 변경했다. 미디어 가에 위치한 FBI 지부가 입주해 있는 곳은 아파트 건물이었다. 주민들이 많아 접근하기가 용이했다. 보안도 본부 사무실 보다는 허술할 터. 문제는 과연 쓸 만 한 자료가 보관돼 있을지 여부였다. 지부인 만큼 중요한 자료는 보관하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에드가 후버의 관료주의에 기대를 걸기로 했다.

이들은 레인즈 부부 집 2층에 상황실을 차렸다. 치밀한 사전 준비에 들어갔다. 3달 동안 델라웨어 FBI 지부 사무실 주변을 살폈다. 주민들의 이동 시각과 패턴, FBI 요원들의 출퇴근 시각과 야근 근무 현황, 경찰 순찰 시각, 건물과 사무실 구조 등을 세밀하게 파악했다. 3달 쯤 지난 다음에는 FBI가 입주해 있는 건물의 거의 모든 현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마지막 관문은 보안장치의 작동 여부. 이는 직접 사무실에 가봐야 확인할 수 있었다. 당시 29살이던 보니 레인즈가 맡았다. FBI 지부에 전화를 해 그곳에서 일하고 싶다면서 인터뷰를 잡았다. 스와트모어 대학생으로 신분을 위장하고 히피 머리를 올려 모자로 감추고, 안경을 꼈다. 또 인터뷰 하는 내내 장갑을 껴 지문이 남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그가 바로 FBI가 몽타주를 작성해 찾던 바로 그 인물이었다. 사무실에 가본 결과 보안장치가 돼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했다. 하물며 FBI 문서들이 들어 있는 것으로 보이는 캐비닛에는 자물쇠도 없다는 것도.

D데이는 알리와 프레이저의 대결이라고 하는, 세기의 승부가 펼쳐지는 3월 8일 밤으로 잡았다. 세상의 관심이 온통 이 세기의 대결에 쏠려 있는 때가 FBI 사무실을 털기에는 가장 적기라고 판단한 것. 그들의 예상은 적중했다. FBI 사무실을 터는 동안 경찰 순찰차 한 대 오지 않았다. 장애물이라면 단 하나, FBI 사무실 잠금장치 가운데 하나는 전문가도 열 수 없어 결국 옆문 자물쇠를 쇠지레로 따고 들어가야 했다. 그들은 캐비닛의 문서 파일들을 통째로 슈트케이스에 넣어 대기하고 있던 차량으로 옮겼다.

이들 8인조 FBI 습격팀은 포츠타운 인근의 농가에서 10일 가량 머물며 파일의 내용을 분석하고 분류하는 작업을 했다. 마침내 FBI의 사찰과 더러운 공작 실태를 담은 파일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FBI 시민감시단’ 이름으로 이를 언론사와 믿을만한 정치인들에게 보냈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마침내 <워싱턴 포스트>가 이를 보도하면서 이들은 비로소 안도할 수 있었다.

   
▲ 레인즈 부부. 사진=뉴욕타임스∙레트로리포트 화면 갈무리
 
그 후 그들은 각자의 길을 갔다. 계속해서 반전운동을 펼친 이도 있고, 레인지 부부처럼 그 일을 끝으로 정치적 활동을 접은 이들도 있다. 사실 FBI를 턴 8명의 도둑들 가운데 레인즈 부부처럼 큰 위험을 감수한 이들도 없다. 2살, 6살, 8살짜리 세 아이를 둔 부모였다. 만의 하나 일이 잘못될 경우 아이들은 꼼짝없이 부모 없는 고아 처지가 될 상황이었다. 이들 부부는 거사 직전 각각 형제와 부모에게 만일의 경우에 아이들을 부탁한다고 말했다. 그들은 그 후 8명이 같이 모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런 그들이 왜 43년 만에 자신들이 한 일을 밝히기로 한 것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겠다. 삶을 정리해야 하는 시점에서 이제라도 자신들의 ‘가장 치열했던 그 때’를 세상에 알리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았을 터. 그러나 그 주된 이유로 이들이 든 것은 바로 에드워드 스노든이 폭로한 미 국가안보국(NSA)의 전 방위적인 감시와 사찰 실태다. 그 당시 그들이 위법함을 무릅쓰고 뭔가 행동에 나서지 않으면 안됐던 것 이상의 보다 끔찍한 상황이 지금 또 다시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진실 추구 위해선 뭐라도 해야 할 상황”

당시 29살이었던 바니 레인즈는 <가디언>에 기고한 글에서 “우리 국가는 다시 분열돼 있다”면서 “문제는 시민들이 테러에서 우리를 지켜주기만 한다면 정부가 무슨 일을 해도 관계없다는 식의 자세를 갖고 있는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는 “그 때도 그랬지만, 지금 이 시기야말로 진실을 추구하기 위해선 당시 FBI 사무실에 침입했던 것과 같은 무언가 과감한 일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싶다”고 밝혔다. 그는 에드워드 스노든을 ‘정당한 휘슬블로어’라고 평가했다. 그들이 43년 만에 오래된 비밀을 공개하기로 작심한 배경일 터이다. 8명 중 3명은 여전히 그 비밀을 지키기로 했다. 이들의 이야기는 당시 FBI자료를 첫 보도한 <워싱턴 포스트> 여기자였던 메티 메즈거의 책으로 곧 출판된다.

8인조 FBI 습격 사건은 미국의 저널리즘 보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익명의 도둑들이 정부 기관의 내부 서류를 훔쳐 언론에 제공한 것은 미 언론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미 법무부와 FBI는 이들 절취 행위의 위법성과 정부문서라는 재산권을 내세워 이들 자료의 반환을 요구하고, 보도를 하지 말라고 윽박질렀다. 대다수 언론이 이에 응했지만 시민의 알권리를 앞세워 <워싱턴포스트>가 보도를 강행하면서 그 지평을 크게 넓혔다.

<뉴욕타임스>가 베트남 전쟁의 실상을 담은 ‘펜타곤페이퍼’를 보도한 것이 그해 6월. <워싱턴 포스트>의 FBI 내부문건 보도가 나름 그 길을 열어준 셈이다. 그 다음해 <워싱턴포스트>가 워터게이트 특종 보도를 할 수 있었던 것도 어찌 보면 FBI 절취 문건 보도가 있었기에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오랫동안 ‘딥 스로트’로만 알려졌던 비밀 정보제공자가 마크 펠트 전 FBI 부국장이었다. 그는 이른바 ‘코인텔프로’의 책임자이기도 했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