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10억 원을 거절한 사람이 있다. 집안 형편이 좋지도 않다. 오히려 8년 투병 생활에 돈은 항상 부족했다. 엄마는 삼성전자에서 줄 수 있다는 돈 10억 원을 받지 않겠다는 딸의 뺨을 네 대나 때렸다. 엄마는 돈 걱정 없이 딸에게 재활치료를 받게 해주고 싶었다.

삼성전자 LCD사업부에서 6년간 일하다 뇌종양에 걸린 한혜경(35)씨는 삼성에서 돈을 받는 대신 산재 인정을 위한 싸움을 택했다. 오는 27일은 혜경씨가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한 행정소송 선고가 나는 날이다. 혜경씨가 산재인정 싸움을 시작한지 거의 5년만이다. 23일 오전 강원도 춘천시 강원대학교 병원에서 혜경씨를 만났다.

“솔직히 말해서 기자님하고 나하고 친군데 돈 때문에 나를 배신 배반할 수 있나요? 친한 친군데 그럴 수 있나? 저는 그럴 수 없거든요. 반올림(반도체노동자의건강과인권지킴이) 이 우리한테 잘해줬고 종란언니가 좋았거든요”

언어장애 1급 판정을 받은 혜경씨는 느리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어머니 김시녀(59)씨는 "산재 승인 판결은 우리만의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삼성에서 줄 수 있다는 10억…받을 수 없었다

혜경씨는 1995년 삼성전자 LCD 사업부 기흥공장에 입사해서 6년간 일했다. 당시 혜경씨는 19살 고등학생이었다. 남편과 이혼 후 어렵게 지내던 어머니 김 씨는 딸이 자랑스러웠다. 김씨는 "혜경이가 삼성에 들어갔을 때 너무 좋아서 잔치까지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당시 혜경씨가 했던 일은 건강에 '나쁘다'고 단정 짓지는 못해도 분명 ‘좋지는 않은’일이었다. 그는 고체인 솔더크림을 액체로 만들어 직접 주걱으로 떠서 전자기판에 바르는 작업을 했다. 그런 다음 전자기판에 작은 부품을 박고 솔더크림이 굳기 전에 육안으로 검사를 했다. 이게 1차 검사다.

   
▲ 한혜경씨와 어머니 김시녀씨를 23일 강원도 춘천시 강원대병원에서 만났다. 사진= 이하늬 기자
 
1차 검사를 마친 전자기판은 열처리 기계(리플로우기)에 들어간다. 기계에 들어간 솔더크림은 굳어져서 나왔다. 혜경씨는 열처리 된 전자기판을 또 다시 육안으로 확인했다. 이게 2차 검사다. 이 과정에서 수차례 등장하는 솔더크림은 전자기판에 효율적으로 납땜을 하기 위해 크림으로 만들어진 납이다. 세계보건기구(WHO)는 납을 '발암 가능성' 물질로 분류하고 있다.

IPA(이소프로필알코올)라는 물질도 취급했다. 혜경씨는 "전자기판에 이물질이 묻으면 IPA로 닦아줘요. 헝겊에 IPA를 충분히 적셔서 닦아주고. 솔더크림이 손에 묻으면 IPA로 닦고 그래요"라고 말했다. 그러나 IPA도 독성이 있는 화학물질이다. 반올림은 "대량으로 단시간에 흡입하게 되면 의식불명 상태가 될 수 있으며 피부에 접촉될 때는 피부를 부식시키고 손상을 입힐 수 있다"고 지적했다.

유독물질로 발암물질을 닦으며 일했다

입사 3년 만에 생리가 멈췄다. 주변에도 생리를 거르는 동료들이 많았다. 이상하게 생각할 만도 하지만 오히려 누구나 겪는 일이라고 생각해 '안도'했다. "공장 주변 아주대학교 산부인과는 삼성이 다 벌어 먹인다는 이야기가 있었는데도 이상하다는 생각을 못했어요" 라고 혜경씨가 말했다. 무엇보다 자신이 취급하는 물질이 위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결국 2001년 8월, 6년 만에 회사를 그만뒀다. 무월경 상태가 3년이나 지속되자 걱정이 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몸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잠을 자도 개운하지가 않고 감기를 달고 살았다. 걸음걸이가 부자연스러워지기 시작했고 종종 넘어졌다. 어느 날부터는 헛것도 보였다. 어머니 김씨는 "애가 헛소리를 하는거야. 문고리에 뭐가 앉아있다거나 할머니가 보인다거나"라고 당시를 기억했다.

2005년 병원에서는 혜경씨에게 뇌종양 판정을 내렸다. 의사는 "종양의 깊이로 볼 때 종양이 생긴지 7~8년쯤 된 것 같다"고 진단했다. 1998년~1999년, 혜경씨가 한창 회사에 다니던 시기다. 대수술이 진행됐다. 다행히 목숨은 살릴 수 있었지만 대신 혜경씨는 시력장애1급, 언어장애1급, 보행장애1급을 판정받았다. 당시 혜경씨의 나이는 27살이었다.

그러나 근로복지공단은 혜경씨의 산재신청을 불승인 했다. '역학조사 결과 업무와의 관련성이 낮고 의학적 입증이 부족하다'는 이유였다. 반올림은 "한혜경씨가 일하던 현장은 2002년에 이미 폐쇄됐는데 무엇으로 역학조사를 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며 "삼성측이 내민 자료가 객관적인 자료로 둔갑한 것"이라고 반발했다. 재심사를 청구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같았다.

   
▲ 한혜경씨와 어머니 김시녀씨를 23일 강원도 춘천시 강원대병원에서 만났다. 사진= 이하늬 기자
 
27일 법원 선고…산재 인정 받을까

남은 건 행정소송 밖에 없었다. 이는 근로복지공단의 산재 불승인 처분이 잘못됐으니 취소해달라는 소송이다. 혜경씨는 2011년 4월 서울행정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그리고 그 소송의 선고가 오는 27일이다. 어머니 김씨는 "재판에서 보니 판사가 삼성 쪽에 우호적인 그런 느낌이 조금 들더라고요. 쉽지 않을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삼성과 산재 이야기가 나오자 혜경씨가 머리를 감싸고 주먹을 꽉 쥐었다. 혜경씨가 표현하는 분노다. 그는 울고 싶어도 눈물이 안 나온다. 눈물샘은 뇌종양 수술과정에서 같이 제거됐다. 그런 딸을 바라보던 김씨는 눈물을 훔쳤다.

“복잡해요. 제가 이렇게 된 것도 열 받고. 이렇게 안 될 수 있었는데 이게 뭐야. 이건희 회장이 백 만원 짜리 옷 입을 거 만원, 십 만원 덜 주면서 나머지로 회사 여직원들 건강을 위해 써줄 수 있잖아요. 그러면 이렇게 서로 미워하지 않을 텐데. 이건희 회장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이제는 너무 화가 나”

산재를 인정받는다고 해도 끝난 것이 아니다. 근로복지공단이 항소하게 되면 또 긴 싸움을 시작해야 한다. 김씨는 “소송에서 이기면 나는 얘 데리고 가서 근로복지공단 앞에서 천막치고 살 거예요. 제발 항소하지 말라고. 너 갈 거야?”라고 말했다. 그 말에 혜경씨도 손으로 파이팅을 해보였다. “엄마가 데리고 가면 나도 가야지”

그러면서도 이들은 승소에 대한 기대감을 저버리지 못했다. 김씨는 “꿈은 현실이랑 반대라고 하잖아요. 그래서 ‘안 될거야 안 될거야’ 그러고 있어요. 그래도 그러다가 ‘될 거야’ 그러고”라고 말했다. 혜경씨 선고는 오는 27일 오후2시 서울행정법원 B219호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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