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전국 교구에서 사제들이 국정원의 불법 선거개입을 비판하는 시국미사를 연이어 봉헌하고, 급기야 11월 22일 천주교 정의구현 전주교구 사제단이 시국미사에서 ‘대통령 사퇴’를 촉구했다. 다음날 청와대 홍보수석이 사제단 신부들을 거론하며 “그 사람들의 조국이 어디냐”고 묻고, 새누리당 원내수석부대표가 “사제복 뒤에 숨어 대한민국 정부를 끌어내리려는 반국가적 행위”라고 비난하고 나서자, 24일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대주교가 ‘신앙의 해’ 폐막미사 중에 “사제가 직접 정치에 개입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발언해 논란이 빚어졌다. 이날 대주교는 <사제의 직무와 생활지침>을 들어, 사제들의 정치개입으로 “교회적 친교의 분열을 야기할 수 있음”을 경고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25일 박근혜 대통령 역시 “지금 국내외의 혼란과 분열을 야기하는 행동들이 많다”며 “저와 정부는 국민들의 신뢰를 저하시키고 분열을 야기하는 이런 일들은 용납하거나 묵과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력히 사제단을 비난했다.

이러한 상황은 박정희 대통령을 흠모하고, 박근혜 대통령에게 대를 이어 충성을 맹약했던 보수단체들에게 횡재를 안겨준 격이 되었다. 천주교 안에서도 천주교뉴라이트, 나라사랑기도회를 잇는 ‘대한민국수호천주교모임’이 박근혜 정부를 위해 신나게 ‘헌신’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주었다. 이들은 그동안 전국 성당을 돌면서 정의구현사제단에 대한 ‘종북 마녀사냥’에 나서왔는데, “간첩이 날뛰는 세상보다는 차라리 유신시대가 더 좋았다”고 발언해 물의를 빚었던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 손병두 이사장도 이 집단에 속한다.

   
▲ 지난 3월 즉위한 프란치스크 교황. ⓒ 한국천주교주교회의
 
그러나 26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안온한 성전 안에만 머무는 고립된 교회가 아니라 거리로 뛰쳐나가 멍들고 상처받고 더러워진 교회를 원한다”는 내용을 담은 <복음의 기쁨>이라는 권고문을 발표하자, 상황이 반전되었다. 염수정 대주교는 ‘사제 정치개입 금지’를 밝힌 지 한 주일도 지나지 않은 29일, 자신의 영명축일 미사를 명동성당에서 봉헌하면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세상의 부조리와 불평등의 구조에 짓눌리지 말고 용감하게 개선하며 변화시키는 데 주저하지 말라고 용기를 주신다”면서 “그러나 철저하게 복음적인 방법을 선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제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을 드러내는 데 ‘시국미사’보다 더 복음적인 방법은 없다. 시국미사란 성당에서 현 시국을 염려하며 기도하는 자리가 아니던가. 교황청에서는 내년 2월 22일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에 추기경 서임식을 거행할 예정이다. 그전에 새로운 추기경을 대거 선출할 텐데, 염수정 대주교 역시 유력한 추기경 후보자인 상황에서 교황의 의중에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을 재간이 없다. 교황은 줄곧 ‘교회 밖 세상’에 주목하라고 강조했다. 또한 ‘공동선을 위한 정치행위는 그리스도인의 의무’라며 교회의 정치참여를 독려해 왔다.

‘시국미사’라는 용어는 한국교회에서만 쓰는데, 이런 미사가 봉헌되기 시작한 것은 하필이면 박정희 유신정권 때였다. 당시 김수환 추기경과 지학순 주교는 “완전한 민주주의가 완전한 반공”이라고 말했다.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종북’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먼저 ‘민주주의’를 바로 세워야 한다는 뜻이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그때도 유신정권에 비판적인 입장에 있던 농민, 노동자, 시민, 학생들을 중앙정보부 등 정보기관이 중심이 되어 ‘빨갱이’로 몰아붙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공동선을 위한 기도’ 자체가 정치행위가 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 11월 22일 롯데마트 군산점 앞에서 열린 '불법·부정선거 규탄과 대통령 사퇴 촉구' 촛불집회. ⓒ 강성원 기자
 
그동안 서울대교구의 사제들은 ‘유구무언’(有口無言)이었다. 시국선언에 서명은 했지만, 명단을 밝히지 못했다. 심지어 대구대교구조차 103명이나 되는 사제가 제 이름으로 시국선언을 발표하고 시국미사를 봉헌했지만, 서울대교구만은 시국미사를 봉헌할 수 없었다. 그런데, 교구장인 염수정 대주교가 “복음적인 방법으로” 정치에 참여할 길을 열어주었으니, 당연히 정답은 ‘시국미사’다. 서울대교구의 사제는 1천명이 넘는다. 한국천주교회 전체 사제의 25퍼센트가 서울대교구 소속이라는 점에서 서울대교구 사제들 가운데 일부라도 적극 나서준다면, 사회적 파급력은 엄청날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줄곧 ‘가난한 이들의 참상에 대한 공감하고 연대’하는 ‘야전병원’이 되어야 한다며, 교회가 사회적 ‘변방’에 머물 것을 주문해 왔다. 사람들이 고통 받는 현장에서, 압제받는 이들이 해방을 요구하는 거리에서 ‘복음’이 선포되길 희망했다. 경험적으로 한국교회처럼 교황청의 향방에 영향을 많이 받아온 교회도 없다. 게다가 오는 12월 8일은 인권주일이며 ‘사회교리주간’이다. 교회가 인권과 사회문제에 집약적으로 관심을 갖는 때라는 점에서, 박근혜 정부는 한국천주교회와 승산 없는 싸움을 벌여야 하는 셈이다. 이미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인 이용훈 주교는 “국가권력이 법률과 사회적 합의로 정한 한계를 넘어선다면, 권력은 그것 자체로 불법”이라는 바둑돌을 놓았다. 정부·여당의 다음 수가 무엇일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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